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3_0219_수요일_05:30pm
백상기념관 1층 서울 종로구 송현동 60-1번지 Tel. 02_724_2236
상실과 외피 ●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이 그의 저서 『절단된 신체와 모더니티(The Body in Pieces)』에서 인용한 작품, 「고대 폐허의 장엄미에 압도당한 예술가」(Henry Fuseli, 1778~79)의 정서로부터 아마도 황재연의 그림은 시작된다. 과거의 숭고하고 장엄한 조각상의 일부분 아래에, 그것과 대조적으로 왜소한 몸을 기대며 이제는 사라지고 잃어버린 총체성, 이상적이고 본원적인 것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과 회한에 젖어 있는 예술가의 모습. ● 황재연의 그림에서 화면 공간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손의 이미지는 목탄 소묘로 이루어져 있다. 부드럽고도 단단하게 섬세함과 풍부함을 발산하는 그 이미지들은 오랜 시간 정성들여 다듬어 낸 가운데 풍겨지는 대상(object)으로서의 아우라에도 불구하고, 이면에 미묘한 불안감을 갖고 있다. 지난 몇 년간의 그의 「이미지-인체로부터」 연작이 그러했듯이 이 손들 역시 '감정과 사고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투명한 대상물일 수 있으며, 내면의 정황과 움직임을 체현하는 장(場)이고 광경인(황재연)' 인체로서 응축된 에너지를 전달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지난 그림들이 표현적인 필치로 내면 에너지의 역동성과 생명감을 고양시키려 했던 것에 반해, 이 손의 이미지들은 전체가 아닌 부분-나머지를 상실한 파편-으로서의 인체 이미지가 갖는 완전하고 이상적인 육체에 대한 향수와 짙은 비애감(pathos)을 기저에 깔고 있다. 피부의 미세한 결과 마디의 주름, 잘 맞물려진 손가락뼈와 근육과 핏줄에 대한 집요한 재현 의지는 겉껍질인 피부 안쪽의 뜨거운 에너지를 분출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극도로 섬세하고 유약한 살의 조직이자 껍질 그 자체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들이 흰 배경 공간 속에 어떠한 연결 고리도 없이 떠다니는 불완전한 외피(外皮)로서의 형상임을 드러내도록 이끈다. 마치 수화라도 하는 듯한 다양한 손의 포즈들은 텅 빈 공간 속에서 점점 희미해져가는 촉각적 감각을 되살리기 위해, 더 이상 허공을 부유하지 않기 위해 애써 서로를 맞잡거나 그러쥘 무언가를 찾으려 하는 절실한 욕구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손의 공간 바깥에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박사의 피조물인 '괴물(The thing)'이 등장한다. 괴물은 언제나 변종, 돌연변이이고 불완전하고 미성숙하며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정신상의 어떤 분류에도 포함되지 않는 존재(Peter Brooks)'로서 우리의 이성과 질서를 비켜 간다.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원작 소설에서 괴물은 '육체를 창조하고 정의하는 언어 자체를 초월한 부산물이자 잉여적인 자'로, 저 바깥에서 '관찰자이며 관음자(voyeur)(P. Brooks)'로 유리되어 살고 있다. 셸리의 소설 속에서 괴물이 거울 같은 웅덩이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본 뒤 자신의 불완전성을 확인하는 장면처럼, 황재연의 그림 「ambivalence 03-02」에서 괴물은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그러나 자신의 모습으로 인한 관계의 단절, 모성(母性)의 부재로 인한 근원적인 결핍과 상실감이 그로 하여금 깊이 회의하고 비통해 하게 하면서도, 자신의 육체와 존재에 결여된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욕망을 불러 일으켜 그의 편력(偏歷)을 이어 나가게 만든다. 작가는 그런 괴물의 얼굴과 손을 세심하게 묘사하여 따스한 존재감을 부여해 주려고 한다. 하지만 정밀한 묘사의 시선은 그것의 인공적인 관절과 이음새가 어긋난 목덜미에 와 닿으면서 혼란스러워진다.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액션 피규어(action figure)'-육체를 흉내 낸 모조품으로 빈 거푸집에 불과한-를 묘사한 괴물 이미지의 몸체에 해당하는 나머지 부분들은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또는 투명 인간으로 변해 가듯 뿌옇게 사라져 가는 중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림들 속 괴물은 화면의 내부, 외부, 또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려 자신의 기원은 어디에 있는지를, 전력을 다해 자신의 사라져 가는 존재감을 붙잡으며 통절하게 묻고 있는 것 같다. ● 「ambivalence」라는 명제는 이 두 종류의 이미지들의 경계 상에서 오가는 작가의 감정을 일컬음일 것이다. 가장 인간적인 표정을 갖는다고 생각되는 손을 예찬하지만 한편으론 전체와 관계로부터의 소외를 의식하고 있다. 괴물-피규어의 모습을 통해 현 시대의 사물화된 인체-몸의 얇은 가치를 씁쓸하게 바라보지만, 또한 그것에 투사된 연민의 감정을 읽는다. 이러한 이중적 감정 속에서 '인간적' 몸에 대한 욕망은, 그의 손에서 부단히 이루어지는 묘사의 반복과 집적(集積) 가운데 포착되는 손과 괴물의 표정을 통해 끊임없이 생성되고 있다. ■ 이지연
Vol.20030222a | 황재연 회화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