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2_1107_목요일_06:00pm
참여작가 방병상_박경택_이윤진_이종명_최운연
포스코 미술관 서울 강남구 대치4동 892번지 포스코센터 서관 2층 Tel. 02_3457_0793
아마존에서 검색을 해보면 일본의 사진가들 책을 많이 찾을 수 있다. 아라키 노부요시, 히로시 스기모도, 모리야마 다이도, 미야모도 류지 등 한 십여명은 넘는 것 같다. 그런 것을 보면서 한국 사진가의 책은 언제 쯤 아마존에서 살 수 있을까 생각을 해 보았다. 한 십년간은 없을 것 같다. 일본의 사진가들이 전세계적으로 어필하는 이유는 다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스기모도의 포트레이트는 그냥 포트레이트가 아니라 문화적 구성물에 대한 연구이고, 미야모도의 폐허사진은 건축물의 순환과정을 보여주고 있고, 그런 식이다. 세계적인 미술사학자이자 하버드대 교수인 노만 브라이슨이 스기모도의 사진집에 글을 쓴 이유도 그가 분명한 개념을 가지고 사진을 찍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념이란 것이 사진에 어떤 미리 설정해 놓은 아이디어를 주입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물을 대할 때 일정한 태도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 세상의 사물들을 페티쉬로 대하는 사진가는 사물을 욕망의 대리물로 독특하게 해석할 것이다. 건축물에 대한 개념이 있는 사진가라면 폐허를 단순히 슬프게 사라지는 어떤 감상적인 이미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순환과 변화 과정의 한 단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렇다면 한국의 사진가들은 무엇을 가지고 작업하고 있는가? 그들은 정서와 감각을 가지고 작업한다. 아마 나름대로는 개념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극복되지 못한 감상적 정서와 잘못 이해된 사진적 표현의 문제에 가려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이종명, 이윤진, 박경택, 최운연, 방병상의 사진에 개념적인 측면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들이 작업하는 대상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묘사하는 사진의 능력과 관점에 대해서 분명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종명이 찍은 건축물들은 베를린이나 뒤셀도르프 같은 독일의 도시들을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 본 모습이다. 그런 모습을 그는 같은 네가티브를 겹쳐 놓아 자신만의 조형으로 만들고 있다. 그의 사진은 일견 혼란스러워 보이지만 그것은 도시적 조형물을 해석하는 그 만의 방법이다. 즉 도시의 콘크리트가 만들어내는 정체성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인 것이다. 콘크리트의 정체성이란 무엇일까? 그에 따르면 독일 사람들은 건축물 하나하나에 대한 특별한 자기 나름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즉 각각의 건물들이 나름의 주소를 가지고 어떤 장소에서 특이성을 가지고 서 있듯이, 저 건물은 나에게는 어떻게 다가오고, 저 건물은 이러이러해서 의미가 있고 아름답다는 식의 나름의 해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종명은 바로 그런 층위를 건드린다. 사람마다 건축물에 대한 느낌이 다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건축물이 가진 다층적이고 개별적인 정체성이라는 것이 그의 작업의 전제이다. ● 사실 그런 인식은 한국사람들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많은 사람들이 종로타워는 흉측하고, 63빌딩은 엄청나고, 시골의 모텔은 괴이하다는 식의 미적 판단을 내린다. 단지, 작가들이 그것을 개념화하여 표상하지 않았을 뿐이다. 개념화되고 표상될 때, 건축물들은 의미 있는 것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원 저자인 건축가가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의 켜들을 뒤집어 쓰게 된다. 건축물에 또 다른 의미의 켜를 뒤집어씌우는 것, 그것이 이종명의 사진이 가진 힘이다.
그런 점에서는 이윤진의 사진은 아무런 해석도 하고 있지 않은 것 같지만 어떤 건축물에서 자신이 관심 있는 부분을 주목하여 그 구조와 질감을 세밀하게 찍어낸다는 점에서는 아주 개념적인 작업이다. 이윤진이 찍고 있는 것은 건물의 특정한 구석인데, 그곳은 공간이 겹치는 곳이다. 건물의 구석이란 사실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거기서는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윤진의 사진이 보여주듯이, 사람들은 구석에다 자전거를 놓기도 하고, 나무를 심기도 하고 빨래를 널기도 한다. 그리고 이 사진이 찍히기 훨씬 전, 혹은 그 후에 어떤 연인들은 거기서 키스를 할지도 모른다. 구석이기 때문에 아무 일도 안 일어날 것이라고 단정들을 할 뿐이다. 이윤진의 사진에 찍힌 구석은 무언가가 일어나는 공간으로 새롭게 해석된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사진가의 주목을 받는다는 일이다. 그리하여 구석은 의미 있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난다.
사실 그런 점은 박경택의 사진에서도 무척 중요하게 다가오는데, 그의 사진에 나타나는 소비의 공간들은 사람들이 옷을 입듯이 그냥 입고 있는 공간이며, 주목이나 해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론가나 작가는 그것을 키치적 공간이라고 부르지만 대중은 그게 키치적인지 뭔지 인식도 하지 못한다. 그저 '멋진 곳이군'하며 애인의 팔짱을 끼고 지나갈 뿐이다. 그 공간도 소비자들의 반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즐기고 돈을 쓰기만을 원할 뿐이다. 사진가가 그 공간에 주목한 순간, 이미 그 속성은 바뀌어 버린다. 공간을 이루는 요소들, 벽, 기둥, 에스컬레이터, 조명, 장식물 등 온갖 요소들은 어떻게 소비를 돕고, 그 자체로 소비될 수 있도록 구성되는지 관찰되고 해석되기 시작한다. 최근 들어 한국의 사진가들이 이런 공간에 주목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것이 더 이상 일방적으로 소비되기를 그치고 해석의 스코프에 들어오기 시작한다는 반가운 징표이다.
최운연의 사진은 스튜디오에 과일을 정물의 형태로 공간 속에 매달아 놓고 찍는다는 점에서 이들의 작업과는 다르지만, 즉물적인 방법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가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식물이라는 유기체이지만, 마치 콘크리트나 금속으로 된 건축물이 공간 속에 배치되듯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유기체가 가진 무기물적 속성을 탐구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이런 식의 즉물적인 접근은 사실 한국사람들에게는 익숙한 것은 아니다. 한국사람들은 뭔가 상징적인 것, 은유적인 것, 우회적인 표현을 좋아하지 사물이 생경하게 다가오는 것을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사물들은 생활 속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가게 간판에서 볼 수 있는 울긋불긋한 색과 요란한 형태의 악취미로 다가오고, 퇴영적인 발라드로 다가오기도 한다.
방병상은 사진을 통하여 도시를 프레이밍 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도시란 사람들이 사는 곳이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도시의 공간을 어떻게 차지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들은 나름의 목적으로 도시의 공간을 살아가지만, 때로는 그 목적에 꼭 맞지 않는 정처 없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게리 위노그랜드의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런 모습이다. 하지만 방병상의 도시와 사람들은 그 정도로 정처 없지는 않고,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방병상은 그 특정함을 사진을 통해 규정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특정함은 그들 나름대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사진의 프레임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다. 사실 사진 속에 나오는 특정회사 로고나 글자는 대부분의 도시를 사는 사람들은 기호의 홍수 속에서 크게 주목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호들은 어느 틈에 사람들의 지각 속으로 삼투해 들어와 망막에 심어져 있다. 사람들은 그런 사실을 잊고 살아갈 뿐이다. 도시 속의 기호를 그 망각에서 구해내는 것, 그것이 방병상의 프레임의 역할이다. ● 다섯사람의 사진가들의 사진에서 개념을 가질 것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사물을 재배치하는 과정에 개입하는 순간을 통해서이다. 사물을 회피하여 감상으로만 대할 때, 언젠가는 사물의 포로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가 아직도 미망(迷妄)과 혼돈에 빠진 한국 사진의 분위기를 바꾸는 작지만 큰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이영준
Vol.20021108a | FOTOFINISH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