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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 썽리(Seung Lee), 한국에서의 이름은 이승휘였지만 미국에서는 마지막 한 글자를 지워 이승으로 지었는데 사람들은 "썽-리" 라고 부른다. 그는 현재 뉴욕에 있는 롱아일랜드 대학의 미술과 교수이다. 그의 인생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다른 이민자들과 같이 매우 드라마틱하다.
서울 근교의 소도시(경기도 가평)에서 6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6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 고달픈 인생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병들어 누워있고 형제들은 모두 학업을 중단 한 채 뿔뿔이 흩어져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15살 때 그의 가족은 미군부대에 근무하던 인연으로 먼저 미국에 가 있던 이모부의 초청으로 모두 이민을 가게 되었다. 미국은 그에게 기회의 땅이었다. 그는 희망을 보았고 꿈을 이루어 갈 수 있었다. 한국에 있었으면 다니지 못했을 학교를 오히려 미국에 갔기 때문에 다닐 수 있었다. 수업료를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났던 한국에서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모든 것이 무료였으며 가난하다면 먹을 것까지 주었다. 영어도 못 할 뿐더러 문화적인 이질감도 심하였으나 그런 가운데 오히려 그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친구들을 사귀었고 덕분에 영어의 장벽을 빠르게 넘어 설 수 있었다. 수학, 체육, 미술과목에서는 아주 우수한 학생이었다. 특히 그의 미술적 재능을 높이 보던 미술 교사의 추천으로 메릴랜드대학의 미술과에 장학생으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대학 4학년 때에는 장학금으로 이태리에 일년 간 유학까지 다녀올 수 있었다. 유학을 통해 그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는 이 일년간의 유학기간을 인생의 중요한 전기 중의 하나로 생각하고 있다. 자신을 뒤돌아보고 분석해 보았으며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되었다. 유학에서 돌아 온 후 뉴욕의 부룩클린에 있는 프랫 인스티튜드의 MFA과정에 진학하여 미술공부를 계속하였다. ● 그는 이 학교에서 평생의 반려가 될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백인 여성인 다운(Dawn)을 만나게 된다. 뉴욕의 상징인 옐로우 캡 택시운전을 하며 학교를 다니던 그는 어려운 고학생이었고 다운은 콜로라도에서 온 마음씨 착한 동급생이었다. 어느 날 화재로 살던 집이 다 타버려 갈 곳이 없어진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재워 주었고 이를 계기로 결혼하였으며 지금은 두 딸 "하나"와 "로즈"를 낳아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 당시 학교에는 강익중, 전수천, 신현중, 박이소 등의 유학생이 있었으며 한국에 연고가 없는 그에게는 몇 안 되는 한국에 있는 지인들이다. 결혼 후 둘째 딸을 낳고 부터 아이들을 좀더 좋은 환경에서 키우기 위해 롱아일랜드로 이주하였다. 그곳은 그에게 어린시절의 기억을 되살려 주는 고향과 같았다. 고향을 사랑하듯 다양한 활동으로 지역사회에 기여하였다. 셍 조셉 칼리지와 롱아일랜드대학 그리고 다울링 칼리지 등에서 드로잉과 페인팅을 가르쳤으며 옴니 갤러리를 비롯한 여러 갤러리에 전시를 기획하였고 또한 아이슬립미술관의 객원 작가로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또한 자신의 두 딸이 포함된 유소녀 축구단의 코치를 하면서 자신도 아마추어 축구팀의 선수로 각종 대회에서 많은 트로피를 땄다. 그는 매사에 적극적이며 긍정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호감을 산다. 몇 년 전 롱아일랜드 대학의 전임교수 채용에서 백 명이 넘는 지원자들을 물리치고 임용이 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좋은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
예술 ● 이번 전시는 1989년 서울 원서동 공간미술관의 초대로 개인전을 한 이후 두 번째로 갖는 한국에서의 전시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새롭게 제작한 작품을 보여줄 예정이다. ● "지금까지 그린 과거의 그림들을 모조리 가위로 자른다. 이렇게 절단된 그림조각들을 투명한 레진(resin)으로 덮어 덩어리로 만든다. 그 덩어리를 보며 다시 드로잉 한다." 자신의 과거 그림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그것을 다른 형태로 보존하며 그 형태를 다시 그리는 행위는 자신에 대한 부정과 긍정 그리고 집착과 갈등의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의 결과가 파괴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그림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 그의 긍정적 세계관이며 삶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인 것이다. 그가 의식을 했건 안 했건 간에 이런 사고는 불교에서의 윤회 사상과 맥락이 통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작품을 하는 그의 자세는 마치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대면하면서 자신의 내면을 완성해 가는 동양종교의 수도사와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한편, 옛날에 몹쓸 병에 걸리면 자신의 배설물을 다시 먹는 민간요법이 있었다는데 그런 상황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 최근 그는 자신의 집 뒤뜰에 작업실을 다시 지었다. 그러면서 창고에 산처럼 쌓여있던 작품들을 정리해야 했을 것이다. 그는 과거의 많은 화가들처럼 그림들을 모조리 불에 태워버리기 보다는 이렇게 박제를 만들어 버리는 길을 택한 것 같다. 그 덩어리들은 일종의 타임캡슐이며 현대의 화석이며 또한 박제와 같다. 개인의 미술적 역사와 흔적들이 농축되어있는 덩어리다. 이 덩어리를 보며 다시 드로잉 하는 것은 과거의 역사와 흔적을 현재의 행위를 통해 되살려 내는 일이다. 이런 행위는 과거에 대한 미련일 수도 있고 애도의 뜻일 수도 있다. 또한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그의 작업에 일관되게 흐르는 맥락이라 할 수 있는 버려진 물건들의 재활용 정신과 통하는 것이다.
그는 길가에서 주운 물건들로 작업을 해 왔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길 위에서 보낸 적이 있는 그는 또한 뉴욕에서도 택시 운전사로 6년을 길에서 보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길가에 버려진 물건들을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그리고 한국에서 건너와 뉴욕의 젊은 한국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정창승의 정크아트에서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길가에 버려진 나무토막, 접시, 나무뿌리, 부서진 TV, VCR 등, 버려진 물건들을 주어다 작품에 사용한다. 버려진 물건들의 역사를 사랑하며 그것들을 자신의 의지로 변형시켜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 그는 또한 환경보호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사회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다. 지역사회에서 작품 활동은 물론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하여 기여하고 있다. 그는 버려진 것들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가족은 물론 이웃과 지역사회 그리고 그 지역의 자연을 사랑하는 것이다. 미술은 그가 자기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주변 환경을 사랑하는 그 만의 방법인 것이다. ■ 임재광
Vol.20030307b | 이승 개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