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0226_수요일_05: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균형 잡힌 삶에 관한 어떤 의견 ● 1993년 가을이었다. 나는 티셔츠가 땀으로 눅눅해질 정도로 힘껏 걸어서 용문산을 오르고 있었다. 숨을 한껏 들이쉬면 가슴속으로 서늘한 가을공기가 느껴졌다. 폐가 작아져 가슴이 조금밖에 안 벌어지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숨이 찼다. 물만 먹으면서 지낸지 1주일째, 내장과 근육은 작아졌지만, 내 머릿속은 평생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내가 아기를 사진 찍은 이유 ● "권위를 갖춘, 내 몸 밖에서 온 지식"과 "내 몸 속에서 생겨난 느낌"이 서로 어긋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내가 키우는 아기가 하버드 의대의 권장량보다 보다 훨씬 적게 먹으려고 할 때처럼. 이런 상황에서 부모는 아기에게 분유를 더 먹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지, 아니면 아기가 먹고 싶은 양만큼 먹여야 할까 망설이게 된다. ● 어릴 때 나는, 느낌보다 지식을 따랐다. 부모님과 선생님이 제공하는 지식은 그때까지 늘 정확했기 때문에, 나에게 주어진 "해야 할 일"은 내 몸에서 생겨난 "하고 싶은 일"보다 큰 권위를 갖추고 있었다. 군대에서 월급을 받기 시작하면서, 나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남들은 무모하다고 하는 것들을 저질러볼 수 있었다. 월급을 다 털어 사진기를 사고, 죽지 않을 범위 안에서 단식을 하고, 나이에 걸맞지 않게 청바지에 집착하고… 몇 번 해 보니 권장량에 맞춰 사는 것도 좋은 점이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을 저질렀을 때 결과가 더 만족스러웠다. 어떨 때는 실패하기도 하고, 더 작은 집에 살게 되거나, 외식 횟수가 줄어들기도 했지만. ● 문명 속에서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은 갈수록 어려운 일이 되어간다. 생활에 필요한 지식은 점점 많아지고, 여러 가지를 신경 쓰며 살면 무엇이 중요한지 판단할 때 실수하기 쉽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지식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처럼 믿어 느낌을 무시할 때도 있고, 또는 "해야 하는 일"에 치어 "하고 싶은 일"은 뒤로 미룰 때도 있다. 어릴 때부터 권위를 갖춘 지식에 의존하며 성장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에 예민하지 않은 사람은, 누가 강제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해야 하는 일"의 제약을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를 하고 싶은 일로부터 소외시키기도 한다.
나는 내 아들 상언이가 균형 잡힌 삶을 살려면, 상언이가 자기 마음에 민감해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의 세상을 생각해 보면, 생활을 위해 나나 내 선조들 보다 훨씬 많은 지식을 갖춰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아기가 지능 개발에 좋은 장난감을 갖고 노는 것보다 냉장고 뒤지는 걸 하고 싶을 때, 권장량으로 알려진 식사가 별로 내키지 않을 때, 내가 책 읽고 싶은 시간에 같이 놀고 싶어할 때, 우리 집에서는 상언이 뜻대로 한다. 사진에 관해 언급해야 하는 자리에서 이런 원칙을 적는 이유는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의 균형에 관한 내 생각이, 사진에 담긴 상언이의 일상에 반영되어있기 때문이다. ● 1993년 가을, 군대에서 나는 느낌과 지식에 대한 중대한 경험을 했다. 음식 대신 물만 먹는 단식을 11일 동안 하면서, 배고픔과 음식, 몸의 상관관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단식을 하면서 비로소 내가 뭔가를 먹던 이유가 배고픔이 아니라 "하루 세 번," "정성껏 차려주신 음식," "영양가," "전에 맛있게 먹은 기억" 같은 지식이란 것도 깨달았다. 단식을 시작한 계기는 몸에 관한 호기심 때문이었지만,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물으며 살게 된 계기이기도 하다. 습관과 지식의 영향 없이 온전히 세상을 인식하고 행동하는 상언이를 보면, 단식했던 때의 깨달음이 다시 떠오른다.
사진 촬영 ● 이 사진전 속에는 생활과 원칙, 공과 사, 촬영자와 피사체가 섞여있다. 나는 그 섞여 있는 상태를 온전히 담는 것이 균형 잡힌 삶에 관한 내 생각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조명을 포함한 모든 상황을 내가 본 대로 기록하기 위해서 사진은 연출 없이, 자연광 상태에서, 카메라를 손에 쥐고 찍었다. 주로 니콘 F-90과 35mm 렌즈를 썼고, 가끔 F-801s와 85mm, 50mm, 20mm, 180mm를 썼다. 18평 아파트라는 제약 조건상 대부분의 경우 가까운 거리에서 조리개를 최대한 열고 찍어 초점의 깊이가 얕은 사진이 많다. 이런 제약을 보상하기 위해 감도 400짜리 필름을 썼다. 대부분의 사진은 일포드 HP5로 찍었는데, 이 필름이 콘트라스트를 과장하지 않고 중간 톤을 풍부하게 표현하기 때문에 우리 사진전의 컨셉과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이유로 확대 과정에서 버닝이나 닷징을 하지 않았고, 콘트라스트에 변화를 주는 필터 사용을 최소화했고, 일포드 인화지를 썼다.
어색함 ● 내가 사진으로 전달하고 싶은 바를 글로 적는 일은 어색한 일이다. 내 의도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매체는 사진이지, 글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색한데도 이런 일을 한 이유는 내가 사진을 전공한 사람이 아니고, 사진 속에 등장한 인물이 내 식구들이라 내 작업의 진지함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내가 앞에서 언급한 "내 몸 밖에서 온 지식"과 "내 몸 속에서 생겨난 느낌"의 부조화는 나와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 아이를 키우며 얻은 작은 깨달음을, 자기 삶에 책임감을 가진 사람들과 공유하고자 전시회를 한다. 감상은 관객들의 몫이다. 내 글이 그걸 방해지 않았으면 좋겠다. ■ 신봉철
Vol.20030225a | 신봉철 사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