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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0925_수요일_05:00pm
하나아트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27-5번지 단성빌딩 2층 Tel. 02_736_6550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르네 데카르트(Rene Descartes : 1596~1650)의 이 명제를 거론하는 것은 어쩌면 이 글을 처음부터 구태의연한 것으로 보이게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자는 간혹 생각한다. 이 심신이원론자의 너무나 유명한 - 그러나 논란의 여지가 많은 -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개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 철학사에서 신에게만 쏟아지던 모든 관심을 '나'라고 하는 인간 존재 자체에게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어 버린, 인식은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지에 대한 강렬한 질문에서부터 '나' 바로 인간이 역사의 중심에 서게 만들어버린 이 천재적인 고뇌를... ● 또 필자는 생각한다. "작가는?" 하고. 미학의 오래된 문제 - 창조냐 반영이냐 등등 - 를 떠나서 작가는 본다, 작가는 생각한다, 작가는 표현한다, 작가는 보여준다. 그것이 언어든, 문자든, 몸짓이든, 그림이든... 고로 작가는 존재한다. 어쨌든 이것만은 자명한 사실인 것 같다. 문제는 무엇을, 어떤 눈으로 보는가, 어떻게 생각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풀어내는가 하는 것이다. ● 조영아는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그 눈을 통해 인식된 것은 어떤 사회적 현상이며 어떤 코드로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까?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설치와 영상의 두 가지 매체로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 말이 아무래도 심상치가 않다.
언뜻 보기에 엽기적이기까지 한 영상에서 두 명의 인물은 무심한 동작으로 개의 시체를 난자하고 해체해서 더 이상 개가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다. 마치 폭행을 당하듯 개를 이루고 있던 요소는 분해되어 소멸한다. 무력한 개의 시체에 말없이 권력을 행사하던 인물들 마저 사라지고 난 후 수술대 위에 남겨진 개는 이미 개를 초월한 것이 되어 오히려 평온해 보인다. 작가가 타이틀로 제시하고 있는 언어는 DoGmatism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독단주의, 교조주의 등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다분히 종교적인 이 단어가 어떤 의미로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것일까. 작가가 말하고 있는 개(Dog)와 신(God)은 어째서 같은 것인가. 무심한 듯 행해지는 일련의 동작들은 분노라는 코드로 연결되어 있다. 분노하고 있는 것은 행위자-인간(Man), 즉 작가 자신이다. ● 일반적으로 약자로서 비속한 의미로 사용되는 '개'라고 하는 개념과 반대로 숭배와 금단의 대상이 되는 '신'이 갖는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 답은 의외로 쉽게 드러난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이 양자는 모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개념이다. 인간에 의해 태어나고 인간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하나의 대상일 뿐이다. '개만도 못한 인생'이 되었건 '신은 죽었다'가 되었건 마찬가지라는 얘기다. 정작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인간인 셈이다. 영상에서 관람자가 느끼게 되는 것은 무관심함, 폭력, 잔인성, 역겨움과 같은 감정일 수 있으나 작가가 정작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작가 자신과 관람자를 포함하고 있는 인간 그 자체의 무심한 횡포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어쩌면 인간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고 있는 무감동한 폭력과 그것을 덮고 있는 타부를 관람자에게 직접 보여줌으로써 끄집어내려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작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개념을 다른 방향으로 확장시킨다.
개의 두개골로 이루어진 기둥 혹은 나무와 같은 구조물에서 보여지고 있는 '개'는 이미 영상 속에서 난자 당하고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스크린 밖으로 나와서 개가 아닌 것이 되어 마치 하늘기둥처럼 인간을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개 뼈의 기둥에게 신격을 부여함으로써 개념의 전도(顚倒) 혹은 이율배반(二律背反)을 시도한다. ● 조영아는 "Dog와 God는 거울로 비춰 본 것처럼 닮았다." "그 사이에 인간이 개입해서 DoGma를 이룬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제시된 세 단어의 형태가 작업 전체를 이미지로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조영아의 과거 작업을 되짚어 보면 지속적으로 개 뼈를 사용해서 일종의 제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번 전시는 그 일련의 과정이 구체화된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가 개를 신격화한 것은 결코 화해의 뜻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반대 입장에 서 있는 두 개념을 같은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일종의 데리다(Derrida, Jacques : 1930~ )적 해체를 감행하고 있다. '개'도 '신'도 기존에 갖고 있던 지위를 말소 당하고 이분법적 대립 역시 그만둔 채 작가에 의해 같은 것으로 다시 규정된다. 기성의 권위가 철저하게 농락되고 있지만, 결코 약자의 편에 서서 하는 행위가 아니다. ● 조영아는 계속해서 "이 작업에는 상승의 dogma와 하강의 dogma의 순환이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상승의 dogma는 말 그대로 작가가 행한 일련의 개가 신이 되는 과정이며 하강의 dogma는 작가가 신이라고 부른 개의 뼈를 관람자가 여전히 개로 인식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다는 설명이다. 즉 관람자도 보고 인식하는 사이에 기성사회의 부조리,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권력의 횡포, 잔혹성, 타부를 전복하는 작가의 음모에 공범이 된다. 작가와 관람자가 동시에 인간(Man)으로서 대상이 되는 개념에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매개자로서의 인간(Man)이 개(Dog)와 신(God) 사이에 개입하여 DoGma를 이룬다. ● 조영아가 연출한 이런 플롯은 결코 본질적인 해체적 입장인 것은 아니다. 아무리 기성의 권위와 압력에 분노한다고 해도 작가 자신 역시 '전지전능'의 혐의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또 벗어나려 하지도 않는다. 영상은 작가의 분노를 연출하기 위한 하나의 무대장치로 기능하고 있으며 선택한 오브제도 결코 본래 갖고 있던 일반적 지위나 속성을 빼앗길 만큼 녹녹해 보이지 않는다. 관람자는 작가가 실은 인간에 대해 분노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코 인간적 권력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작가가 기존의 인식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분노하되 아직 어떠한 최종 결정도 내리지 않고 있음을 발견할 때 어쩌면 이 작가의 실낱같은 양심적 고통에 안쓰러움을 느끼게 될 것도 같다. 비록 바라보는 데에 어느 정도의 고통이 따르더라도 단 한 순간이라도 작가와 자신을 동일시해 본다면 - 무엇을 보고 어떻게 인식하고 표현해서 보여주고자 하는지, 고로 어떻게 존재하고자 하는지 - 나름의 재미를 느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이영주
Vol.20020927b | 조영아展 / CHOYOUNGAAH / video.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