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 탐구생활 부록

이부록 Slow Season Project展   2003_0122 ▶ 2003_0204

이부록_합리성에 의해 배제된 다양한 합리성들_300개의 화장실 픽토그래프_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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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3_0122_수요일_05:00pm

제3회 갤러리 창 기획공모 선정전

갤러리 창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Tel. 02_736_2500

Slow Season Project - 2003 탐구생활 부록 ●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 문화적 삶을 이룩한 인간은 더 이상 개체로서의 삶만을 살 수는 없게 되었다. 생명체이기에 생겨나는 모든 현상은 지극히 내밀하고 개인적이며, 다른 사람과 함께 해결하거나 나눌 수 없는 것이다. 그에 반해 문화적인 삶은 공동체적이다. 그래서 문화 안에서 사람은 타자와 만나고, 서로를 나누며, 그를 통해 그 이상의 세계를 이루어간다. 그 뿐 아니라 사람은 서로 갈등하고 증오하거나 질투하며, 심지어 그 어떤 외적인 것보다도 더 잔인한 폭력을 서로에게 저지르기도 한다. 인류의 역사는 서로의 존재 기반을 부정한 기록으로 가득하다. 문화는 이러한 상반된 두 현상을 보여주며, 문화사는 그에 대한 기록을 담고 있다. ● 분명 인간의 문제는 문화의 문제와 상응한다. 우리의 문화를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지금의 나를 이해할 통로를 찾게 된다. 문화의 같음과 다름, 문화로 인해 이루어지는 만남과 소통, 갈등과 폭력의 해소, 문화를 통한 성숙과 깊이는 이러한 통로를 보여준다. 그래서 다시금 오늘날의 문제는 문화에서 시작되고 문화에서 답을 찾아갈 것이다. ● 나는 이부록의 전시회 "Slow Season Project - 2003 탐구생활 부록"을 이런 관점에서 읽고자 한다. 빠름과 느림에 대한 이야기는 그 문제를 바라보는 하나의 계기일 것이다. ● 서구의 근대가 우리에게 던져준 충격과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구 한말 서울과 인천 사이를 달리는 철마를 처음 본 우리의 조상들, 안경과 자명종을 접한 고종의 탄성과 탄식은 우리에게 "서구의 근대"가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왔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가지 예에 지나지 않는다. 해방 이후 이른바 "근대화" 작업이래 우리는 우리의 모든 문화를 그들의 것으로 대신하려 했다. 그럼에도 그 근대는 자본의 크기를 키우는 경제적 진보, 자연과 타자를 대상화하고 억압하는 과학·기술의 진보, 세계를 자신의 이념과 관심사로 통합하려는 정치적 진보로 나타나고 있을 뿐이다. 서구의 합리성은 그리스에서부터 시작하여 2,500여 년에 걸쳐 발전되어온 특정한 이성의 역사, "로고스(logos)"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 모든 것에 의해 사라져버리고 억압된 우리의 문화는 어디에 있는가. 서구의 합리성 때문에 배제되어버린 우리의 또다른 합리성은 어디에 있는가. 자본의 성장을 위해 언제나 "더많이, 더빨리, 더크게"를 외쳐온 경제 이데올로기가 깨어버린 인간다운 세계와 공동체, 사람다운 향기를 간직한 삶은 어떻게 해서 다시금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이곳의 우리는 과연 진정한 우리인가. ● 문화는 국수적이거나 편협한 민족주의적인 것이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분명 옯은 말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명확한 것은 자신의 세계를 엮어내고 성찰해낸 결과로서의 문화는 결코 자기 땅을 벗어나 이룩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 예를 들어 공룡의 이름을 우리말로 붙박이하는 일은 단순히 영어나 라틴어를 한글로 옮기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한번도 본적이 없는 공룡을 형상화하는 작업을 그들의 문화가 아닌 우리의 문화로 이룩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공룡에 대한 체험과 형상을 우리의 생활세계로 옮겨놓는, 지평혼융의 작업이다. 이로써 우리는 생활세계의 체험을 그들의 철학이나 문화가 아닌 우리의 철학과 문화로 반성하고 해석하고 형상화한다. 이러한 작업이 확대되고 일상의 곳곳에 스며들 때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자신의 말과 체험으로 드러내고 나누고, 이로써 그들과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갈 수 있다. 문화는 같음과 다름을 유지함으로써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의 세계를 해석하고, 다른 문화와 만나고 소통할 수 있게 된다. ● 이 전시회는 그러한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미지와 상징은 물론이고 언어와 예술, 학문은 모두 이러한 이해에서 시작된다. 만남과 소통, 성숙과 깊이는 이러한 성찰에 바탕해서야 그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문화적 차이와 동일성, 성찰의 같음과 다름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이 전시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다가왔으면 좋겠다. 좋은 기획을 시도하고 형상화한 이부록에게 이런 기획이 더 나아가고 깊어짐으로써 서로 만나고 나눌 수 있는 마당을 펼쳐가길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축하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 신승환

이부록_지우개를 통한 재해석들_영상 타이포그라피_00:02:30_2003
이부록_Fastfood Ideology; Q- too fast, to ...?_단채널 영상_00:02:30_2002
이부록_excuse me=비켜!, self=물_평면 이미지_2003
이부록_battery=소외경보기_평면 이미지_2003

그림과 글의 형상 ● 이부록의 작업에서 내가 보는 것은 형태들, 특히 흔적으로서의 형태가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그의 이번 작업은 대개 연속체 형태를 띠며, 하나의 연속체에 속하는 '컷'들은 각기 시간적 계기의 한 국면을 가리키는 것 같다. 예컨대 처음에는 사람의 형상들을 담은 컷이 제출되고, 이어서 그 형상들이 흐려진 모습이, 드디어는 처음 본 형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형상, 같은 계기 속에 배치되지 않았더라면 '최초의' 형상과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형상들이 제시되는 식이다. ● 물론 연속체의 마지막 컷에 남아 있는 형상이 처음 것과 유사성을 지닐 때도 있다. 공룡 이름 바꾸기 작업이 그런 경우이다. 이 연속 작업에서 공룡의 모습은 결국 살점과 뼈가 추려져서 (한글)문자로 남는다. 이 과정에서 공룡의 '그림'이 글자 '뿔룡'으로, 즉 도상에서 상징으로 전환되면서도 도상적 유사성을 잃지 않는 것이 흥미롭다. 첫 번째 컷의 형상과 마지막 컷의 형상은 글과 그림의 사이만큼 차이가 나면서 동시에 글자의 모습이 형해(形骸)로나마 공룡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문자는 그것의 통상적 기호작용을 벗어난다. 한글은 '음성문자'란 점에서 문화적 코드와 상징작용을 바탕으로 의미생산을 한다는 것이 상식인데, 이 작업에서 문자 '뿔룡'은 공룡과의 형태적 유사성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내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 찰스 퍼어스에 따르면 기호에는 상징, 도상, 지표의 세 차원이 있다. 한글이나 영어의 알파벳 같은 문자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은 상징적 체계의 작동에 의해서다. 상형문자의 경우에도 상징성이 중요하다. 십자가는 예수가 매달린 형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기는 하지만 '구원' 등의 의미를 얻기 위해서는 기독교의 문화적 코드가 덧씌워져야 한다. 드라큘라가 십자가에 반응을 보이는 것은 기독교 세계에서 만들어진 신화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아마 한국의 처녀귀신이 십자가를 보면 기괴한 코웃음을 칠 것이다. ● 이부록의 '문자' 실험은 이중적 개념 전환으로 진행된다. 한편으로 그것은 문자를 상징성보다는 유사성에 의거하여 이해한다는 점에서 문자가 글이나 회화와 지닌 공통점을 지적한다. '글과 문자는 다르다'는 통념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형해(形骸)만 남았는데도 문자 '뿔룡'은 공룡의 '원래' 모습을 고집스레 간직한다. 이때 문자는 하나의 '기념비'이다. 기념비란 한 번 세워지고 나면 세월의 풍상을 겪을 수밖에 없어서 원래의 모습이 마모되지만 그래도 여전히 물질로서 남아 있다. 문자공룡이 어떤 고집의 화신으로 보이는 것은 세월과 풍상을 버텨낸 형태이기 때문이다. ● 그러나 물론 '원래의' 공룡, '원래의' 사람도 이부록이 형상화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상상이다. 특정한 형상이 구상성을 더 띤 신체를 상기시키는 것은 사실이라도 신체라는 것 자체가 이미 기억과 추상의 산물이다. 누구도 공룡을 직접 본 적이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공룡들은 이미 '진짜'가 아니며, 처음의 컷에 나오는 형상과 끝의 컷에 나오는 형상 모두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질적인 차이가 없다. 여기서 또 다른 개념의 전환이 발생한다.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기호인 글자를 구상으로 볼 것을 권하다가 이제는 거꾸로 구상적 형상 자체가 사실은 추상작용의 결과가 아니냐고 묻는 것이다. ● 글과 그림은 같지 않다(고들 생각한다). 글이 칼을 사용하여 찍어내어 만든 것이라면 그림은 칼보다는 더 부드러운 접촉을 허용하는 도구들로 형상을 만들어낸다. 글의 한자가 '契'인 것으로 짐작할 때 적어도 처음 글을 쓸 때 칼 비슷한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붓은 아마 그 이후에 나왔을 것이다. 그림도 물론 칼로 사용하여 구성될 수 있겠지만, 다른 많은 연장들이 동원되어 형상도 다양할 수 있다. 추상화의 경우에서 보듯이 이때 형상은 상상을 초월할 수도 있다. ● 이부록의 작업에서 그림과 글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가? 그는 그림을 먼저 그린 다음 글을 그리는 순서를 따르고 있다. 이 순서는 상형문자가 형성되는 과정과 유사하다. 먼저 구상성이 높은 사람이나 공룡과 같은 사물의 형상이 제시되고, 동일한 연속체 컷을 통해 형상이 차츰 마모되는 모습을 보여주고, 마지막 컷에 가서는 대체로 사물의 신체가 사라졌거나 불분명해진 모습이 드러난다. ● 그러나 그가 꼭 이런 순서를 밟는 것은 아니다. 「Too A to B」라는 제목을 담은 일련의 작업에서는 세월의 흐름보다는 관심의 깊이에 따라 형상이 구성되고 있다. 사물을 처음에는 육안으로, 나중에는 현미경으로 보는 것처럼 형상화하여 애초의 구상성이 더 큰 구상성을 얻는 듯 보이지만 이 과정은 급기야는 폭파하고 만다. 더 자세히, 더 자세히 보려고 할 때 사물은 더 이상 안정적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사물들의 '적정규모'를 정해주는 경계들이 사라지면서 내파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이다. 다른 작업들이 구체적 인물과 동물이 풍상을 겪으며 외부의 모습이 지워지는 과정을 묘사한다면, 이 작업은 거꾸로 사물 내부의 세부들을 클로즈업시킨다. 처음에는 얼굴을, 다음에는 세포를, 다음에는 DNA를 보여주는 식이다. 물론 DNA에 이르면 추상성은 높아진다. 처음에는 인지 가능해 보이던 이미지가 더 가까이 다가오면서 오히려 인지 불가능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 하지만 원래의 모습은 무엇일까? 과연 원래의 모습은 있는 것일까? 혹시 우리는 평소에 친근한 경험 세계를 원래의 것으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또 다른 원래가 있다며 찾는 것은 아닐까? DNA만큼 명확한 것은 없을 듯한데, 왜 이들 작업에서 그것은 그토록 불분명하게 '보이는' 것일까? ● 문자의 차원에서 작용하는 추상성과 그림의 차원에서 작용하는 추상성은 어떤 공통점과 차이가 있을까? 문자는 고도로 복잡하지만 일관된 코드를 통해서 의미를 만들어낸다. 문자가 의미를 만들어내는 순간 그 문자는 이미 폐기되며, 우리는 지면(紙面)을 철하여 다른 세계에 이른다. 반면에 그림은 가장 추상적일 때에도 형상의 차원에 머물게 하는 것 같다. 그림은 간혹 너무 구상적일 때 우리의 관심을 그림의 물질성에서 벗어나게 한다. 나무를 '너무 잘' 그린 그림을 보면 새들처럼 우리의 관심도 곧장 재현된 나무로 향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추상적인 형상은 우리의 눈길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때가 많다. ● 문화적 산물로서 문형(文形)은 상처의 흔적이고, 아픔의 기억이다. 형태 있는 모든 것은 자르고, 찌르고, 쑤시고, 문질러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온갖 종류의 신체에 상처를 낸 것, 그것이 문형이다. 그림도 글도 그렇다면 상처이며, 이 상처가 세월을 견뎌내며 남긴 흔적이다. 그림에서 상처와 아픔은 어떤 흔적과 기억으로 남을까? 이부록의 작업이 개념적인 것은 바로 이런 생각이 들 때 다시 한번 질문을 비틀며 비판적 성찰을 하기 때문이다. 그의 작업은 컴퓨터 화면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컴퓨터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신체의 참여 없이 만들어진 이미지이다. 신체를 터전으로 삼지 않고 만든 문형에 어떤 상처와 아픔이 가능할까? 여기서 실질적인(virtual) 아픔은 신체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오늘 우리가 맞고 있는 문명이 제기하는 가장 중요한 미학적 질문이 이것이라면 이부록의 작업은 이 질문과 대면하는 셈이다. ■ 강내희

Vol.20030126a | 이부록 Slow Season Project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