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other side

김현민 사진展   2003_0305 ▶ 2003_0318

김현민_송도 실탄 사격장_컬러인화_100×100cm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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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305_수요일_05:00pm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B1 Tel. 02_735_4805

Photographic decalcomania 포토그래픽 데칼코마니 ● Tyger! Tyger! burning bright / In the forests of the night, / What immortal hand or eye / Could frame thy fearful symmetry_William Blake, The Tyger 중에서. ● 십 년도 훨씬 더 전, 영문학도 시절 배운 시의 한 구절이다. 문학계에선 영국 낭만주의 시인으로, 미술계에선 판화가로 각각 알려진 윌리엄 블레이크의 작품이다. 원체 운문에는 관심도 소질도 없었던 터라 영미시 개론 시간은 내겐 이만저만 고역이 아니었다. 운율에 맞춰서 문장을 낭송해야만 영어 원문의 뉘앙스와 운치를 모두 살려낼 수 있었는데, 나는 동기생들에 비해 그걸 잘 해내지 못해 애를 먹은 기억이 여태 선명하다. 이 시 역시 운율이 구성의 중요한 요소이다. 해서 한역해놓은 '호랑이'는 무늬없는 호랑이나 매한가지가 된다. 유전병이나 멜라닌 색소부족에 의한, 변종 무늬없는 호랑이에 대한 외신보도를 접할 적마다 우리는 그것을 이색뉴스로 취급할 뿐, 어쩐지 민무늬 호랑이를 '호랑이'로서 대우해주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블레이크 역시 이 시에서 호랑이를 규정짓는 좌우대칭 무늬의 힘에 주목하고 있다. 알록달록한 호랑무늬는 그 자체로서도 강한 시각적 인상을 주지만, 그것이 좌우로 대칭되어 호랑이의 몸통에 감겨졌을 때, 보는 이는 중후함과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김현민_운전면허 안전 관리공단_컬러인화_100×100cm_2003

정작 좌우대칭(bilateral symmetry)은 우리 주위에서 수시로 목격되는 시각적 형태이다. 나비, 꽃잎, 딱정벌레의 몸통은 물론이거니와 인공물의 대부분도 좌우대칭 구조를 취하고 있다. 특히 일개 사물이 아니라, 거대한 구조물로서의 건축은 좌우대칭을 실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용례가 되어줄 것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전 시대와 전 문화권을 걸쳐 건축에서 나타나는 대칭 설계는 미적인 용도 뿐 아니라 실용적인 측면에서도 피하기 힘든 유혹이라는 데에 있을 것이다. 좌우대칭의 높은 인기 비결은 어쩌면 다름아닌 우리의 신체가 바로 대칭을 이루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가장 익숙한 형태라는 말이다. 그래서인지 비유이긴 하나, 신이 자신의 이미지를 빌어 인간을 창조했다는 구약의 '신화'에 빗대 건축가들은 인간 신체의 대칭을 통해 건축물을 구성했다는 해석도 존재하고 있다.

김현민_문학 월드컵 경기장_컬러인화_100×100cm_2003

한편 미술에서의 좌우대칭은 어떠한가? 고대 인물조각상에서야 어쩔 도리없이 대칭이 실현되게 마련이니(인물 자체가 좌우대칭이므로) 그것은 차치하더라도, 회화에서 드러나는 대칭 구도의 역사 또한 퍽 유서 깊다. 그 계보를 이 지면에서 꼬치꼬치 따져야할 까닭은 없으니 화가들이 공간의 정확성에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했던 르네상스만을 두고 보자. 이 시기는 알려진대로 엄정한 고전주의와 과학의 초동적 발달의 혜택을 입었다. 그러니 수학에 입각한 공간 구성에 자연히 주력할 수밖에 없었을 지도 모르겠다. 페루지노의 작품 「The delivery of the keys」는 원근법에 대한 당대의 관심도를 압축해놓은 듯한 작품이다. 회당인 듯한 돔(dome)형 구조물을 중심으로 그리드(grid)로 구성된 바닥면의 선들이 가지런히 방사되어 이등변 삼각형이 구성된다. 그 선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원근감을 통해 우리는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공간을 지각해낸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그림 속에선 비록 흐트러지게 배열된 군상 묘사이지만, 군상의 배치 또한 '불완전하게 나마'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다. 베드로에게 예수가 건네주는 열쇠를 중심 주축으로 해서 좌우로 포개놓으면 인물들의 무리도 엇비슷하게 겹쳐지는 구도다. 그 다음으로 살펴볼 가치가 있는 사례는 한참 이후에 나타났다. 르네상스와는 전혀 다른 시도의 결과물이지만, 초현실주의자들의 무의식 실험은 데칼코마니(d calcomanie)라는 단순하지만 강렬한 결과물을 토해내는 이미지 방법론을 착안해냈다. 데칼코마니는 알다시피 초등학교 미술교과만 이수한 이라면 누구나 실습해보았을 법한 초보적인 이미지 작법이다. 하지만 이 실험의 취지는 좀 '거창한' 결과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들은 물감을 묻힌 면을 다른 면에 포개고 다시 펼쳤을 때 나타나는 예기치 못한 무정형 속에서 얼굴, 나비, 동물과 같은 형태를 인위적으로 읽어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데칼코마니가 가져다주는 대칭 효과 역시 보는 이에게 묘한 안도감을 가져다주는 것이 사실이다. 즉 데칼코마니에서는, 형식적 효과가 내용적 가치보다 관자들에게 더 큰 호소력을 갖고있다는 얘기이다.

김현민_퐁퐁 탁구장_컬러인화_100×100cm_2003

사진에서 데칼코마니는 어떻게 실현될까? 그렇게 난처한 질문부터 시작할 필요는 없을테고, 우선 김현민이 내놓은 작업들이 '불완전하나마' 좌우대칭이라는 골조 위에 하나같이 올려져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해보자. 김현민이 본래 작업으로 옮겨보고 싶었던 것은 이미지 재현을 공부하는 초년생들이 한번쯤 정면충돌해보고 싶어하는, '시선'이나 '원근법'의 문제였다고 한다. 물론 이번 출품작에는 시선, 원근법 모두가 무난한 수준에서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작품의 비중을 좌우하는 주축이 되어주진 못한다. 특히 원근법이라는 문제의식에 관해서라면, 사진으로 재현된 모든 피사체가 철두철미한 원근법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 아니던가? 사진기 발명전에는 남다른 관찰력을 갖춘 눈과 기계적 재현력을 지닌 손, 그리고 수학적 두뇌의 주인공들만이 원근감을 화면 위로 옮겨올 수 있었다. 하지만, 알려진대로 사진기의 렌즈는 사람의 눈과 흡사한 구조를 모방하고 있고, 설사 특수 렌즈나 까다로운 광각적 조작을 했다 손 쳐도 사진기가 옮겨와 주는 이미지는 현실 원근감에서 그리 멀어질 수가 없는 운명인 것이다. 한편 김현민 작업에서 보여지는 원근법 구사, 혹은 사진의 구도는 '사진이 존재치 않았던' 초기 르네상스 시대 작품에서 흔히 관찰되는 1점 투시원근법이다. 화면 정중앙에 소실점을 두고 관람자를 향해 방사를 하는 안정된 구도가 그것이다. 이미 회화사에서는 화가들의 원근법 연마를 위해 심심찮게 애용되어 온 구도가 아니던가? 레오나르도의 「The last supper」, 라파엘로의 「The school of Athens」 등이 그러했다. 적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내가 김현민의 작업을 단순한 '대칭미'에 입각하기보다는 포토그래픽 데칼코마니라는 다소 어깨에 힘들어간 이름을 붙인 데에는 데칼코마니가 조형적 대칭미 이외에, 우연적 서술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딱히 개연적이고 뒷감당이 되는 작명은 아닐 수도 있겠다.

김현민_고고 노래연습장_컬러인화_100×100cm_2003

그렇다면 김현민 작업에서 대칭의 통일감 이외에 어떤 데칼코마니적 요소들이 건져질 수 있다는 얘기일까? 김현민이 협조를 얻은 장소들은 모두 인천소재의 실내공간들이다. 그리고 촬영을 위해서 특별한 공간 연출을 가하진 않았다고 한다. 대부분 배치된 그대로를 화면에 담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는 대부분의 공간이 대칭적으로 구성되어 나타났다. 관찰자가 어떤 각도에서 공간을 바라보았는가에 따라 그 대칭의 정도가 선명해지긴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좌우대칭의 공간구성은 그가 장소 탐색에 나선 인천이 아니어도 쉽게 관찰될 수 있는, 이른 바 가장 무난한 공간 구성법이라는 얘기이다. 왜냐면 그것의 시각적 안정감과 균형미에 우리의 인지구조가 익숙해져있기 때문일 것이다. 바둑판 모양 그라운드 위에 세워진 탁구대, 표적을 정중앙에 위치시킨 실내사격장 광경, 주례단상이 보이는 결혼식장, 미닫이문을 살짝 열어제낀 일식집 다다미방이 그러하다. 그렇다. 공간 구성에서 대칭은 안정감은 물론이거니와 공간을 좀더 경제적으로 활용토록 도움을 줄지도 모르겠다. 그런 까닭에 우리주위엔 대칭형이 난무한다. 우리의 시각도 대칭형에 익숙해져만 간다. 서두에서 인용한 것처럼 자연물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신체 역시 정수리에서 생식기를 수직축으로 동일하게(정확하지는 않지만) 양분하며 대칭을 이루는 숙명 탓에, 모든 교육과 제도는 '정렬화의 욕망'에 입각해있다. 앞뒤 좌우가 한치의 튀어나옴 없이 정렬시킨 교실 탁자배열, 군대 내무반의 칼잡힌 관물 배치에 이르기까지 좌와 우가 완벽에 가깝게 마주보고 있을 때, 기어이 안도를 내쉰다. 아니 유독 그런 정렬화에 눈먼 부류가 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겠다. '삐꾸'난 걸 모조리 바로잡아갈 때, 세상을 하나로 다스리기는 좀더 용이해질 것이다. 그리고 그런 열망에 부응하듯, 대칭 구도의 평형상태와 균형감에 안주하려는 우리들 시각의 보수성은 더더욱 관성을 얻게된다. 김현민의 작업은 공간 속에 또아리 틀고있는 그런 정렬화의 현장들이 담겨있다. 그렇지만 김현민이 그것을 염두에 두고 뷰파인더를 들여다보지는 않았을 터이다. 그는 원근법과 시선에 주목하고 싶었고, 그것을 뷰파인더를 통해 가장 '무난한 각도'에서 바라보았을 것이다. 바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좌우대칭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사진적 데칼코마니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초현실주의가 데칼코마니를 통해 '의도 이외의 효과'를 얻었듯이 말이다.

김현민_토토로 책대여_컬러인화_100×100cm_2003

또 한가지 데칼코마니와 김현민이 맞닿는 지점은 부분적이나마 대칭의 불완전성이다. 그 어떠한 데칼코마니라도 좌우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한쪽 면에 안료가 더 묻어오르기도 하거니와, 색 번짐에서 차이가 드러나기도 한다. 김현민의 작업 속 사진에는 그 보다 더 두드러진 대칭 균열이 나타난다. 특별한 공간 연출을 하지 않은 탓에 그의 작업에서 보여지는 좌우는 '대칭 마니아(?)'의 안목에는 몹시도 거슬릴 지경이다. 온통 삐꾸들로 가득찼다. 어떤 작업에는 아예 화면의 균형을 완전히 산산조각 낼 태세로, 소형 모니터가 엉뚱하게 좌측 전면에 등장하기도 하고, 전체적 구조만 대칭일 뿐 공간 속의 집기들이 좌우 제각각인 것도 눈에 뜨인다. 따라서 전시장 벽에 걸린 작업들은 하나의 일관된 주제로 작업들을 견인해주기를 기대했던 관객의 바램을 비껴간다. 처음엔 대칭으로 일관할 거라 기대되었던 화면들 속에 간헐적으로 불균형의 변수들이 튀어나오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대칭감을 깨먹는 이 같은 '반칙들'이야말로, 비교적 좌우대칭에 충실한 나머지 작업들과 함께 진열됨으로써, 전시공간 속에 긴장감의 효과를 가져온다. 정반대로 후자 역시 전자의 뒤틀림 때문에 더욱 힘을 받는다. 이런 대칭 파기의 재현은 공공연한 정렬화의 보급에 대한 소박하지만 의미있는 반발이다.

김현민_스윙 스쿼시_컬러인화_100×100cm_2003

반복되는 얘기지만 김현민이 이상과 같은 까다로운 문제의식과 고민을 위해 진지한 시간투자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시선과 원근법을 '연구'하다가 사진적 데칼코마니라는 결과물에 '우연히' 도달했을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은 요행(?)은 작가에겐 그 다음 단계로 좀더 멀리 내딛게 해주는 모티브가 되어주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작가를 게으름뱅이로 만들거나 하나의 작법에 안주하게 만드는 폐단의 소지도 안고있다. 왜냐하면 회화나 사진 같은 평면작업은 매체 속성상 텍스트 없이 이미지 자체로 승패의 모든 것을 걸게끔 강요당해 왔기 때문이다. 아무런 텍스트의 도움 없이 이들 '침묵하는' 이미지들의 가치를 논하고, 의미를 헤아린다는 것은 고단한 과정이야 그렇다치고, 허무맹랑한 노고처럼 느껴질 때조차 많다. 만일 자신과 관객에게 성실하고 진솔한 작가라면, 제3자가 부담해야할 이 같은 비경제적 고충과 애로사항을 한발 먼저 깨닫고 있어야한다. 침묵하는 이미지의 비호 속에서 무책임하게 뒷짐이나 지고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어떠한 친절한 해설도 없이 오로지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것만이 능사인 줄로 작가들은 이따금 착각하기도 한다. 하물며 역설적이지만 스스로에 대한 진술거부로 인해 더더욱 '예술적'으로 대접받기조차 하는 것이 예술계의 현주소이다. 발터 벤야민도 사진이 의미를 상실한 채 지나치게 미화되고 즐거움의 대상이 되는 것에 우려를 표한 바 있다. 마냥 아름답게 찍혀 나오는 사진 이미지를 수수방관할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떠한 진술을, 어떠한 방법을 고안해서 요령 있게 담아내는 일이란 참으로 고된 작업이 아닐 수 없다. 김현민이 이제부터 인내력을 갖고 해야할 일이다. ■ 반이정

Vol.20030301a | 김현민 사진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