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0226_수요일_05:00pm
갤러리 상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9번지 Tel. 02_730_0030
작가 자신을 위한 독백-가장 얇은 신체 ● '그림으로써, 그리고자 하는 나를 말한다'. 동어 반복적인 이 문장은 현재 작가의 작업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이상 그릴 수 없을 때까지 그려보기를 시도해 보는 듯한 그의 '머리칼'은 가장 얇은 신체를 빌어, 삶이라는 총체 저변에 깔린 에너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하지만 너무 빨리 총체로 넘어가기에 앞서 작가에게 있어 '그리는 행위'가 가지는 의미를 좀더 짚어 보아야겠다. ● 오정일의 작품은 회화에 있어 그리는 행위의 부분과 완성된 결과물의 재현적 효과 두 부분이 함께 추구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대미술에 새롭게 대두된 경향인 '개념으로 시작하여 개념으로 마무리짓는' 속성에 비하면 매우 고전적인 가치의 추구라고까지 부를 수 있다. 그가 소재로 삼은 '머리칼'은 어떤 문학적 은유로서의 역할에 중점 두어져 있다기보다는, 묘사가 용이하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다층적인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선택된 듯 하다. '그리기'에 대한 열망을 폭발시킬 수 있는 적절한 대상이 된 것이다.
그 열망이 폭발된 대표적인 작품이 있다. 가로 4m가 넘는 대작으로 2년여 기간을 넘겨 제작된 작품이 그것이다. 굽실거리는 머리칼이 우주 공간의 은하수처럼 펼쳐진 이 대작은 분명 완성된 상태에 대한 기대를 목적으로 그려진 것은 아니라고 본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통한 자기 발견, 아니 자신과의 만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한 올 한 올의 머리카락 가닥을 만들어 나가면서 그 무엇을 위해서도 아닌 그 행위를 하고 있는 자신을 만났으리라. 여기에서 '그 무엇을 위해서도 아닌'이 중요하다. 예술이라는 것을 구체적인 목적-먹을 것, 입을 것, 잠잘 곳, 명예와 미래 등-에 대한 추구와 무관한 활동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면, 예술은 어떠한 목적의식을 배제한 순수한 존재 자체인 자신을 만나고 느끼는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미세한 캔버스의 표면을 느끼고 붓을 통한 물감 조절의 한계를 실험하는 작가. 한 층 한 층 쌓여서 창조되는 자신이 재현한 세계. 그 결과물에서 빚어지는 울림. 창조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에 대한 자각은 '살아서 존재한다'라는 사실을 희열로 받아들이게 하는 커다란 사건이었음에 틀림없다.
실존적인 발견의 이면에는 작가의 삶이 가진 불확실함과 막연함에 대한 몸부림을 예상할 수 있다. 현실 구조 안에서 작가로서 일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실상을 모르는 일반인에게도 이미 모험과 도박 같은 삶으로 알려져 있다. 추측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심각하게 작가로서 살아감은 살아간다는 것보다는 버텨낸다는 표현이 적당할 만큼 자본주의의 가치와는 거꾸로 삶의 방향을 진행시키는 것과 같다. 매일 매일의 생계와 노후에다, 이름을 남기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도 보장받기 어려운 작가로서 살아가는 것. 어떤 방식으로든 자신이 선택한 길을 가고자 하는 확신을 스스로 확인해 보는 것이 작가의 절실한 과제였으리라. 그의 '머리칼'은 가장 얇은 신체이지만 끈질긴 작가의 의지를 반증해 줄 수 있는 어떤 무기처럼 느껴진다. 많은 것을 말할 수 있는 얼굴 표정이나, 손짓과 달리 뒷모습들, 아니 그저 머리칼들은 고독한 자기 자신의 선택을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는 행위와 결과물의 울림을 통해 작가가 자신의 존재함을 '발견'했다면 다시 거꾸로 자신의 존재함을 '발현'하는 통로는 작품이 된다.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는 과정은 단순히 작가를 주체로 작품을 객체로 하지 않는, 작품 또한 독립된 주체로 인식하게 하는 과정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발견은 작가와 작품의 관계 뿐 아니라 작가가 접하는 외부 세계에 대한 해석으로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 외부 세계란 인간관계를 포함하는 더 포괄적인 세계. 즉, 존재하는 모든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가까운 동료를 넘어서 사회와 문화, 그 문화로 말미암은 많은 시지각 현상물, 자연과 환경 등 등.... 이러한 외부 세계가 작가에게 독립된 타자로서 영향을 주는 것을 지각하며,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고정되어 불변하는 것이 아닌 무수한 영향의 주고받음의 흐름 속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 그런 외부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사고와 감성이 형성되고, 자신도 그 흐름 속의 일부로서 창작하는 것이라는 자각이 작가를 겸허하게 만든다. 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자각은 살아있음에 대한 쾌감을 알게 하고, 창작자라는 자기 확신을 지니도록 한다.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꿈틀거리는 묘한 에너지는 그러한 강한 자기 확신과 존재가 흐르는 것이라는 속성을 감지한 작가의 감성이 전달된 것에 다름 아니다.
작가가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고 희열을 맛보았다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작가가 자신 안에 깊이 침잠하여 생에 대한 자각이 무르익어 이제 교감과 소통의 가능성에 눈길을 돌리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자아에서 교감으로는 자연스런 귀결이라 보여진다. 이제 초점을 맞추어야 할 부분은 '내용'이다. 생의 '흐름과 주고받음의 속성'을 자각했다면 '무엇을?'이라는 질문을 해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과연 주고받음의 교류 안에는 구체적인 삶과 관련하여 어떤 내용을 담아야 하는가. 사회와 역사라는 구조의 틀을 벗어날 수 없는 개인으로서 작가는 무엇을 흘려보내고 받을 것인가. 심혈을 기울인 대작에서 느껴지는 일종의 공허감은 그러한 내용의 부재로 읽히기도 한다. 그의 작품이 어떤 종류의 울림을 느끼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매우 고독하기도 하고, 알 수 없는 것으로도 느껴진다. 풍부한 은유로 해석하기에 작가는 많이 젊고 생략은 아직 이르다. 이제 그의 작가로서의 자각, 살아있음에 대한 강한 확신이 '의욕'에서 '내용'으로 모색의 방향을 잡아야하지 않을까라는 제안이다. 물론, 그 소통의 내용은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처음의 물음과 같지만 또 전혀 다르기도 한 질문들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 신혜영
Vol.20030223a | 오정일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