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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회 석남미술상 수상展
모란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B1 Tel. +82.(0)2.737.0057
내 육체는 …로만 존재한다. : 회화라는 육체에 쓰여진 텍스트 회화의 육체 ● 진부하게, 기원 전 15000년의 라스코 동굴 벽화부터 시작하는 미술사를 들먹이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가 다 알고 있는 듯 하면서도 정작 그 '본질'에 대해서 말하기 어려운 회화에 대해서 말할 때 오히려 중요한 것은 '물질적 현존'으로서의 그림이다. 플라톤이 『국가』제10권에서 회화를 모방1)의 모방으로 보고 시와 함께 이상 국가에서 추방해야 할 것으로 규정할 때, 그가 비난한 것은 회화가 정신의 실재(Idea)를 모방한 허상이라는 것이었다. 그 유명한 침대의 비유에서 회화가 실재에서 두 단계나 떨어진 모방으로서 비난받을 때, 억울하게도 회화는 자기 자신으로 평가받은 것이 아니라 이상계(Idea)의 진리, 도덕 ,선과 같은 정신의 기준에서였다. 그러면 극단적 자기 지시로서의 모더니즘 회화(Modernist painting)는 이러한 정신의 선험성(apriority)을 극복했는가? "모더니즘은 예술 바로 그 자체에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개별 장르의 포용의 범위가 축소됨을 무릅썼지만, 모더니즘 회화에 있어 "평평한 화면, 캔버스의 형태, 물감의 성질"2)은 고도로 물화(物化)된 정신의 또 다른 이름이지 않을까?
회화 그 자체로 그것을 보고, 느끼고, 이해하고, 말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조차 한다. 그런데 한 명의 화가가 자신의 텅 빈 캔버스로 육박해 들어갈 때, 또 감상자로서 각각의 우리가 그 그림과 만날 때 결국 조우하는 것은 물질적 현존, 내 표현으로는 '회화의 육체'이다. 한 인간의 육체가 응시하고, 터치하고, 그 속에서 유희하다가 되 튕겨져 나오는 (촉각적)살과 (경험의)주름을 가진 것으로서의 육체. 쾌/불쾌의 정념을 방출하는 시각적 표면. 그것이 바로 '회화의 육체'이다. 화가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 화가 벨라스케스는 그림의 내용(정신)은 보이지 않고, 뒷면 나무 프레임(실체)만이 (우리의 시선에)적나라하게 드러난 캔버스 앞에 서서 관람자인 우리를 보고 있다. 우리가 보고 있다시피 그는 이 상황을 「메니나스(Las Meninas)」에서 재현함으로써, 비가시적인 정신/가시적인 사물로서의 회화라는 문지방을 넘나드는 것이 화가와 회화의 운명(정의)임을 주제화한다. 마그리트는 「인간조건(La Condition humaine)」에서 현실(real world)과 허상(하나의 이미지)이 겹쳐지는 회화의 자리를 보여준다. ● 그리고 내가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유승호의 그림들은 우리가 소위 정신을 전달하는 매체라 인정하는 '언어'와 모방-허상이라 간주해 온 '이미지'가 서로를 복잡하게 비추는 것들이다. ● 만약 우리가 주의를 집중해서 그 그림의 육체에 쓰여진 텍스트의 표면과 그것이 새기는 이미지를 더듬는다면 지각과 언어가 실상은 분리되지 않는다는, 오히려 복잡하게 서로를 반영함을 깨닫게 될 것이다. 필사된 이미지는 견고한 인식의 선험성을 구멍내고 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뒤통수치고 있다.")
해석의 또 다른 지평 ● 내가 관찰하고 있는 한 판본, 『추상표현주의』(찰스 해리슨, 이영철 역, 열화당, 1997)책의 p.63의 도판. 거칠게 물감으로 그려진 한 여인. 큰 눈을 부릅뜨고 이빨을 드러낸 결코 한 인격이기를 거부하는 육체. 그것은 윌렘 드 쿠닝의 「여인 Ⅰ」 1950-52. ● 다른 한 이미지는 동아시아 한국, 서울의 변두리 작업실에서 그려진 회화. 부드럽게 휘감는 검은 잉크로 쓰여진 문자, "으-씨"로 구축된 한 여인. 언어에게 살과 피를 얻었지만 여전히 이미지이기를 그치지 않는 육체. 그것은 유승호의 「으-씨」 2002-2003. ● 과거 십 몇 년 전 처음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의 「여인 Ⅰ」을 보았을 때도, 얼마 전 유승호의 작업실에서 「으-씨」를 보았을 때도 나는 그 그림들이 풍기는 강렬한 육체성에 멀미가 났다. 「으-씨」는 유승호가 드 쿠닝의 「여인 Ⅰ」의 이미지를 빌려온 그림이다. 드 쿠닝의 원작이 거의 채찍질에 가까운 물감 자국의 격발이라면, 유승호의 2차 모방은 '으'와 '-'와 '씨'라는 문자의 격발이다. 드 쿠닝의 그림에서 배경의 붉은색, 주황색 앞에 검은 선으로 포획된 여인의 신체가, 맥없이 검은 잉크의 몇 몇 문자로 전이된 「으-씨」는 회화가 얼마나 다양한 육체성을 띨 수 있는지 숙고하게 해 준다. ● 유승호의 「으-씨」에서 여인의 육체는 눈에 보이는 육체일 뿐만 아니라 귀에 들리는 육체이다. 그림의 이미지가 여체라는 걸 시각적으로 알아챌 수 있다는 면에서, 그러나 그 이미지가 드 쿠닝의 여인이 (이빨을 드러내며)냈을 만한 "으-씨"라는 문자-소리로 구성되어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여기서 그림은 중성의 장소가 된다. 즉 '보다-이해하다'라는 지나치게 순진하고 인과적인 쌍을 동시에 통합하면서, 시각·청각을 어떤 다른 지각으로 표류시키는 제3의 공간이 된다. 비논리적이지만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것은 '시각과 청각이 떠도는 촉각의 공간'이다. ● 일련의 산수화를 모방한 작품과 드 쿠닝의 「여인」시리즈를 변환하고 있는 최근 유승호의 작업에서 나는 한 작가의 어렵지만 새로운 (해석에 관련한)시도를 본다. 또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업을 해석하려는 나의 시도 또한 전형적일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유승호가 동양화 중 산수화를 흉내낼 때, 드 쿠닝의 「여인」 이미지를 가져 올 때, 서세옥의 「두사람」을 변주할 때, 그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차용(appropriation), 패러디(parody), 브리콜라쥬(bricollage)를 방법론으로 한 퇴행(regression)의 포스트 모더니즘 담론이 아니다.3) ● "접해보지 않은 실제상황을 작업 안에서 놀고", 그 "놀이가 그리 즐겁지 않은 놀이"더라도 "무언가가 끊임없이 손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는 포만감"4) 때문에 작업한다는 유승호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어떻게 지각하는가', '지각된 것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인 것처럼 보인다.즉 내가 생각하기에 그의 작업의 가능성은 다음과 같다. 현실계에는 수많은 인상, 즐거움, 유희, 유머가 있고, '나'는 그것을 지각하는데, 어떤 매체를 통해서인가. 그 매체의 한계와 효용은 어디까지이며, 감각들은 그것을 어떻게 지각하는가. 새로운 감각은 가능한가 같은 질문과 답변으로 요약된다. ● 일단 그가 문제시하는 매체는 언어와 형상인 것으로 보인다. ● 푸코는 15세기이래 서양의 그림을 지배해 왔던 원칙 중의 하나가 "조형적 재현(유사)과 언어적 지시(유사를 배제) 사이의 분리"라고 분석한다. 두 개의 체계는 교차하거나 용해되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서로 간에 종속관계가 발생한다. 텍스트가 이미지에 의해 규제되거나 혹은 이미지가 텍스트에 의해 규제된다는 것이다.5) 여기서 유승호의 작업과 관련하여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언어기호와 시각적 재현이 대번에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언제나 하나의 질서가 형태에서 담론으로 혹은 담론에서 형태로 가면서 그것들을 위계화"6)해 왔다는 것이다. 언어와 시각적 형상은 상보적일 수는 있지만, 담론/형상의 구분 더 나아가 그것을 위계 짓는 질서는 없어지지 않았다. 푸코는 이 원칙의 절대성을 격파한 것이 클레(P. Klee)라고 보고 있다. 그가 분석하듯이 클레의 그림들이 "유사에 의한 재현과 기호에 의한 지시의 교차"7)를 가능케 했다는데 동의하더라도, 나는 그것이 여전히 읽을 수 있는(legible)것이라기보다는 볼 수 있는(imaginable)것이라 생각된다. ● 유승호는 텍스트와 이미지를 하나로 간주하고 양자를 의도적으로 오독(誤讀)한다. 바벨탑 축조이래 지속되어 온 언어기호/시각적 재현, 담론/형상의 구분과 위계를 그는 무화(無化)하고, 그 속에서 놀이한다. 이미지를 텍스트로 제멋대로 해석하고, 텍스트를 이미지가 들어가야 할 공간에 분유(分有)시키면서 놀아난다. 놀아난다고 하지만 그것은 철학적 사유에 있어서는 애지자(philosopher)를 현혹8)시키는 위험한 짓이며, 시각 예술에 있어서는 조형의 아우라를 속되게 하는 전복행위이다. 「나 이뻐?」는 미국 비평가들이 드 쿠닝의 「Monumented woman」에 부여해 준 추상표현주의 아우라9)에는 관심도 없거나, 있더라도 그 거대한 비평-해석권력에 주눅들지 않는다. "나 이뻐?"는 유승호가 드 쿠닝의 그림(의 그녀가 했을 만한 질문)을 드러낸 텍스트이며, 작품 「나 이뻐?」는 여인이 그 질문 자체가 되어 버린 발랄하지만 무시무시한 그림이다. ● 유승호와 감상자인 우리는 읽는 것이 동시에 보는 것이 되어 버리는, 또한 보고 있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단계에 와 있다. 해석의 또 다른 지평에서 「나(의 해석이) 어때?」라고 중얼거리면서.
즐김, 욕망 그리고 자유 ● 언어/형상, 텍스트/이미지를 위계 짓는 질서는 선험적이지 않음에도 우리는 그것을 분리시켜 사고하는데 익숙하고, 그 질서가 이미 주어진 것이라고 이해해 왔다. 그러나 계속해서 내가 '서로를 비추는 거울'로서 표현하고 있듯이 언어/형상은 이질적인 것들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내속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앞선 문단들에서 사용하고 있는 '숙고하게', '비추는', '지평', '드러낸', '보고 있다'10) 등등의 말들은 (적어도 우리 언어 습관에서) 의미를 표현하는데 있어 얼마나 시각의 방식이 불가항력적인지 예증한다. 그것들은 사실 이쪽이 저쪽이어서 서로 넘나듦을 즐긴다. ● 언어와 형상의 상호 반영성을 간파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유승호는 이미지를 텍스트로 해석하고, 그 텍스트로 다의적 이미지를 생산한다. 그는 문자 그대로 바르트적인 의미의 "생산자로서의 독자"이다.(우리는 유승호의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각의 독자'가 되어야 한다.) 그의 해석작업은 생산자로서의 독자가 행하는 "쓰여지는 읽기(writerly reading)"11)이다. 이 행위는 즐김(jouissance)을 유발한다. 그런데 이 (시각적이고)정신적인 즐김은 화가의 (육체적)고통을 필연적으로 요구한다. 그가 어딘가에 쓴 것처럼 "또 다시 손이 고생할 거라 생각하면 머리에 쥐가 날"정도로 그의 그리기는 지겹게 긴 시간동안 육체가 노동하는 걸 의미한다. 여기서 발생하는 패러독스까지를 그는 즐긴다.12) "따라서 몇 몇 체질의 경우 역설(paradox)은 일종의 황홀, 일종의 상실, 그리고 가장 치열한 무엇이다."13) 격렬한 표현, 과도한 제스처, 과잉된 의미가 있는 드 쿠닝의 여인들을 그는 짧은 탄성, 비속한 몇 마디 말로 해석 한 후, 그 하이쿠 같은 즐김의 단서를 들고 고통스럽게 자신의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그가 (아직도 너무 젊지만)한창 청춘의 열정으로 넘쳐 났던 시기 그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드로잉들이 있다. 목탄 등으로 자신의 얼굴, 소년의 몸, 인체 등을 그린 그 드로잉들은 독일 표현주의 회화에서 볼 수 있는 끈적한 정서와 기괴하게 변형된 형상을 보여준다. ● 그는 최근 자신의 해묵은 드로잉들을 해석하고 있다. 질척거렸던 정서는 '으이그 무서워라', '쉬-'같은 언어화된 감정, 거의 침묵에 가까운 단절음으로 표상 되고, 압축된다. 폐쇄적으로 윤곽선이 제한되었던 변형된 신체들은 몇 마디 말로 다시 쓰여지면서 수묵화의 번짐처럼 흩어지다가 모이고, 여리고 강하고를 반복한다. 「으이그 무서워라」, 「쉬-」가 그 작품들이다. 모본이 된 드로잉들이 한 때 (표현이라는)욕망 자체에 충실해서 혹은 그 (재미라는)욕망에 발 목 잡혀 그린 것들이라면 이제 그려진 대규모 캔버스 작업들은 욕망에 순순히 응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불의에 습격하고, 그것을 귀찮게 하고 탈선케 하여 표류시키는"14) 즐김(과 역설)의 변증법이다. (아버지의)15)상실을 견디면서, 황 홀-즐김(jouissance)의 자유를 얻기 위한 치열한 그 무엇.
칼리그람과 이미지-의미의 산포 ● 시인 아폴리네르는 1918년 『칼리그람(Calligramme)』을 썼다. 그 중 「비가 오도다(Il pleut)」는 유승호의 「천천히」와 함께 분석될 만 하다. 시의 형상 영역 개척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는 아폴리네르의 「비가 오도다」는 제목이 예시하듯 시의 텍스트를 비가 내리는 형상처럼 세로로 된 다섯 글줄로 삐뚤거리게 '쓴' 것이다.16) ● 유승호의 「천천히」는 '川'자 한 자만을 가지고 다시 그것을 포함하는 큰 川를 '그린' 것이다. 아폴리네르가 전통적으로 청각의 영역(시는 본래 낭송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에 시각적 형상을 도입하고, 언어 구조와 시각적 배치 사이를 유희하였다면, 유승호는 시각의 영역과 (감상자에 의해 읽혀야 한다는 의미에서 잠재적인)청각의 영역을 겹쳐서 쓰고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동어반복의 칼리그람 양피지(palimpsest)같다.17) 시각 이미지에 따라 시를 쓴 아폴리네르의 시작(詩作), 텍스트 자체가 시각 이미지인 유승호의 일련의 평면 회화, 둘은 푸코가 정의하고 있는 바 그대로 칼리그람이다. 즉 "수사학의 도움 없이 되풀이하고, 사물을 이중적 서기(書記graphie)라는 덫으로 사로잡기. 그것우선 텍스트와 형상 양쪽을 가능한 한 가까이 접근시킨다...그리하여 형상의 공간 속에 언표를 거주시키며 그림이 재현하는 것을 텍스트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18) ● 그런데 책으로 읽(고 보)는 아폴리네르의 시와는 달리 유승호의 그림이 재현하는 가시적 텍스트는 쉽게 말하지 않는다. 또한 그림의 이미지는 전통적인 그림 감상에서 상정하는 일정한 거리에서는 의미가 산포되지 않는다. 그 곳에서는 닫힌 형상, 하나의 의미에 불과하다. 우리가 잠시 제목을 보기 위하여 그의 작품이 걸려 있는 벽에 접근했을 때, 그래서 곁눈으로 흘깃 작품명을 읽고, 그림의 세부를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 머리 속에서 똑 같은 문장이 반복되면서 이미지가 열리는 걸 경험하게 된다. 예를 들면, "으이그 무서워라"라는 제목은 작품「으이그 무서워라」에서 "으이그 무서워라 으이그 무서워라 으이그 무서워라"로 무수하게 반복되며 우리는 그 걸 싫어도 즉각적으로 읽게 되는 것이다. ● 이 때가 표의문자 같았던 이미지가 표음문자화 되고, 단절 없는 침묵의 선들로 보였던 이미지의 외곽선이 수다스럽게 흩어지는 황홀한 시점이다. 「쉬-」는 소년이 오줌 누고 있는 그림으로 보인다. 그런데 고목 나무의 매미처럼 우리가 그 큰 그림에 바싹 다가서면 그 소년이 온통 '그녀(she)'에게서만 살을 받은 육체임을 알게 된다. 문자 'she'로 쓰여진 '쉬'하는 he. 단순히 언어 유희하는 재미있는 그림이라고 하면서 지나가기에는 이 그림의 소년은 불안정하고, 상실되어 보이고, 허약해 보인다.19) 이미지나 의미가 산포될 수 있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그 이미지의 대상, 의미의 자리가 불안정하게 부유하고, 근원을 모르고, 중심을 상실해서 약한 상태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림의 육체/'나'의 육체 ● 스텔라는 우리 감상자에게 집어 던지듯 "당신이 보는 것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고 말했다. 이 말은 형식주의 미학을 근간으로 한 모더니즘 회화의 정신을 설명할 때 흔하게 인용되는 문구이다. 여기서 물질은 정신에 의해, 혹은 정신을 위해 동원되고, 정신은 강화된다. 언어는 여전히 이미지를 억압한다. 유승호는 '당신이 읽는 것이 보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러나 '언어와 이미지는 읽고, 보는 것 안에서만 고정되지는 않는다'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것들은 서로를 비추고, 섞인다.우리는 그림을 덮고 있는 텍스트의 얇은 껍질을 뚫고 들어가, 그 체내의 텍스트가 언어화된 이미지, 이미지화 된 언어로 변증되는 과정을 즐겨보자. 그러나 필시 거기에는 '공(空)'만이 있을 것이다. 언어는 이미지를 완전히 설명하지 못하고,20) 이미지는 언어를 보충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승호의 그림에는 단지 그 교차된 흔적들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 강수미
1) 모방(mimesis), 예술을 통한 재현을 의미하는 이 용어는 그리스기에는 시각 예술에 대해서가 아니라 음악과 무용이 결합된 사제의 제식 행위를 나타내는 데 사용되었다. 플라톤은 이 오래된 용어에 '사물 외관을 복사함'이라는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첫 번째 인물이다. Tatarkiewicz, History of Aesthetics Ⅰ, pp.121-122 2)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자신의 글 "Modernist Painting"(1965)에서 강박적으로 '비판-자기비판, 원리비판, 비판의 대상, 비판적 태도 등등'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 마네 이래 모더니스트회화가 자기 비판을 통해 순수한 "자기정립"으로 매체의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단언한다. 그린버그는 과거의 대가들에게 부정적으로 취급되었던 "평평한 화면, 캔버스의 형태, 물감의 성질 등"은 모더니스트 화가들에게 회화의 제약이 아니라 긍정적 요소로 전환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나는 그린버그가 이 회화의 물질적 요소를 모더니즘 미학을 구현하는 정신의 표상으로 사용하였다고 본다. 따옴표로 인용한 부분은 『현대회화의 원리』F.프라시나 등 편, pp.27-40 3) 그래서 나는 이 글에 쉐리 레빈(Sherrie Levine)이나, 톰블리(Cy Twombly)나, 배준성을 호출해 오지 않는다. 4) 인용은 모두 유승호 작업노트 5) 미셀 푸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김현 역, 민음사, 1995, p. 51 6) 푸코, 같은책, p. 52 7) 푸코, 같은책, p. 53 8) 언어를 모방하고, 그것을 이미지 삼아 우리에게 호소하는 유승호의 그림들은 위험하고 전복적이다. 플라톤은 『향연』에서 미를 형이상학적으로 구분한다. 감각으로 인식 가능한 감각계의 사물들의 미와 지성으로 인식할 수 있는 미 자체가 그것이다. 가변적이고 상대적인 전자의 미와는 달리 후자는 영원불변하고 신적인 미의 형상이어서 이것이야말로 애지자(philosopher)들이 추구해야 하는 미의 대상이다. 감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어떠한 사물이나 특성도 그러한 미를 구성할 수 없으며, 감각적 쾌락를 유발하는 회화(나 시)는 감상자에게 이성적 원리나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방을 일삼아 영혼의 저급한 부분에 호소함으로서 지성과 이성의 법칙을 전복시킨다고 했다. 9) 찰스 해리슨은 추상표현주의를 "1940년대 후반 특별히 강렬한 예술을 목표로 한 역사적 현상"으로 해석한다. "추상적이라 말할 수 없는" 드 쿠닝을 포함하여 잭슨 폴록, 클리포드 스틸, "표현적이라 할 수 없는" 바넷 뉴먼, 마크 로드코 이상 선정된 다섯 명의 작가들은 "그 당시 유별나게 독자적인 '성숙한' 양식을 구축"한 것으로 해리슨에 의해 극찬된다. 찰스 해리슨, 『추상표현주의』참조. 10) '숙고하다'는 영어로 speculate로 옮길 수 있을텐데, 라틴어 어원이 보다, 관찰하다라는 의미의 specere이다. 또한 '지평(scope)'은 고찰하다, 시험하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scopium, '드러낸(demonstrate)'은 보이다라는 의미의 monstrare에서 유래한다. 이상 speculate, scope, demonstrare 3개 단어의 라틴어 어원은 Martin Jay, Downcast eyes(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1994) p.1의 각주 1을 참고했다. 11) "바르트는 다의적 의미의 생산자로서의 독자의 해석작업을 쓰여지는 읽기라고 부르면서 고정된 의미의 소비자로서의 독자의 해석작업인 읽혀지는 읽기(readerly reading)보다 우위에 두었다. 그리고 읽혀지는 읽기는 즐거움(pleasure)을 주지만 쓰여지는 읽기는 환희(ecstasy)를 준다고 주장한다." Roland Barthes, S/Z, trans. Richard Miller(New York, 1974) pp.5-6 따옴표의 인용은 김진엽, "해석의 즐거움 또는 괴로움: 데리다, 바르트, 밀러의 회의론적 해석이론"p. 8에 힘입었다. 여기서 즐거움(pleasure)과 환희(ecstasy)는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즐거움(plaisir)과 즐김(jouissance)과 흡사하다. "프랑스어에서 즐거움이란 육체적·도덕적으로 쾌적한 상태를 가리키며, 즐김은 동사 즐기다(jouir)에서 나온 말로 보다 내밀한, 그리하여 우리의 온 마음을 관통하는 보다 지속적인 감정을 의미한다. 문 화와 단절되지 않은 즐거움 및 문화와 단절된 즐김, 자아의 강화에 연관된 즐거움과 자아의 상실을 유도하는 즐김" 즐거움과 즐김의 구분 및 따옴표의 인용은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김희영 역, 동문선, p. 51의 김희영의 각주 5)를 참조했다. 12)졸고, "타인 없는 세상", 동명의 전시에 붙인 서문, 2001.3.28-4.8(인사미술공간, 서울) 참조. 13) 롤랑 바르트, 『롤랑바르트가 쓴 롤랑바르트』, 이상빈 역, 강, 1997, p. 160 14) 같은책, 같은 곳. 15)유승호는 작업노트에서 "나에게 아버지는 분명 있을 것이다. 다만 `아버지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쓰고 있다. 나는 이 '아버지'를 절대(the absolute), 인식의 선험성, 보다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회화에 내재한다고 전제하는 회화성, 규율, 조건 같은 것으로 해석한다. 16) 안상수, 『타이포그라피적 관점에서 본 李箱 시에 대한 연구』, 한양대 박사 학위 논문, 1995, p.21 17) "칼리그람은 우리의 알파벳 문명의 가장 오래된 대립들, 그러니까, 보여주기와 이름 붙이기, 그리기와 말하기, 복제하기와 분절하기, 모방하기와 의미하기, 바라보기와 읽기라는 대립들을 놀이로 지워버리려고 든다."(푸코, "흐트러진 칼리그람") 18) 푸코, 같은책, p.34 19) 그의 작가 노트 한 부분에는 「어린 냥, 젖비린내, 막둥이, 수줍음」 - 「천진 난만, 순수함」 - 「유머, 유치함」이라는 짧은 단상들이 보인다. 갓난아기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몇 년 후 가족사진을 찍는데, 아기인 그는 한사코 사진에 '박히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조그마한 지갑으로 그를 달래고.. 내가 이 작가의 유년기 기억에서 (어머니 가계에서 오는)상실과 허약함과 불안정함을 본다면 오버하는 걸까? 20)벤야민은 "말하자면 언어는 사물의 각각의 언어적 본질을 전달한다. 하지만 (언어는 사물의) 정신적인 본질이 언어적 본질 안에 담겨 있고 또 전달될 수 있을 경우에만, (사물의) 정신적인 본질을 전달한다."(Walter Benjamin 전집, Ⅱ, 1, 142)고 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어는 대상의 진리 내용을 전달하는 매체이지만, 그것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언어적 본질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사물, 대상, 이미지 자체를 전달 할 수 있는 언어란 없다. 따옴표로 인용한 부분은 김길웅, "미적 현상과 시대의 매개체로서의 알레고리"(현대 비평과 이론, 14호, 1997) p. 187의 번역이다.
Vol.20030227b | 유승호展 / YOOSEUNGHO / 劉承鎬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