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작가 김일용_박성태_박영근_황혜선 정인엽_이정임_홍장오_윤종석
갤러리 상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9번지 Tel. 02_730_0030
미술에 있어서 색채가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하다. 20세기 인상파 미술은 색과 선의 싸움에서 색의 승리로 귀결되었다고 극단적으로 평가하는 부류가 있을 정도로 색이 차지하는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 강조만큼 색을 배제한 상태의 미술 작품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난감해 질 것이다. 흔히 이야기되는 다양한 색상, 즉 무지개 빛 컬러를 제거한 흰색과 검정을 가지고 누릴 수 있는 미술의 모습은 무엇일까? 우리는 이미 수 십 년 전 바랜 벽지 위의 흑백사진에서 또한 흑백 영화에서, 또 현장감 있는 보도사진으로 그 흑백의 정서를 느껴왔다. 거친 목판화에서, 그리고 더 오래 되기에는 흰 화선지와 검은 먹의 수묵화에서... ● 그렇게 독특한 정서를 가진 흑과 백은 컬러 이상의 색채로서 미술에서 다루어져 왔고 따라서 단순히 색채라기 보다는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닌 code로 다루어질 수 있겠다. 그러한 흑과 백의 가능성을 익숙한 흑백사진이나 수묵, 소묘로서가 아닌 더 풍부한 은유가 가능한 현대미술가의 독백을 빌어 가늠해보고자 한다. ● 흑과 백. 너무나 단순하면서도 너무나 강렬한 색채. 아니, 인간이기에 단순한 색채에 그 무수한 의미와 정감과 철학을 대입시키는 지도 모른다. 예술 자체가 그런 행위의 속성을 내포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단순한 흑과 백을 타이틀로 내세운 전시이지만 검정과 흰색을 하나의 소재로서만 다루게 되는 얄팍함을 피하고자 사진, 수묵, 소묘 등의 장르는 제외하기로 하였다. ● 따라서, 장르는 서양화, 조소, 설치 등으로 선정되었고 무엇보다 작품 표면의 색채보다는 총체적으로 느껴지는 감성에서 흑백의 이미지가 유추될 수 있는 것을 선정하였다. 다양한 재료에 다양한 형상과 뉘앙스임에도 흑백의 이미지로서 떠오를 수 있는 감성, 감각, 정신성이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고요한 독백의 울림이 되길 기대한다. ■ 신혜영
김일용 ● 김일용의 작품은 사람의 몸을 직접 석고로 떠낸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유심히 보면 인체의 세밀한 부분인 체모와 상처 등 보통의 조소작품에서는 있을 수 없는 것들이 발견된다. 그러나 그의 캐스팅 작업에 있어 창작이 아니라는 부분, 실제를 본 떴다는 사실이 그의 작품을 진부하게 하지는 않는다. 어떤 모델을 선택하느냐부터 시작하여 신체의 어느 부분을 어떻게, 얼마큼 캐스팅 할 것인가 등 단순치 않은 작가만의 감각이 작품에 녹아있다. 오히려 그의 조형적 감각으로 인해 본떠진 신체가 더욱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 흑백의 시각물로 상징되는 보도 사진과 다큐멘터리는 실제 상황을 가감 없이 드러낸 시각물로서 보는이에게 현실의 리얼리티를 선사한다. 물론 보도사진과 다큐멘터리도 그것이 쓰여진 맥락과 첨삭에 따라 무한한 연출이 가능해진다. 흑백이 가진 생생한 현장감 또는 연출되지 않은 거친 느낌의 정서는 실제 연출가능성의 유무를 떠나 현실의 맨살을 대면하는 듯한 서늘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요소가 김일용의 인체에 있다. 더우기 그의 모델은 실제 그 주변의 이웃이고 평범한 사람들이다. 작가는 모델 섭외에 애를 먹으면서도 이 부분을 고수한다. 이는 김일용의 작품이 단순한 감각적 유희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현실을 채집하고 그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흑백의 담백하면서도 날카로운 정서와 맞닿는 것이기도 하다.
박영근 ● 작가 박영근 만큼 오랫동안 흑과 백으로만 작업한 작가도 드물 것이다. 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그의 흑백 그림은 처음에는 경제적 이유로 인한 것이었다. 캔버스천이 아닌, 천막용으로 쓰이는 거친 천 위에 검정과 흰색 페인트로만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다분히 현실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지어진 흑백 그림은 이후 긴 시간 동안 박영근 작품의 기조가 된다. 유화작업과 판화작업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된 시점에도 이 흑백의 하모니는 계속되게 된다. 매우 단순한 색상인 검정과 흰색은 그의 작품에서 온갖 정서를 불러일으키게 되는데 공간에 휘감기듯 묘사된 대상(접시, 물고기 등)은 대상의 종류와 관계없이 어떤 심연 또는 영원성을 상징하는 것 같다. 찰나를 포착한 듯한 빠른 움직임의 드릴 드로잉(공업용 드릴을 이용한 스크래치 기법)은 아이러니하게도 긴 여운을 남기며 시간을 영원으로 이끌고 있다. 강렬한 흑과 백의 감각적 대비, 설명적이지 않으면서도 깊은 사색의 공간으로 이끄는 점은 박영근 흑백 회화가 가진 묘미이다.
윤종석 ● 흰 캔버스 위에 흰 점을 찍고, 검은 캔버스 위에 흰 점을 찍고... 그것은 대나무가 되고 활짝 핀 꽃이 되기도 한다. 작품을 촬영한 사진으로는 느낄 수 없는 그의 작품이 지닌 화려함은 흑백의 단순한 색상만으로 감각적 아름다움의 극대치까지 발현하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 힘을 쓰지 않고 한 점 한 점 그러나 오랜 시간 찍어나간 그림은 단순한 색상으로 색다른 감각을 맛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작품으로 제시되는 동양화 사군자화의 형식적 아름다움 또한 새롭게 다가온다.
홍장오 ● 희뿌옇고 가벼운 비닐 주머니의 색감은 흰색이라고도, 회색이라고도 무색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어떤 서늘함을 옮겨온다. 백색의 순진무구한 이미지를 물질로 보여주고자 한 작품으로 해석될 수 있으리라. 색 이전의 어떤 것으로, 착색되지 않은 근원으로 돌아가서 여리고 맑은 감성을 일깨우고자 하는 작가의 섬세함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풀이된다. 아주 가볍고 하찮은 물질인 얇은 비닐의 단순함과 연약함이 두터운 껍질에 휩싸인 우리의 일상을 촉촉히 적셔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는 흰색의 이미지를 그렇게 순수함의 극대치로 파악하려고 한다. 채색되지 않은 물질 자체를 제시하면서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큰소리로 외치지도 않는 그런 맑음과 예민한 감성이다.
박성태 ● 박성태는 작업에 대한 「작가노트」를 익명인의 주민등록번호의 반복으로 제시했다. 다양한 재료로 작업해 온 박성태의 작품에서 늘 견지되어온 것은 생(生)과 사(死)에 대한 상념이다. 고통스러운 인체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또는 공간에 널어져 어떤 물질처럼 취급된 인체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생(生)을 당연시 여기는 우리의 일상 속에 사(死)를 일깨운다. 그가 제시하는 인간의 고통과 죽음은 단순한 순리이기보다는 인간의 흉포함으로 빚어진 결과물이다. 박성태가 주시하는 생과 사는 그러한 면에서 더 많은 생각을 하도록 이끈다. 인생의 극단인 삶과 죽음을 명상하지만 현실에서 동떨어진 공허한 상념이 아닌 좀더 사회와 인간 관계에 대한 책임을 고민하게 하는 그러한 생과 사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 컬러풀한 삶의 다양한 국면이 아닌 삶과 죽음이라는 양극단을 오고가는 흑백의 사고(思考)지만 흑백의 진지함을 담보하려는 무게 있는 상념으로 다가온다.
황혜선 ● 흰 종이 위에 검은 실로 박음질하여 모양을 그린 듯한 그림. 무엇이 담겨져 있을지 모르는 상자들, 테이블 위의 옷솔, 무언가 흘러버린 뉘어진 컵, 그리고 눈,코,입을 포함한 얼굴의 반이 가려진 두상. 아무 것도 아닌 평범한 이미지를 대충 그려낸 듯한 이 그림은 작가의 말에 의하면 회화가 아니라 조각이다. 지우개가루로 만든 부조작품이라고나 할까? 작가는 자신의 기억 속에 아련한 어떤 장면, 상징적이거나 막연히 상으로 맺혀져 있는 어떤 광경을 연필로 담담히 그린다. 그리고 나서 망각을 위해 그림을 지우개로 지워낸다. 나이가 듦에 따라 기억보다는 망각이 더 어렵고 더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는 작가는 자신이 지워버렸다고 생각한 기억이 어떤 형태로든지 흔적을 남긴 것을 발견했다고 한다. 마치 연필로 형성된 과거를 현재에 지우개 가루의 불완전한 형태로 떠올리듯이. 아련한 유년시절과 희노애락을 동반했던 과거는 시간이 지나 그 현란했던 감성은 온데간데없이 빛 바랜 흑백사진처럼 마음속에 맺혀지기 마련이다. 흑백사진은 어쩌면 그 시절에는 느끼지 못한 또 다른 감성과 통찰을 우리에게 던져 주는 지도 모른다. 과거에 대한 매개가 되면서도 또 다른 향수와 애틋함을 불러일으키는 기억은 지우개가루 드로잉이 원본 연필화와 비슷하지만 다른 것처럼, 우리의 의식 안에 또 다른 현실을 만들어 가는 다른 창으로 내다본 삶이다. 황혜선의 작업은 흑백컬러가 가지고 있는 그 기억의 속성과 감성을 논리적이면서도 상상치 못한 위트로 다루는 것이다.
이정임 ● 무뚝한 나무의자, 잡동사니 유년의 보물을 간직한 듯한 나무상자. 옅은 갈색톤으로 정성들여 그려진 작은 사물들은 향수와 추억을 떠올리기에 모자람이 없다. 결코 흑백컬러가 아님에도 마음 깊숙이 숨겨져 있는 향수를 끄집어내는 그의 작품은 흑백사진과 무성영화의 담백한 정감으로 친숙하게 연결된다. 단순한 모양의 사물을 그저 빈 공간에 배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아련하고 내밀한 감성을 호소하는 이정임의 유화는 회화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독특한 맛을 지녔다. 누가 이 작품 앞에서 미끈하고 세련된 디지털의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겠는가. 21세기에 지직거리는 아날로그의 정서, 빗줄기 내리는 30년 전 영화관의 촌스러움, 이러한 것들이 이제 그리움마저 일으키는 것은 일상이 좀더 단순해지길, 그리고 좀더 소박해지길 바라는 모두의 가슴속에 소망 때문일 것이다. 흑백의 단아함이, 기교부리지 않음이 진정 소중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정인엽 ● 나비 설치작가로 알려진 정인엽의 작품의 정서는 그가 다루는 오브제의 특성들에서 느껴진다. 거울, 흰 실과 바늘, 아기인형.........그리고 나비. 그의 바늘은, 아기인형의 손끝은 둥글게 둥글게 원을 그린다. '흔들기', '원그리기' 등의 작품제목과 그의 작가노트 중 '작은 움직임들 그 속에서 내가 살아 있음을 느끼거나 나를 인지한다....'라는 대목은 그가 사물의 작은 움직임들로부터 본질적인 생명을 확인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부친과 모친의 죽음이 적지 않게 작품의 정서를 이루는 요소가 되고 그것은 단순한 애도나 슬픔을 넘어, 생과 사가 만나고 순환되는 생명에 대한 직관으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의 나비가 그렇고 돌고 도는 바늘 끝이 그렇다. 생의 본질을 직시하고 온몸으로 느끼려는 작가의 몸부림은 작은 움직임들 속에서조차 근원을 파악하려는 절대, 흑백이라는 색으로 추구되는 초월로서 파악된다. 흑백이라는 색이 삶을 쪼개고 쪼개어 나아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근원을 모색하는 예술가의 이상향으로 은유 될 수 있다면, 정인엽이 몰입하는 그 세계의 끝단과 흑백의 이미지를 중첩시킬 수 있을 것이다. ■
Vol.20030309a | 흑백의 모놀로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