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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여작가_김재원_송지훈_이은하_이정희_최진아
관람시간 / 12:00pm∼06:00pm / 월요일 휴관
고도갤러리 서울 종로구 명륜동2가 237번지 아남주상복합 301-103호 Tel. 02_742_6257
공간에 대해 고민해보지 않은 작가가 어디 있을까 싶다. 공간에 대한 고민은 크레파스를 잡은 어린 손끝에서부터 시작되었을 테고 작가가 되면서부터는 어쩌면 그 공간을 탈출하고자하는 의지가 더 강해진 건지도 모른다. 우리가 처음 그 문제-공간과 작업의 관계-를 구체적, 제한적으로 연구하기로 한 건, 물리적으로 전시장을 벗어나거나 혹은 개념적으로 공간을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다같이 모여 전시하지 않고 각자가 선택한 장소에 맞게 작업하고 그 기록들로 여기 고도에서 만나게 된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일까? 중간중간 이어진 토의는 적잖은 혼란을 주었다. 어떤 작가에게는 장소의 아우라는 매우 컸고, 어떤 작가에게는 장소는 흥미있는 전제가 되지 못했고, 어떤 작가에게는 그 아무리 넓은 공간도 결국 사적인 공간이 되었다. "괜찮다"라는 긍정의 의사표명 혹은 혼자 내뱉는 감탄사가 바로 이 지점에서 나왔다. 공간은 마치 객관적 서술처럼 나열되어있고 나는 거기를 배회하는 객체라고 생각했지만 점점 더 공간은 영원히 소유할 수 없지만 매번 사적이고 내면적인 공간으로 전환된다는 것. 우리는 그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이 그 어떤 결과에 대한 선언이 되기는 원치 않는다. ■
우리의 삶에는 너무도 많은 '나'가 있다. / 저마다의 인격은 우리의 본체가 아니라 우리가 걸치고 있는 무엇이다. / 우리 몸은 우리가 아니다. / 우리 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우리다. / 우리 생각 또한 우리가 아니다. / 우리 생각에 지침을 주는 것이 우리다. / 우리의 감정은 우리가 아니며 우리 감정을 느끼는 것이 우리다. ● 도대체 이 '나'는 무엇이며 누구일까? 나는 내 몸을 '나의 것'이라고 부른다. 나는 내 몸 속에서 살지만 몸이 곧 나는 아니다. 내 삶에서 내내 확대되고 중심을 이루는 이 '나'는 무엇이며 누구일까? 나는 삶이라는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는 부분들이다. 유일한 실제는 전체성(oneness)이지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개체로서의 자의식이다. 몇몇 사람들만이 그 자의식에 눈을 돌리지 몇몇 사람들만이 그 자의식에 눈을 돌리지 않거나 무관심할 뿐이다. 나는 과연 자기중심(self-centered)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나의 세계에서 어떻게 이 자기중심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 김재원
물-이미지-영상 ● 투명한 물 속에 담겨진 '레드카드를 든 아저씨'인형은 사각의 물병 속을 돌고 있고 물의 굴절로 반사되어 거울처럼 비춰진 또 다른 인형의 모습들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마치 물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나르키소스처럼.. 투명한 물을 통해 대상을 바라보지만 빛의 반사들로 생겨난 또 다른 허상들의 이미지들의 뒤섞임 속을 배회하는 실제에 '레드카드를 든 아저씨'가 있다. ■ 이은하
나는 작업을 하면서 모든 것을 게임의 관념으로 보고자한다. 살아가고 있는 것 그 자체, 작업을 하는 행위/과정을 모두 게임으로 전치한다. 일찍이 예술에서 개임의 대가였던 뒤샹(Marcel Duchamp)은 게임을 예술의 위상으로 끌어 올렸지 예술을 게임으로 비하한 것은 아니다. 뒤샹은 "나는 미술과 '체스(chess)'에서 몇가지 공통점을 본다. 당신이 체스 게임을 할 때 이기건 지건 그것은 어떤 것을 디자인 하거나, 어떤 기법을 구성하는 것 과 같다'라고 했고, 쟝 팅겔리(Jean Tinguely)는 "예술과 놀이의 관계: 노는 것은 예술이다. ― 따라서 나는 열심히 논다."라고 했다. (뒤샹과 팅겔리 모두 'likening play to art but not art to play'로 비유했다.) 내가게임에 첫 관심을 갖게된 것은 게임 도구들이 갖는 조형적 특성들이었다. 게임을 구성하는 도구들 ― 카드놀이(playing card)나 체스(chess) 그 외에 다른 게임도구들은 오랜 세월을 거쳐 여러 지역, 시대, 문화를 바탕으로 발전해온 것들로서 , 그런 다 문화적 배경으로 인해 게임 안에는 어떤 형태로든 전쟁, 전술, 사회, 역사, 운명, 점술, 마술이 존재하고 있다. 나는 게임의 규칙을 바꾸고,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을 무시하는 내 자신의 게임들을 진행 시켜왔다. (이기거나 질 수 없는 게임, 혹은 아예 승패가 존재하지 않는 게임 등). 그러나 이 게임들은 게임을 위한 게임이 아니라 게임에 대한 게임(metaㆍgame) 게임에 저항하는 게임(game against game), 게임을 넘어선 게임의 전치 ― 게임 속의 게임/ 게임 밖의 게임. 게임 진행에 필요한 핵심적 요소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요소들을 첨가해서 다른 방식의 게임 만들기. 즉, 게임의 룰(rule)을 해체하고 재구성하기 등의 방식으로 게임들을 시각화한다.―visual puzzle, conceptual puzzle―게임의 현상을 전도시키는 게임이나, 언어 장난 게임, 흔적 게임, 공간의 위상 게임 등의 작업들을 해왔다. 기존 게임의 형태들을 응용한 게임도 있고, 내가 새로 만든 게임들도 있다. 게임이기에 어느 모로든 즐거울 수 있어야한다. 그러나 게임을 재구성함으로써 게임의 즐거움조차 재맥락화한 이런 경우 즐거움은 또 다른 유형의 즐거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나는 모든 사람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게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관객의 비중을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떤 형태로든 게임을 즐길 수 있으면 된다. 그러나 나의 게임들이 어떻게 생활 정서나 의미를 반영하고 조응, 반영할지는 즐기는 방식의 몫일 것이다. ■ 송지훈
'전시장에서 휴식하기' ● 전시장 한쪽 공간에 테이블과 의자를 놓아두는 경우가 있다. 그곳은 전시를 하는 작가나 전시장 방문객이 잠시 휴식하거나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마련된 공간이다. 나는 이 휴식공간에 놓여진 테이블에 내 작업을 설치하게 된다. 설치, 전시는 8월 10일에서 8월 19일 사이에 이루어졌는데 주로 인사동과 사간동의 휴식공간이 마련된 전시장을 찾아다니며 작가들과 전시장 관계자의 양해를 구한 후 테이블에 테이블 보 작업을 설치한 후 사진을 찍어 기록하였다. 전시장에 테이블과 의자를 갖추고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갤러리는 평면작업이 전시된 공간이 대부분인데 입체나 설치작품을 전시하고 있는, 내부 공간을 사용하는 전시장에는 거의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자신(들)의 전시공간에 내 작품을 설치하는 것을 꺼리는 작가들이 일부 있었지만 내 작업에 대해 흥미를 보이며 적극적으로 공간을 제공한 작가들을 만나는 일은 즐거운 일이었다. 가능하다면 설치하고 전시까지 이루어져서 관람객들의 반응도 살피고 싶었지만 대부분은 잠시동안의 설치만 허락 받아서 기록으로 남기는 것에 만족했다. 전시장에 설치된 내 작업으로 인해 새롭게 변화된 전시공간을 보는 것은 재미있었는데 관람객의 반응을 볼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시간동안 전시가 이루어지지 못해 관람객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하고자 했던 의도는 제대로 실현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자신(들)의 전시 중에 발생한 돌발적인 상황에 대한 전시 주체자, 그(들)의 반응을 보는 것은 나로서는 흥미로운 일이었다. 일부 작가는 자신(들)의 작품과 내 작업이 같은 공간에 놓여짐으로 해서 발생할 상호작용에 대해 의식하기보다는 일방적인 피해를 의식한다. 나의 작업 설치가 전시중인 자신의 작품감상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작가들의 피해의식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작품 외적인 것을 철저히 배제하는 전시장의 시각적 배려를 작가들이 반복하고 있다고 해야할까? ■ 이정희
눈을 감은 후에도 떠오르는 잔상은 귓속의 달팽이관에서 맴돈다. 많은 경우 그것은 아름다운 이미지가 아닌 소음으로 기억된다. 소음은 어떤 기억보다 강하다. ■ 최진아
Vol.20030111b | 괜찮아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