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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1108_금요일_07:00pm
스페이스 사진 서울 중구 충무로 2가 52-10번지 고려빌딩 B1 Tel. 02_2269_2613
병사의 얼굴, 우리 시대의 압축 파일 ● 나는 아직도 그 숫자를 외운다. 1306으로 시작되는 그 여덟 자리 숫자. 군번. 집 떠나 살던 20대 후반에는 제 생일도 찾아먹지 못하던 위인이 군복을 벗은 지 어느덧 20년째인데도 군번은 물론 입대일과 제대한 날짜를 기억하고 있다. 스무 살이던 그해 3월7일, 나는 논산훈련소 입구에서 더벅머리를 깎았고, 스물두살이던 그해 8월10일, 나는 '따블백'을 메고 서울로 복귀했다. ● 사진가 이규철이 내 앞에 펼쳐놓은 흑백 사진을 보는 순간, 나는 훌쩍 22년 전, 그 봄날로 돌아가 있었다. 특히 내무반 바닥에 '원산폭격'을 하는 사진이나, 바짝 군기가 들어 있는 신병의 굳은 표정, 철조망 앞에서 편지를 읽는 모습, 담배를 피우거나 샤워를 하는 장면을 나는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 거기 내 스무살 푸른 시절이 그대로 담겨 있었던 것이다. ● 아, 그때 나에게 쏟아지던 고참들의 쇳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대가리 박아!" "어쭈, 동작 봐라" "노래 일발 장전" 전투화를 닦던 구두약과 '짬밥'(혹은 식당) 냄새가 화약 냄새보다 더 생생한 까닭은 무엇일까. ● 생각난다. '이빨을 보였다간 맞아죽던' 신병 시절, 작대기 두 개가 얼마나 부러웠던가. 제대 한 달을 앞둔 고참은 그야말로 무슨 할아버지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매번 속아왔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6학년이 얼마나 커 보였는지. 중1 때는 중3 형들이 어른처럼 보였고, 고1 때는 고 3 선배들이 세상을 다 아는 성인(聖人)처럼 보이지 않았던가. 그러나 정작 그 나이에 이르러 보면,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 이같은 '배신감'이 어디 나 혼자만의 체험이랴.
사진이 일상화한 이후, 사람들은 저마다 통과의례를 사진에 담아왔다. 첫돌, 입학과 졸업식, 결혼식, 회갑연 등을 기록한 사진들은 각자에게 중요한, 아니 결정적인 알리바이이다. 그 사진 속의 주인공들은, 간혹 삶이 무겁고 구차스러울 때 그 사진을 꺼내 들고, 그때 가졌던 꿈과 각오를 떠올리며, 다시 불끈 주먹을 쥐곤 한다. ● 통과의례 사진이 갖고 있는 힘은 그 사진이 갖는 일회성과 개인성 때문이다. 통과의례는 언제나 단 한 번이고, 사진 속의 인물은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다. 저마다 주인공이다. 통과의례 사진은 개인사의 압축 파일인 것이다. ● 군대에서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규철의 사진이 갖고 있는 의미와 기능은 각별하다. 이규철의 군대 사진은 분명 한 사람의 젊은 병사를 찍은 사진이다. 하지만 그 사진의 얼굴, 실존하는 유일무이한 피사체는 지워진다. 그 자리에 그 사진을 보는 관객의 얼굴이 들어선다. 이규철은 '한 사람의 군인'을 찍었지만, 대한민국의 성인 남성의 초상을 찍은 것이다(영화 『친구』를 본 386세대들은 모두 '저건 나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야'라고 말한다고 한다). 사진의 사회적 기능이 이렇게 큰 경우란 흔치 않다.
군대에서 사진병으로 근무했더라도 관심을 두지 않았을 병영의 일상을 포착하고 그것을 오래 간수해온 이규철의 작가 정신은 빼어난 것이다.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이상한 병사(그는 사진병이 아니었다)에게 총 대신 카메라를 허락한 지휘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 지휘관이 없었다면, 아마 한국 사진 역사는 아직도 제대로 된 '병사의 얼굴'을 소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 대권 후보 아들이 병역을 기피했느냐, 안 했느냐, 허 모 일병의 죽음이 자살이냐, 타살이냐, 양심적 병역 거부를 수용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등의 문제를 놓고 매체들이 연일 시끄럽다. 하지만 나는 이규철의 이번 사진전 옆에다 위와 같은 사회적 논란을 끌어다 놓고 싶지 않다. 시대적 맥락은 저 사진 속의 젊은 병사는 물론, 여기 이 중년의 관객의 내면에 이미 작동해 왔거니와, 좋든 나쁘든 이른바 '군사문화'는 우리들 무의식의 차원으로까지 내려가 있지 않은가. 오늘 밤 꿈속에서 '기상!' 소리를 듣고 벌떡 일어날지도 모르겠다. ■ 이문재
Vol.20021104a | 이규철展 / LEEKYUCHEL / 李圭哲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