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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탈야외미술관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 10-2번지 Tel. 031_840_5791
야생의 외침을 찾아 떠난 짧은 여행기 ● 참으로 오랜만에 장흥을 찾았다. 『2002 야생동물들』전에 글을 써달라는 고마운 부탁이 아니었다면, 요즘의 분주한 일상 속에서 야외미술관에 들러 가을정취를 만끽할 여유를 가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 그런데...'야생동물'들이라니. 그냥 '동물'도 아니고.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까..., 잠시 고민하다 '야생동물'이란 말이 주는 생경함과 진부함을 동시에 느꼈다. 매일같이 동식물들의 사체를 먹으며 살아가고, TV에서는 야생동물들의 삶을 볼거리로 만들어 틀어주고, 특이한 애완동물을 가꾸는 취미생활도 널리 퍼져있지 않은가. 물론 이들 중에서 엄격하게 '야생'이라고 할 법한 것은 TV 다큐멘터리 뿐이겠지만. 매체를 통해 접하는 야생동물들은 '구경거리'로 가공되어 우리 앞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에,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이종(異種)의 생명체에 대해서 진지하게 접하거나 생각해 본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그 중 한 사람이고. 「2002 야생동물들」은 그런 것들을 환기시키는 전시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미술관으로 들어섰다. 눈앞에 펼쳐진 오래된 정원같은 조각공원 안에서 원래 있던 작품들 사이사이에 숨어있을 '야생동물들'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즐거움을 기대하며 안경을 쓰고 수첩을 꺼냈다.
맨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오른쪽 네모반듯한 잔디 위에 놓여 이쪽을 위협하는 듯 노려보고 있는 한 마리의 소였다. 이희택의 작품 「소」다. 흔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소' 라면 순한 눈망울을 한 농촌의 일꾼을 떠올리는데, 이건 싸움소다. 그것도 우리나라의 소가 아니라 스페인 투우에 등장하는 소. 육중하게 솟아오른 등허리가 살기를 품은 듯 잔뜩 위험해 보인다. 동물을 자연으로부터 데려나와 생존본능을 억지로 자극하고 그 마지막 순간까지 구경거리로 삼는 사람들. 몸뚱이 전체로 인간에 대한 증오심을 드러내는 녀석이 무서워 얼른 돌아섰다. ● 관리실 벽면에는 노주환의 작품이 보인다. 왼쪽 라이팅 박스에는 동물의 사체를 주로 먹고사는 대머리독수리들이 앉아있고, 그 오른쪽 아래에 초식동물로 보이는 주검이 놓여있다. 담벼락의 담쟁이와 하나 다를 것 없는 자연의 풍경이다.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 생명의 순환, 야생을 지배하는 것은 어느 생명에게나 예외 없이 공평하게 주어진 생과 사의 비정한 질서다. 이 순환의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온 것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뿐이다. 이 작품의 제목 「야생동물은 스스로를 동정하지 않는다」처럼, 나약한 인간의 지나친 자기연민이 생태계의 순환을 어지럽히고 인간을 더욱 자연에서 멀어지게 한다. ● 낮은 계단을 올라 왼쪽으로 올라서면 나무 아래에 투명한 반구들이 묻혀있다. 나무그늘에 숨어 그것도 땅 속에 묻혀서,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보았던 동물들이 그 속에서 보호받고 있었다. 그들의 세상은 미니어처 야생동물보호구역이다. 나는 그들을 볼 수 있으나, 만지거나 가까이 갈 수 없다. 인간의 손길은 그들을 변질시키고 멸종시키기 때문에 접근불가능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이 작품은 이유미의 「잃어버린 세상-꼭꼭 숨어라」이다. 제목 그대로 꼭꼭 숨어서만 지속될 수 있는 야생동물들의 세상이 거기에 있다. ● 그 옆의 큰 나무 위에 있는 노란 빛깔의 거북이 같은 동물은, 이성실의 「무제」다. 마침 단풍이 들기 시작해 계절이 만들어준 보호색을 부여받은 거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거북이가 나무 위에 오를 수 있었던가? 물과 가까운 곳의 지면에서 살아가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방수천과 나무 위라는 위치전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연의 질서가 무너지고 동물들의 생체 메카니즘 또한 혼란스러워지면서 모든 것이 본래적인 모습을 잃어간다. 저 거북이도 그래서 나무 위에 살고 있는 것일까? 아니, 다시 생각해보니 저것이, 단단한 껍질도 없이 부드러운 몸체를 지닌 저것이 아직 거북이였던가? ● 숨지 않고 당당하게 인간의 생활에 귀화했다고 여겨지는 동물들도 야생성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회색 담 위에 도시의 거주자가 되어버린 고양이들이 있다. 배성미의 「고양이의 기억」이다. 아파트나 담벼락을 연상시키는 구조물들 사이에 당당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검은 실루엣의 고양이들. 도시와 고양이들은 떼어낼 수 없는 한 덩어리이다. 우리는 도시를 우리 것으로 그들을 골칫거리로 여기지만, 실은 도시 또한 우리들이 무단으로 점유 사용하고 있는 공간이라는 것은 생각지 못한다. 인간만이 지구라는 행성의 중심이고 주인은 아니기에 다른 생물들과 어떻게 하면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이 작품의 모든 문들은 열려있다. 인간과 자연 사이에도 그렇게 열린 문이 존재했으면 좋겠다.
오른쪽 잔디밭을 따라 걷다 보면 가운데쯤에서 이은경의 「꿈꾸는 색(色)」과 만난다. 환형동물처럼 길쭉하고 둥그스름한 외관을 지닌 녹색과 적색의 선조작품이다. 녹색부분이 잔디에서 솟아오른 것처럼 보이는 반면, 적색부분은 바닥에 깔려있는 받침 위로 살짝 띄워져있다. 녹과 적, 자연과 문명, 연결과 단절, 하강과 상승, 이것은 무슨 색의 꿈일까? 녹색이 꿈꾸는 적색일까, 적색이 꿈꾸는 녹색일까. 어느 한 쪽이라고 쉽게 단정하고 싶지 않은 것은 아직은 보완의 여지가 있다고 보는 까닭이다. ● 나지막한 돌무더기 위에 커다란 날개 한 쪽이 솟아오른 것이 김남운의 작품 「추락하는 곳에 날개가 있다」이다. 날개는 창공을 자유로이 가르던 비행을 기억하고 다시 날아오르려는 듯 펼쳐져 있지만, 구석구석 녹이 슬고 구멍이 뚫린 날개의 비상은 현재로서는 불가능해 보인다. 잊혀진 돌무덤처럼 버려진 인간들의 시원이 회복된다면 그 날개는 다시 한 번 날아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겨있는데, 저쪽에서 한 부부가 데려온 아이들이 뭐라고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 차기율의 작품 「무제」를 보고 무언가 이야기하고 있다. 가보니 두 칸으로 나누어진 작은 우리모양의 상자 한켠에는 말라가는 검은 나뭇가지가, 다른 한켠에는 낙엽들을 덮고 있는 듯 앉아있는 백호가 들어있다. 상자의 내부는 옴쭉달싹 할 수 없을 정도로 좁고, 위를 덮고 있는 철망은 튼튼해 보인다. 백호의 보송보송한 털가죽은 곧 나뭇가지나 낙엽과 마찬가지로 생기를 잃어버릴 것처럼 안타깝다. 자연보호와 생명존중을 외치고 있는 인간이 자연을, 생명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그 실상을 고발하고 있는 작품이다. ●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섰더니 잔디밭 한 가운데 놓인 양태근의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제발 좀 건들지 마세요!」라는 제목이 흥미롭다. 언뜻 보기에는 온순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어 예쁘다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키는 작품은, 몸 부분이 굵직한 가시철망으로 된 초식동물의 형상이다. 온순한 초식동물조차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전쟁을 치러야 하는 현재 자연계의 위기와 인간의 횡포를 고발하고자 했다는 작가의 변이 있었다. 주변에 서 있는 육중하고 엄숙한 조각품들 속에서 경직된 자세로 서 있는 녀석의 애처로움이 이제서야 눈에 들어온다. ● 인간 이외의 생물들을 위협하는 인간의 파괴력으로부터 인간 자신은 안전할 수 있을까? 이동호의 작품 「lee and..」는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사격장의 표적처럼 얄팍한 판자로 만들어진 인간 형상들은 풀밭 위에 펼쳐진 하늘처럼 곱게 채색되어 있지만 실상 가까이 가서 보면 전신에 총알 구멍이 나 있다. 인간은 문명을 만들어내고 그 속에서 안전하다고 믿으며 마음껏 이기심을 발휘하고 있지만, 자연에 이별을 고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알량한 위상은 필연적으로 위태롭고 연약한 것이다. 스스로의 발목에 칼질을 하는 꼴이다. 상처의 아픔을 알게 되는 것은 쓰러진 다음일 것이다. ● 「함정」이라는 제목이 붙은 임승오의 작품은 어릴 적 많이 보던 덫의 일종이다. 먹이를 놓고 그 위에 언제든지 덮쳐누를 수 있는 상자 같은 것을 교묘하게 괴어놓은 것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함정'이라는 제목이 없더라도 옆으로 쓰러진 밥그릇과 사슬에 매어달린 돌덩어리, 물이 고인 스텐레스 대야의 이미지는 '위험'이라는 의미를 직접적으로 전해주기에 충분하다. 이것이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 함정인가를 생각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 가운데 피라미드 모양의 뼈대만 남은 건물 안에는 장욱희의 「홀로새의 공룡알」과 연기백의 「동(動)」이 마치 한 작품처럼 설치되어 있다. 일견 원시신앙의 표식처럼 보이는 작품들이다. 중앙에 매달린, 나뭇가지로 만들어진 구가 장욱희의, 이를 숭배하듯 스톤헨지의 거석들처럼 원을 이루어 세워져 있는 나무기둥들이 연기백의 작품이다. 가장자리의 나무기둥마다 굵은 철사로 동물의 움직임이나 형태를 나타내는 선조가 붙어있다. 두 작품은 한데 모여 야생이 보여주는 자연의 신성함, 자연스러운 생명활동의 단순한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작업 또한 그렇게 단순하고 자연스럽게 행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나친 생각이나 과욕 없이 내부에서 자연을 바라보고 기록하고자 하는 표현욕구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야생동물'이란 문명과 인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연 그대로, 생명을 부여받은 원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동물들을 뜻하는 것이다. 즉 우리 인간이 잃어버린 자연의 근원적인 형상을 간직하고 있는 동물들이 야생동물들이다. 자연과 단절되어 살아가면서 자연의 심성을 잃어버리고 그에 대한 이해력 또한 상실한 인간은, 이들 야생동물들을 위협하고 나아가 지구상의 자연 생태계 전체를 위협하고, 결과적으로 자기 자신마저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자연을 지키고 회복하는 것이 우리 자신이 잃어버린 생명력을 회복하는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가슴으로 느끼기는 어렵다. ● 『2002 야생동물들』은 우리들이 잊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야생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해 주는 기회가 되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토탈미술관에는 기존작품들이 많아서 출품작들을 구별해내기 어렵기 때문에 이곳에서 전시를 개최할 때에는 기획자들이 디스플레이를 조금 더 고민해서 감상자들의 편의를 배려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조곤조곤 쉽고 편하게 이야기를 걸어오는 작품들을 가을 분위기 가득한 야외에서 보물찾기하듯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감상을 마치고 돌아서 나오는 내 눈에 나를 위협하던 황소의 기세가 조금은 누그러진 것처럼 보였다. ■ 김미영
Vol.20021022a | 2002 야생동물들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