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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306_목요일_05: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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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의 抒情_꽃이 진자리 별하나 빛나다. ● 기침 솟구쳐 올라 격렬했던 뿌리 끝마다 / 통증 같은 별들 박혀 있네요._詩 「오래된 기침」 중 일부 ● Ⅰ. 작가 백미혜가 근 10여년 동안 작업해오던 「꽃피는 시간」을 정리하고, 새로운 작업 「별의 집에서」를 시작했다. 연작의 제목이 「꽃이 별이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자연스레 연결되면서 언어와 이미지 사이의 묘한 진동을 느끼게 된다. 이 진동은 작가 자신의 이중성(시인/화가)과 새로운 작품으로의 이동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꽃 피는 시간에서 별의 집으로 즉 시간에서 공간으로(시간성/공간성), 땅에서 하늘로(땅/하늘), 낮시간에서 밤시간으로(낮/밤), 노동의 시간에서 안식의 시간으로(노동/휴식), 생성의 시간에서 윤회의 시간으로(지구/우주), 그리고 언어와 이미지. 밤하늘에 「저 별」이 빛나는 것은 「그 곳」에 「그 꽃」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 어린왕자의 말이 백미혜 작가의 작품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그 별이 빛나는 것은 그냥 꽃의 존재만은 아니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그 빛의 발원은 어린왕자에 대한 꽃의 눈물과 그리움. 작가의 열망은 꽃의 눈물과 그리움이 되어 순도높은 서정성으로 발하는 것 같다. 「꽃이 별이 되었다」라는 문장으로 자연스레 넘어가는 것이나, 작품의 이동에서 어린왕자가 자연스레 적용되는 것처럼, 백미혜 작가의 작품에서 문학적인 연관성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작가 자신이 시인으로, 화가로 이중의 고뇌를 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서로 다른 매체라는 의미에서 문자와 이미지 사이의 이중고뇌이기도 하고, 이 이중성은 한 매체(회화 혹은 詩)에서 바라보자면 일종의 불순함인데, 양편의 불순함으로부터 오는 고뇌 또한 이중적인 셈이다.
「별의 집에서」나타난 보라색의 우울과 우수는 오랜시간 불순함의 고뇌로부터 정화된 투명망같다. 작가 자신의 말처럼 「오래된 기침」이 아닐 수 없다. 이 기침의 바이러스는 이중의 고뇌일 터이고 고뇌는 폐부 깊숙이 박혀버린 것 같다. 이쯤되면 작가는 솔직해도 좋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이중의 고뇌가 작품의 서정성을 더욱 투명하고 깊게 해줄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서정성」이란 고독한 존재의 근본적인 이야기이고, 이 시대의 「서정성」이란 회화의 복구에 대한 하나의 대안일 수 있다.
Ⅱ. 작가 백미혜의 주특기는 번짐과 운필 두 가지 이다. 화면은 양식상 타시즘 1)에 연결되어 있다. 모래로 구축된 화면에 필선을 던져놓고 그 운필의 세력을 견제하면서 색채를 부어놓는다. 미리 구축된 화면 속으로 스미는 색채의 번짐은 화선지에 번지는 먹처럼 유연하다; 급하지 않게, 하지만 끝까지. 색들의 긴장과 이완이나 그 행보 속에 드러나는 화면의 질감, 보일 듯 말 듯 지나가는 측광안료(형광성 안료)의 붓질자국 등은 모두 회화 언어들의 자율적인 화음을 이룩해낸다. 더군다나 사각 화면에서 둥근 화면으로 바탕을 바꾼 때문에 회화 언어들이 자유롭게 연장되면서 올오버의 효과가 극대화된다.
그런데, 백미혜의 이번 작업은 회화의 평면에 모아지는 지각적인 사실보다 작품구조에서 생성되는 「서정성」에 주목해야 한다. 모래로 구축된 거친 화면 속으로 번져가는 색채의 행방이나 운필을 누그러뜨리는 색채의 유연함등 번지고 섞이고 쌓이는 그 「회화의 자율성」도 중요하지만 낮과 밤/밝음과 어둠을 지나며 건져올린 보랏빛 의상에 묻어나는 「서정성」이 더욱 중요하다. 측광안료(형광성 안료)를 사용하는 「별의 집에서」는 하루의 낮과 밤/ 밝음과 어둠이 교차한다. 보랏빛이 번져가는 화면은 군청이 깔리는 어둠이 오면, 어둠속으로 넘어가고 그 자리에 또 다른 별빛으로 태어난다. 낮과 밤/밝음과 어둠이라는 이중구조는 밝음이 다할 때까지, 또 어둠이 다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볼 수 있기에 「별의 집에서」의 서정성은 작품 구조로부터 생성되는 것이다. 보랏빛 성단을 타고 흐르는 기다림 속에는 고양의 느낌과 함께 투명한 서정성이 흘러간다. 이것이 백미혜 작업 「서정추상」의 서사이다.
우리가 서사를 그리워하는 것은 보다 근본적이다. 서사를 그리워하는 것은, 인간의 본래적 앙스트(Angst/불안)에서 비롯되는 되는 것이 아닌가. 서사를 찾으려는 마음의 의지(a Help)가 바로 우리 신화의 근원이기도 하고 예술의 근원이기도 한 것을 보면, 서사성 및 서정성은 우리 인간의 본래적인 위로가 아닌가 한다. 회화적 서사란 형상이 있는 작업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형상의 유무와 전혀 상관 없는 보다 근원적인 이야기이다. 회화의 서사란 평면에 구축되어야 하는 무엇 중의 하나이다. 회화적 서사의 복구가 아쉬운 이때, 진정한 서정성의 회복은 회화의 다양성과 함께 복구의 방향을 제시하는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영혼이 거주한다는 「별의 집에서」 회화가 가는 길을 생각하며. ■ 남인숙
1) 타시즘(Tashism)은 수묵화의 서체나 번지는 효과를 강조하는 추상화. 「얼룩」이라는「타쉬」에서 비롯된 말로, 얼룩과 순간적인 붓자국으로 행위를 객관화시키고 서정적 성격의 표현으로 유기적 공간 개념을 탄생시키는 추상이다. 동양의 서체 영향이 크며 1960년대 이후 활발히 전개되었다.
Vol.20030302a | 백미혜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