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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갤러리 서울 중구 충정로 1가 68번지 Tel. 02_3701_5760 gallery.munhwa.co.kr
박제된 시선, 그리고 말(言)의 뼈 ● 축사-삶과 죽음, 재생의 통과제의(母宮) ● 축사를 개조한 작업실은 삶과 죽음이 엉켜있었다. 그의 삶이 있는 공간은 길에서 마당으로, 마당에서 길로 열려있는 축사의 한쪽 입구이다.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길목은 그가 처음 시도했던 인간의 텅빈 속들이 가죽만 남은채 을씨년스럽게 방치되어 있다. 욕망의 거푸집이었을 육신의 건장한 껍데기들은 그가 처음 대면한 '自我'의 실재였다. 소는 가고 없는, 축사의 입구에는 가죽만 남아서 하늘담 은 물에 제몸을 녹이고 있다. 그리고 다시 몸을 얻어야 하는 가죽들의 부활을 위해 작가는 스치로폼을 이용해 부유하는 빈몸의 허상을 깎고 있다. 박제화 되는 조각의 몸들은 다시 제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문을 열면, 그렇게 해서 몸을 얻은 소의 현신들이 벽에 콱 박혀있거나, 낚시줄에 매달려있거나, 음습한 곳의 어느 한 부분을 자리하여 긴 호흡을 내뿜고 있다. 언 듯 '풍장'이란 시가 떠올랐다.
풍장7 ● 풍란(風蘭)이 터진다. / 손가락을 넣으면 / 빵꾸난 주머니 시원 너덜너덜 너덜. // 옷 꿰맨 곳 터져 / 살 드러나고 / 살 꿰맨 곳 터져 / 뼈 드러나는가. // 가만, / 말 꿰맨 곳 터질 때 / 드러나는 말의 뼈. // 실과 바람 사이 / 바람과 난(蘭) 사이 / 풍란과 향기사이 / 에서 노란 색깔과 초록 색깔이 알록달록 가벼이 춤추는 / 뼈들이 골수 속에 코를 박고 벌름대는 / 이 향기. ● 황동규 시인의 시집『풍장』에는 인류의 유년시절인 낙원 상태로의 복귀를 나타내는 원형적인 벌거벗음의 이미지가 자주 나온다. "그런 골목, 우리는 코트 버리고 / 웃옷 벗어 머리에 쓰고 허리 낮추고"(「풍장3」) "봄 산이 햇살 속에 겉옷 슬쩍 걸어놓고 /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 배의 솜털을 보여준다"(「풍장11」) "속옷도 모두 벗어버리고 / 속살 그대로 날으며 춤추는"(「풍장34」) "선운사 도솔산 단풍 막 지고난 뒤 / 나무의 나체들 / 그 하나도 황홀찮은 적막"(「풍장66」) 같은 구절들이 대표적이다. 그 벌거벗음은 무소유·관능·자유, 원초적 순진무구 등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러나 송필의 작품들은'유년시절인 낙원상태로의 복귀'나'무소유·관능·자유, 원초적 순진무구'와 같은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 그의 작품들은 오히려'뼈들이 골수 속에 코를 박고 벌름대는'직접적인 현실의 향기와 가깝다. 살점하나 없이 제거된 죽음의 껍질은 삭힌 살코기 냄새를 간직하고 있으며, 그 향기는 아직 우리 곁에 남아있는 긴 망각의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사상가로 제 카이유와는『인간과 성(聖)』에서 원시인들에게 시체가 부패하는 기간은 죽음에 의해 발생한 부정으로 가득 차있으며 죽음의 유독성과 전염성이 가장 활발하게 작용하는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체로부터 부패하기 쉬운 요소가 완벽하게 제거되고 단단하고 상하지 않는 뼈만 남았을 때라야 위기가 끝난다는 것이다. 송필은 위기가 끝난 상태의 주검들을 재단한다. 그러나 그도 처음에는 주검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그 악취들을 견뎌내야만 했다.
풍장이란 육신의 해체의식이 행해지는 것이다. 반면, 송필의 작품은 이미 육신의 해체의식이 끝난 상태에서 다시 그 껍질들을 봉합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축사공간은 죽음과 재생이란 통과제의가 이루어지는 모태공간(womb) 이다. 또한 이 모궁의 새로운 생명들은 박제화된 조각으로 태어나지만, 말(言)의 뼈들이 단단하게 날이 선 모습으로 우리를 응시한다. 그렇기에 풍장에서처럼'일종의 정화의식-허물벗기의 일종으로서 이를 통해 화자는 시원의 순수상태로 귀환하게 되는'것이 아니라 질곡한 삶의 현실로 재생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작품들은 비뚤어진 사회를 포용하고 쩌렁쩌렁 울리는, 비양심과 권력과 부패를 향한 북소리이다. '통통', '퉁퉁', '둥둥'울리는 북소리의 신명난 의성어는 태아시절 자궁에서 듣던 생명의 박동소리를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신명'그 자체의 의미성을 확장시킨다. 신명은'우주 생명력과 교합된 상태로 확대된 자아'로서 우주 생명이 인간 내부에 지펴들어 자기 안에 우주가 확대되어 나오는 영성적인 것이다. 또한 신명은 일과놀이 그리고 창작과 향수의 전일적 통일체로서, 모든 생명을 포태하는 출산적 정취가 고조된 민중의 미의식의 모체다. 그렇기에 신명은 예술창조과정에서 영감이라든지 구상력·열정·환상·표현동기 등을 감싸고 있는 원천적 에너지인 동시에, 크고 작은 살림살이에 무한한 창조적 계기를 부여하는 우주적 생명체험이다. 그의 작품들이 외형적 형상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자아내는'잔혹성'을 갖추면서도 생명성에의 경도(傾倒)는 또 다른 측면에서 상징화되고 있다.
소(牛), 본성을 깨달아 가는 나(我) ● 십우도(十牛圖) 혹은 심우도(尋牛圖)는 심우(尋牛, 자기의 본심인 소를 찾아 나선다), 견적(見積, 소는 못 보고 소의 발자취만 발견한다), 견우(見牛, 소를 발견한다), 득우(得牛, 야생의 소를 잡는다), 목우(牧牛, 소를 길들인다),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타고 무위의 깨달음의 세계인 집으로 돌아온다), 망우존인(忘牛存人, 이제 소는 달아날 염려가 없으므로 소 같은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안심한다), 인우구망(人牛俱忘, 다시 사람도 소도 모두 본래 空임을 깨닫는다), 반본환원(返本還源,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른그대로의 세계를 여실히 본다), 입전수수(入癲垂手, 중생을 건지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의 열가지 수행심의 과정을 나타내는 그림이다. 송필의 작업세계는 은연중 불가의 수행심(修行心)을 따르는 과정에서 있다. ● 그의 축사에는 소가 없다. 이제 그는 달아난 소를 찾아 나서야 한다. 그가 소의 발자취를 발견한 곳은 군(軍)생활을 했던 동두천이었다. 그곳은 소의 육신이 해체되는 도살장이 있으며, 소의 가죽을 여러 용도의 쓰임새로 바꾸는 공장들이 들어선 곳이다. 그는 그곳에서 소를 찾았다. 즉, 자신의 자아를 발견한 것이다. 이제 소를 길들여 무위의 깨달음의 세계인 집으로 돌아온다. 다시, 그의 축사에는 소가 없다. 이제 소는 달아날 염려가 없으므로 소 같은 것은 모두 잊어버리고, 소의 새 육신을 꿈꾸는 것이다. 그는 조용히 침잠해 들어가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른 그대로의 세계와 그 세계를 밟고 서있는 무수한 인간의 욕망과 부패를 본다. 마지막으로 그는 세상으로 내려보내는 소를 잉태시킨다. ● 작업에 앞서 소가죽에 아직 남아있는 살점들을 제거한다. 지금에 와선 이미 방부처리 된 것들을 사용하지만, 그는 가죽이 온전한 가죽으로 가벼워져 투명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 동안 가죽은 물 속에서 새로이 육신을 얻기 위한 긴 호흡을 갖는다. 이물의 호흡은 육신의 물화(物化)라는 하강제의(下降祭儀)의 방식이다. 그것은 풍장이 바람의 도움을 받아 육신의 기화라는 상승제의(上昇祭儀)를 하는 것과 반대이다. 그래서 완전히 물화된 가죽은 새 육신으로 현실세계에 합류해 들어간다. 이렇게 물질화한 육신은'익은 열매에서 그 씨앗이 터져나오는 것처럼'세상 속에 자신의 존재를 퍼뜨리는 것이다. 모궁으로부터 퍼져나온 씨앗들은 이제 세상의 곳곳에서 자신을 소멸시켜 생명을 전이하는'우주적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박제된 몸, 말 꿰맨 곳 터질 때 드러나는 말의 뼈 ● 두 번째 개인전에 내놓은 소의 말(言)들은 이미 그 전신(前身)이 존재했다. 그가 세계에 온전히 드러내지 못한 채 방치한 말(言)은 인간의 몸이다. 그는 처음부터 몸을 부정한다. 육신의 가죽에 휘둘러쳐 있는 몸의 내부를 부정한다. 나는 여기에서부터 그의 작품을 읽기 시작한다. 그것들은 이미 작가가 방치한 모습 그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공개되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위험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실체부정」은 건장한 육체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그러나 머리와 팔과 발목은 잘려져 나가고 없다. 토르소를 가장하기에는 그 현신성이 너무나 강렬해 일부러 제거되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뿐만 아니라 자세히 육체를 직시하면 그것은 몸이 아니다. 양감과 해부학적 인체의 근육들이 튼실하게 표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껍질임을 확인하게 된다. 잘려나간 흔적들의 부분은 육체의 형상성 즉 골격의 선들이 쫙 펴져서 잔혹한 느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인피(人皮) 재단사 버팔로빌이 떠오를 정도이다. 그러나 그는 인피를 벗겨 잔혹성을 드러내고자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다. 그가 목적하는 바는 그 내부, 몸의 내부, 욕망의 본질로서의 그 내부를 부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내부에의 부정은 어디에서 연유하고 있는 것일까? 그의 또 다른 작품들 「동시대」연작, 「증명」연작, 「마지막 보루」, 「잉태」, 「처녀」, 「가면」 등과 같은 작품들이 실마리를 제공한다. ● 「동시대」연작은 인간의 몸이란 발딛고 살아가는 바로 지금 여기의 현실임을 말하고 있다. 두 개의 하반신을 오버랩 시킨 작품은 전면에서 육체의 강인한 면을 강조하고 있으나 측면과 후면으로 돌려보면, 육체는 이미 구겨진 옷이나 다름없는 강한 허무성을 내 보인다. 오버랩의 동세는 한 사람의 걸음 속으로 다른 이가 끼어드는 모습이다. 달리보면, 앞서가던 이의 발을 걸어 넘어뜨리려는 속셈을 보여준다. 결국 핏발선 육체의 껍질은 몸의 내부로부터 솟아오른 부정과 부패와 불신의 동세를 취하고 있음이다. 그리고 이 껍질들은 서로 엉겨붙어서 떨어지지 않는다. 벗어남은 육신의 찢김을 각오해야만 한다. 다른 하나의 「동시대」는 훨씬 자유롭다.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육체의 껍질한 부분만 남아있는 이 작품은 사회로부터 현실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결국 이렇게 갈기갈기 찢겨져서 살점만 남는다는 것을 암시한다.
「증명」연작은 구체적인 실증과 실체를 부정한다. 그것은 나(我) 스스로에 대해 증언하기를 거부하는 것이며, 남자이기를 혹은 여자이기를 부정하거나 철저하게 긍정하고자 하는 것이며, 육체이기를 혹은 몸이기를 강렬히 원하거나 잊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증명'은 그의 작품이 취하고 있는 것처럼 안과 속이, 긍정과 부정의 긴장이 갈등하는 빈틈으로부터 시작된다. 모자를 쓰고 있는 투명 인간은 과연 그가'인간'이라는 실체를 긍정하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모자를 지탱하고 있는 얼굴 윤곽의 아웃라인은 사라진 실체의 잔상효과만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잔상의 실체는 위태하게 기울어진 여성(유방과 부드러운 허리곡선을 보라)의 몸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 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간 실체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다. 이 빈 육신은 아무런 말이 없다. 세 번째'증명'작품은 몸의 긍/부정의 이분화된 갈등구조마저 퇴색된다. 외면은 육체의 모습이나 내면의 표피는 겉옷(조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이 옷을 벗어야한단 말인가? 그래, 벗자! 벗자! 옷을 벗자! ●「마지막 보루」는 육신의 껍질을 모두 벗었지만, 마지막 남은 이성의 부끄러움만은 어찌할 바 모르는 인간의 양면성을 질타한다. 그것은 아담과 이브가 에덴으로부터 얻은 원죄의 증언이다. 그들이 그들의 양심을 팔아 얻은 것은 벌거벗음을 인식한 것 외에는 없다. 왜 그토록 벌거벗음을 감추려했던 것일까? 작가는「잉태」와「처녀」에서 원죄로부터의 속죄를 희망한다. 처녀성이야말로 구원의 메시아를 잉태하는 씨앗이 아니겠는가. ● 전신(前信)의 작품들이 전신(全身)을 희구하는 참된 자아로의 천착이었다면, 이제 그가 처음 공개하는 첫 개인전의 작품들은 그러한 자아가 세상으로 입고 나온'몸'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몸이 드러내는 그로테스크한 형상성에 당황할 필요는 없다. 그의 몸은 그의 언어/말이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제 그의 몸들은 편재된 언어/말이다. 박제화된 몸의 형식을 따를 뿐 소리를 내는 것은 하나라는 얘기다. 이 오래된 소가죽 북들은 「박제된 폭력」, 「박제된 권력」, 「짓밟히다」 , 「외치다」에서처럼 정치적·사회적 굴절을 고발하고 있거나(혹은 그러면서 그러한 폭력과 권력에 저항하는 모습들, 외치거나 위협하거나 비아냥거리는...), 「자살충동」, 「박제된 세일즈맨」,「구미호」에서처럼 제도권적 사회성을 갖추지 못하고 살아가는 대다수 민중들의 살아가기 방식을 살피거나(혹은 그러면서, 있는 자들의 권태로움과 노동의 회피, 민중의 피를 쏘옥 빨아먹는 다거나. . . )하는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작품들은 독특한 중의성을 함축하면서 삶의 모순을 극대화시킨 장본인들을 내재시킨다. 작가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설거지」같은 경우 식사 후의 치아 속이 물질을 제거하는 장면이지만 그것은 제도권과 사회의 부조리를 긁어내는 행위임과 동시에 독재 권력을 휘둘렀던 과거 부패정권의'큰 어른'을 뿌리채 뽑아 내버리는 정화행위를 상징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짓밟히다」는, 현실의 삶에서 무수히 짓밟힘을 당하는 우리 스스로의 자화상이지만, 이면의 의미는 그러한 자화상을 밟아봄으로써 스스로의 굴레를 깨버리는 페이소스를 함축하고 있다.
노자(老子)는 열한번째 화두를 던진다. "서른개의 바퀴살이 모여 한 개의 바퀴통을 만들지만 / 수레를 움직이는 것은 가운데의 빈구멍. / 흙을 이겨 그릇을 만들지만 / 그릇을 쓸모 있게 하는 것은 그릇 속의 빈곳. / 문이나 창을 내어 방을 만들지만 / 방을 쓸모 있게 하는 것은 그안의 텅빈 공간. / 그러므로 있음의 이로움은 없음의 쓰임에 있는 것."감산은 풀어 말하기를 사람이 형태가 있는 까닭에 누구나 사람이 쓸모있는 줄은 알지만 형상이 없는 허령(虛靈)한 마음에 의지해 사람으로써 활동하게 될 줄은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형의 존재에 쓰임새가 있지만 실제로는 무형의 것에 의지하여 쓸모가 있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결국 노자가 말하는 것은 무존재(無-存在, nonbeing)에서 쓰임(有-存在, being) 의 존재로 나아가는 것은 물질로서의 몸이 아니라 텅빈, 다시말해 비어있음으로 가득찬 몸이며, 그러한 몸이야말로 참된 쓸모가 있음을 역설하는 것이다. 송필의 작품은 자아의 껍질 벗기로 시작해 빈몸의 참된 공허를 얻는 노정에 서있다. 뿐만 아니라 작가는 노정의 한 지점에서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을 향해 뼈 있는 말들을 풀어 는다.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가운데의 빈구멍, 존재의 빈곳, 없음의 쓰임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김종길
Vol.20030310a | 송필展 / SONGFEEL / 松泌 / sculpture.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