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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1225_수요일_04:00pm
덕원갤러리 2층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02_723_7771
한선현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마치 다트게임을 하듯 자신의 작품을 향해 화살을 던지게 하였다. 나무부조인 작품에는 당연히 놀이의 흔적인 상처가 남아있다. 비록 관람객들이 표적으로 삼은 것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그 속에 표현된 동물이라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보존'되어야 할 작품을 향해 화살을 던질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쾌감을 느낀다. 가까이 다가서서도 만져서도 안될 예술작품을 향해 한정적으로 허락된 '살해행위'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는 이 기막힌 역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의미가 내재해 있다. ● 첫째, 오로지 디지털 미디어를 이용해 제작된 작품만이 관람객과 상호작용 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적인 재료기법을 활용하고 수공의 공정을 거친 작품 또한 그것을 기대하고 있다는 작가의 생각에 따라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방부처리되고, 박제되며 영원불멸하는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참여에 따라 새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작가는 사람들을 수동적 관람자가 아닌 놀이의 참여자로 끌어들임과 동시에 과녁 속에 표시된 부위를 맞춘 사람들에게 그가 제작한 상품을 나눠주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그는 관조적이면서 동시에 신비로운 분위기조차 풍기는 전시행위를 하나의 오락으로 바꿔놓은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전시에 대해 우리가 지닌 믿음을 위반한다.
물론 한 예술가의 지적, 물질적 노력의 산물인 작품은 안전하게 보존되어야 한다는 믿음에 대한 도전은 장 팅겔리(Jean Tingeuly)의 자기파멸적인 「뉴욕에 바치는 경의」나 혹은 주변환경의 변화에 따라 형태의 변형이 일어나는 요셉 보이스(Joshep Beuys)의 「비계덩어리」 등에서 이미 시도된 바 있고 많은 설치작품 또한 이러한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한선현의 작품을 새삼스러운 것으로 여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차원은 분명히 다르다. 스스로 파괴되도록 프로그래밍된 것이나 사람의 접촉이 아닌 온도의 변화에 따라 변형이 일어나는 작품과 그의 작품이 지향하는 차원은 분명히 다르다. 과녁에 관한 한 무엇보다 먼저 미국 네오 다다의 한 사람인 재스퍼 존스(Jasper Johns)의 「네 개의 얼굴과 표적」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의 작품은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기성품처럼 애매모호함과 역설을 그 특징으로 한다. 존스의 과녁은 화살의 침투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기완결적 작품으로 현존한다. 그러나 한선현의 작품은 비록 제한된 사람에게만 화살을 던지도록 허락된 것이라고 할지라도 과녁을 명중시키고 부상으로 선물을 받는 과정 자체가 작품의 일부이다. 당연히 화살을 던지기 위해서는 작가가 정해놓은 적은 액수의 참가비를 지불해야 한다. 여기에서 한선현의 과녁은 존스의 작품이 지닌 애매모호함과 성격을 달리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미술의 무거움에 대한 유쾌한 도발, 그러나 그 작은 모반은 또 하나의 의미를 향해 열려 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두 번째 의미에 대해 주목하게 된다. 그의 과녁은 일종의 이미지로 표현된 덫이다. 인류의 조상들에게 동물사냥은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활동이었다. 오늘날, 사육된 동물은 더 이상 사냥의 대상이 아닌 '재배'된 먹이이다. 사냥이 스포츠나 레저가 됨으로써 동물은 인간의 생명보존을 위해 희생되는 것이 아니라 쾌락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지점, 그의 작품은 동물사냥의 쾌락을 누리고 있는 인간의 잔혹함 속으로 파고든다. ● 우화적인 그의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을 염소로 비유하고 있다.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두 마리의 염소는 이솝우화와 같은 곳에서 나오는 이야기지만 그는 그것을 통해 사소한 것에도 사생결단을 내려는 듯 목숨을 거는 현대인들의 피폐한 마음을 풍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염소를 통해 자전적 이야기들을 풀어나가고 있다. 이탈리아 유학시절 당한 교통사고를 그는 자동차 앞에 쓰러져 있는 한 마리 나약한 염소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구름을 낚고 있는 한가롭고 목가적인 염소로부터, 염소박사, 선탠하는 염소, 술 취한 염소 등 그의 작품은 대부분 동물을 통해 인간의 삶을 해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주목해 볼 때, 그가 사냥의 형식을 빌어 작품을 파괴하는 것은 단순히 놀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에 동참하거나 구경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 우화적인 작품을 동시에 봄으로써 동물은 사냥이나 살해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을 아끼는 것처럼 보호하여야 할 생명체임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은 얼룩말과 동일시된 작가 자신의 모습을 통해 거듭 확인된다. 부조로 표현된 얼룩말과 환조의 인간은 같은 무늬로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아닌 동등한 대상이 된다. 얼룩말에게 있어서 얼룩무늬는 자기보존을 위한 일종의 위장이자 또한 다른 성의 동물을 유혹하기 위한 장식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간에게 얼룩무늬의 옷을 입혀놓은 것은 무슨 이유일까? 한때, 자유롭게 들판을 뛰어다녔을 얼룩말은 이제 특정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가련한 동물이 되고 말았다. 인간에게 신기한 구경거리인 얼룩말은 고향을 상실한 뿌리뽑힌 존재로서의 인간을 상징한다. 마치 정신병원에 감금된 환자나 입을 법한 옷, 사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도록 결박하고 있는 옷을 입은 인간은 동물원의 우리에 갇힌 얼룩말의 운명과 별반 바를 바 없다. 비약컨대, 얼룩무늬 신사 또한 겉으로 드러난 패셔너블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영락없이 죄수를 떠올리게 만든다. 만약 그렇다면 얼룩말은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것이 설득력을 지닌다면 동물사냥은 결국 인간사냥과 동일시된다. 우리가 과녁을 향해 조준하여 화살을 던지는 순간 그 화살은 우리를 향해 날아온다.
우화가 지닌 비상한 진실, 한선현은 그것을 빌어 우리에게 이야기를 걸고 있다. 앞에서 말한 이미지의 덫이란 바로 우리를 그가 의도한 세계 속으로 참여하도록 유혹하는 미끼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 미끼에 걸려들지 않도록 걸어놓은 경고이기도 하다. 그는 폭력의 참혹함에 대해 말하면서도 그것을 잔혹한 방식이 아닌 해학과 풍자의 언어로 풀어감으로써 우리 스스로 일종의 정신의 해방을 누릴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한다. 이야기로서의 조각이 지닌 넉넉함이라고 할까. 어떤 점에서 진부해질 수도 있는 일상적이면서 소박한 내용 속에 깃들인 평화와 공존에의 요청, 그의 작품은 적자생존이나 약육강식이 아니라 존재의 고귀함을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상호존중의 정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될 사실은 그가 유희로서의 사냥의 방식을 빌어 그것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있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한 평화주의자의 소박한 의견개진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최태만
Vol.20021228a | 한선현展 / HANSUN HYUN / 韓先鉉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