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2003년 마로니에미술관 선정 기획공모展   2003_0205 ▶ 2003_0223

한젬마

초대일시_2003_0205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수강_류지선_박재웅_오창규_우명하 우상호_윤영섭_이만나_장성아_전인아 진훈_최성민_하원_한계륜_한젬마

마로니에미술관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0번지 Tel. 02_760-4601

이 전시회에 참여하는 15인의 미술가들 대부분은 1989년에서 1990년대 중반에 걸쳐 전문 미술가로서의 훈련을 마치고 자신의 예술적 기획을 제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미술현장에 적용해오고 있는 30대 초 중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최근 이들의 세대는 이념적 선택국면의 고뇌를 격은 386세대와 디지털 어휘를 자연스레 흡수한 N세대 사이에 "어중간한" 혹은 "부유하는" 세대라고 표현된다. 대학의 실기실에서 이들은 앞 세대의 분출하는 몸짓의 칠과 무자비한 기성물의 적용을 마냥 따르기에 어중간했고 디지털 어휘로 무장한 거대 공룡을 몸소 부리기에는 민첩하지 못한 채 부유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과 동료들이 서태지 음악의 소음을 이해할 줄 아는 한 심각한 이념의 요청으로부터 자유로웠고 그만큼 눈치 볼 곳도 없는 듯했다. ● 여기에 모인 15인은 스스로 "보라"라는 지극히 형식적이고 시각적인 술어를 통해 자신들을 드러내려고 한다. 이들은 주제의식의 과잉과 집합물들의 단순한 나열을 피하고 개별의 특성을 고스란히 들추어내기 위해서 이 단어를 여러 논의를 통해 선택했다고 한다. 이들은 보라를 빨강과 파랑의 대비가 결합한 결과로 보고 그것의 극단적임과 동시에 중성적이고 모호한 특성에 관심 갖는 것 같다. 이 전시회를 통해 이들은 개별체의 다양함을 인정하고 자신과 자신이 속한 세대를 설명하려는 듯하다. 여기서 나는 이들이 매체를 통해 이룩하는 인식론의 방법과 아우성대는 다양한 음성들을 공간에 공존시키는 방법에 주목한다. ● 이들은 전부 회화를 통해 자신의 훈련을 시작했고 매체를 마주한 진지한 눈과 그것에 몰입하는 신들린 손을 경험했다. 더욱이 이들은 매체가 마음을 대리 할 것으로 믿은 앞 세대의 교훈을 손쉽게 짧은 시간에 수용할 수 있었고 형식과 내용의 첨예한 갈등을 관조하거나 끝난 지점에서 회화를 접하는 행운을 갖기도 했을 것이다. 회화에서 형상과 배경의 관계와 같은 개별 요소들의 대립과 충돌은 보는 이의 시각을 자극하고 그 곤경은 관람자의 경험과 마음으로 통합된다. 이 과정을 회화 스스로 설명하고 증명하기 위한 세월이 르네상스이래 현대미술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각각 자신의 수업기에 자신의 매체를 통해 이 과정을 요약하는 법을 어느 세대보다 정확히 그리고 집중적으로 단기간에 터득했다. 그와 동시에 이들은 가까이 다가오는 매체의 위기를 감지해야 했고 그것에 반응해야 했다.

김수강
류지선
박재웅
오창규
우명하

김수강의 평면에서 개별요소들은 층지고 겹쳐지는 제작공정의 물리적 특성을 갖는다. 그것의 시각적 효과는 화학적 작용에 의한 투과와 반사에 의존해 있다. 김수강의 매체를 마주한 관람자는 그 공정과 효과를 미묘한 분별력으로 통합하는 지점에서 보라를 보게된다. 김수강의 보라가 표면의 불투과성과 투과성간의 대립을 통해 시각적 대상에 관한 인식에 집중하는 반면 류지선은 시각의 견고함과 서술의 유연성간의 충돌에 보라를 적용해 보이고 있다. 나무라는 자연물과 시멘트라는 인공물간의 다소 교훈적 암시의 서술은 결국 보라라는 시각적 승리로 종합됨으로써 일말의 반전을 이룩해 보인다. ● 한편 박재웅은 망막을 통한 지각과 그것에 대한 손의 반응 사이에서 벌어지는 복합적인 사건들이 거의 노출되지 않게 함으로써 미술가 자신이 종국에는 하나의 매체임을 논증하려 한다. 관람자의 현실에서 추했던 것이 박재웅이라는 메커니즘을 통해 태연히 재현될 때 아름다운 것으로 변한다. 이는 바로 매체를 마음의 수련으로 여겼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김수강의 존재론적 인식, 류지선의 회화적 반전 그리고 박재웅의 엄정한 훈련에서 나는 이들의 매체가 세계와 대상에 대한 각성의 방식을 제공하는 것으로 본다. ● 박재웅이 대상의 치밀한 시각적 관찰을 통해 일상의 대상에서 목격되는 보라를 제시했다면 오창규는 연상을 통한 자신의 반응으로 자신의 캔버스를 구성한다. 유명가수와 어머니는 미술가와의 사회적 관계가 다름에도 동일한 보라로 통합되어 있다. 연상을 통해 오창규는 겨우 감지되기조차 어려운 인상의 끄트머리를 자신만의 시각적 식별로 옮기는 것에 자신의 매체를 활용한다. 오창규가 느낌을 개념의 영역이 아닌 끝끝내 시각의 것으로 둠으로써 복잡한 유동적 상태를 보라로 번역하는 반면 우명하는 캔버스 표면의 물리적 상태를 통해 침잠 하는 관람자의 마음에 자신의 회화적 주장을 피력하고 있다. 이를 통해 물리적이고 보여지는 영역과 그것을 바라보는 관람자의 마음간의 충돌을 동시에 제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공간을 창출한다. 이 공간에는 제작과 감상이 충돌하고 캔버스의 바탕과 형상이 맞닥뜨려 있다. ● 우명하가 각각 파랑과 빨강의 캔버스 바탕에 보라의 통일된 얼룩을 제시함으로써 역동적 활력의 단면을 제시한다면 우상호는 각각 색의 차이와 변화를 갖는 세 장의 캔버스에 음식물의 재료에서 유래하는 이미지를 상관적으로 변화되게 제시함으로써 연속된 순환을 암시하고 있다. 이들 캔버스는 바탕의 흡수와 안료의 스며듦 그리고 전사에 의한 층들을 갖는다. 이 요소들의 차이는 제작 공정의 틈과 휴식에 의해 구별된 것으로 보인다. 그 틈과 틈 사이는 바로 미술가의 삶이 개입된 영역으로 판독된다. 나는 오창규의 화면에서 느낌이라는 비가시적 영역이 시각으로 번역되는 것을, 우명하의 캔버스에서 물질에 녹아드는 마음을 그리고 우상호의 이미지들에서 순환의 상징이라는 개념이 가시적으로 당당히 화랑공간에 들어 나는 것을 본다. ● 윤영섭의 지는 꽃은 그의 캔버스에 재현됨으로써 다시 살아난다. 그것은 윤영섭의 숨결, 캔버스의 결, 그 결들을 목격하는 관람자의 눈길로 복구된 회화적 활력이다. 여기에 동원된 윤영섭의 노동은 메시지의 전달을 위해서라기보다 오히려 그 노동력의 지속을 가능케 한 모티브에 의해서 유지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대상과 회화의 공정 그리고 제작자 자신을 일치시키는 윤영섭의 캔버스와 윤영섭의 마음에 의해서 가능했을 것이다. 이만나는 제작자 혹은 관람자의 삶을 재고하는 장치로 자신의 매체를 활용한다. 이만나의 작품은 삶의 기능에 종속된 대상으로 채워져 있고 그 속에서 사람들이 기능적으로 살아가는 일상의 이미지를 확대, 역전, 전면 배치시키는 장치를 통해 관람자로 하여금 생경한 공간을 제시하려 한다. 이는 바로 충돌과 대립을 제시하는 회화 앞에 서 있는 관람자의 조건을 추려낸 사례이다. 이를 통해 이만나의 매체는 대상을 지나치는 방관자에게 그것에 대해 진지한 관람자가 될 것을 촉구한다. ● 이만나의 평면이 일상을 거리 둠으로써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면 장성아는 자신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운다. 이럴 때 장성아의 회화공간은 캔버스의 표면이나 그 깊이에 한정되지 않고 표면으로부터 돌출하는 이미지와 그것을 향해 다가가는 관람자의 시선 사이에서 성립된다. 장성아의 표면에 엷고 미묘하게 설정된 시각적 자극은 결국 그 앞을 서성이는 관람자의 마음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회화의 표면에 고정되지 않고 마치 관람자의 실재하는 공간에 떠 있는 것으로 판독된다. 이 공간은 회화의 것도 그리고 관람자의 것도 아닌 지점이다. 나는 미술가의 제작실에 이루어진 공정과 그 동기를 그대로 화랑공간에 유지하는 윤영섭 회화의 활기를 통해 제작자의 육체와 온기를 느끼고 이만나의 제작물이 제시하는 대상화의 방식에서 매체 제작 자체가 해석과 비평의 활동임을 확인한다. 그와 함께 장성아의 얇은 표면으로부터 부유하는 시각적 작용을 통해 있는 것과 없는 것 그리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들 상반된 영역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있는 관람자가 발견된다. 이 온기와 대상화 그리고 애매함은 바로 회화공간의 조건이다.

우상호
윤영섭
이만나
장성아
전인아

제작과정의 노동과 제스처를 그대로 남기는 전인아의 표면은 여타의 동료들에 비해 다소 표현적이고 물리적으로 충전되어 보인다. 전인아의 캔버스는 제작과정에 진행된 미술가의 몰입경로가 겹겹이 층지고 맺힌 물감의 겹들과 그 표면을 긁어내는 네거티브의 드로잉간에 충돌을 야기한다. 이를 통해 전인아의 관람자는 번쩍이는 감정의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감정의 충전은 진훈의 매체에서 피부를 자극하는 면도날의 통증과 같은 전율로 울린다. 진훈의 화면에 칠된 보라의 창틀은 그 자체 이미지로 읽어야할지 아니면 창틀을 넘어선 빈 공간으로 읽어야할지 관람자에게 막다른 선택을 요구한다. 두 가지 이외의 다른 선택이 없는 자리는 바로 딜레마의 정의이다. 이는 어쩌면 현대미술이 안고 있는 위기 의식과 동일해 보이기도 한다. ● 한편 하원에게서 전율은 뚜렷한 울림의 파장으로 판독된다. 하원의 매체에서 시각은 어느 듯 음향으로 변형된 채 열려 있는 듯하다. 하원의 매체가 관람자를 적극적으로 도입 하지만 관람자가 제 위치를 읽어버리는 것을 꺼려한다. 단지 관람자는 자신에게 확보된 공간에서 미술가의 매체를 마주하고 그 앞을 지나거나 움직이면서 보도록 설정되어 있다. 이는 하원의 매체가 소비와 몰입에서보다 오히려 비판과 해석의 조건으로 있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네거티브의 형상이 전면으로 드러나는 전인아의 회화적 방식, 양극단의 선택을 동시에 공존시킴으로써 가능한 진훈의 딜레마 그리고 시각이 공감각으로 확대되는 하원의 파장에서 목격되는 의미의 변형들이 바로 매체를 마주한 제작자와 또 그것을 마주한 관람자가 처한 애매함의 조건에서 유래한다고 생각한다. ● 한계륜은 사사로운 일상의 에피소드를 연속된 순환 구조로 제시한다. 이러한 서술적 판독이 관람자의 실재하는 삶을 인정하고 적극적으로 시간의 개입을 허용하는 것으로 보일 법하다. 하지만 한계륜의 매체는 관람자가 전적으로 스토리에 의존한 몰입을 허용하지 않고 오히려 관람자가 끊임없이 자신의 삶과 위치에서 매체의 자극과 충돌하기를 권한다. 이 점은 한계륜의 매체가 보는 이를 몰입시키는 영화의 매체와 구별되게 한다. 한계륜의 매체가 비평과 해석을 생산해내는 전략으로 본다면 한젬마가 제시하는 공간은 관람자의 적극적인 참여와 기여를 요청한다. 한젬마는 사람의 기억이란 스며들고 배어 있는 것으로 보고 자신의 과거를 소급하여 철재 수채화 팔레트에 염색된 보라를 제시한다 관람자는 그 팔레트에 남은 색들을 보라의 표면에 마음껏 혼합하고 설치물의 표면에 그리는 것이 허용된다. 이는 미술가의 의식을 관람자와 공유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 관람자는 색들의 변화와 시각적 자극의 미묘한 분별력을 체험케 된다. 보는 것만이 아닌 직접 매체의 제작에 참여하는 관람자의 개입을 한젬마의 공간은 허용하지만 결코 관람자가 삶의 기능을 목적으로 혹은 삶의 습성으로 한젬마의 장치를 이용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 나는 한계륜의 매체가 영화나 여타의 매체와 외관상 유사해 보이지만 보는 이의 몰입을 방치하지 않은 점에서 그리고 한젬마의 팔레트 버전들이 보는 이의 참여를 유도하지만 제작자의 제작공정에서 진행된 조건을 경험케 하는 점에서 한계륜과 한젬마의 공간은 몰입하는 사람과 방관하는 사람이 아닌 관람자를 생산한다고 생각한다. ● 그런가 하면 최성민의 공간은 언뜻 대중매체의 몰입자마저 허용하는 것으로 보일법하다. 피부 밑에 응고된 멍의 색감이 전하는 암시와 그것이 변화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최성민은 보라와 비유하고 있다. 이 비유는 얇은 표면을 벽면과 평행하게 진열한 실루엣으로, 관람자의 그림자를 투사하는 형식으로 그리고 편히 앉은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는 DVD의 형태로 제시된다. 일련의 이들 형식은 대중매체의 외관 유사해 보이기에 관객은 최성민이 조직한 프로그램에 이끌리기만 하면 되는 것으로 자칫 보일 법하다. 하지만 최성민의 프로그램들은 보는 이들의 동조를 유도하지 않고 단지 매체의 작동에만 거친다. 따라서 그 앞의 보는 이들은 최성민의 매체로부터 독립된 채 자신의 삶과 기억 그리고 자신의 실재하는 공간과 끊임없이 비교하고 비판한다.

진훈
최성민
하원
한계륜

이들 15인의 미술가들은 가변적이고 유동하는 대상의 관찰이나 사사로운 느낌과 경험을 통해 보라를 화랑공간에 제시하려 한 것으로 훑어보았다. 이들은 아직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감지되는 것들을 보라로 표현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 과정에 이들이 채택하는 제작 공정과 방식 그리고 전시회의 전략은 ① 세계와 대상에 대한 각성, ② 생각과 느낌의 시각화, ③ 애매함을 활용한 회화공간의 조건 제시 그리고 무엇보다 ④ 관람자의 창출을 위한 매체의 적극 활용으로 요약된다. 이러한 방식은 매체와 관람자, 표면의 개별요소들간의 충돌, 제작공정의 지속과 틈, 이와 같은 대립적 속성을 자신들의 공간에 통합하는 경로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그 경로는 중력에 저항하여 한 지점을 점유하는 관람자가 진지하게 표면을 마주보는 포맷에 관한 설명이다. 결국 이들이 찾아내는 관람자는 변화무쌍한 미래의 도전 앞에 이들이 제작한 매체와 함께 화랑공간에 당당하게 버텨 선 모습이다. "인간 속에 내재한 생명력이 발현되는 활동과정과 그 결과물"이라고 매체에 대한 우명하의 정의 한편에는 "가시적 세계의 존재와 그 운행되는 모습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인식하고 그 본질이 되는 생명에 접근해 가려는" 관람자의 "인식"이 나란히 있다. ■ 이희영

Vol.20030201a | 보라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