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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0927_금요일_07:00pm
스페이스 사진 서울 중구 충무로 2가 52-10번지 고려빌딩 1층 Tel. 02_2269_2613
1. 바다. ● 바다가 위안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바다로부터 삶의 근원을 생각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모순과 오류와 욕망과 치열한 경쟁으로부터 잠시나마 스스로를 위안코자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바다를 찾는다. 그리고, 죽음을 갈망하는 사람이 찾는 곳도 바다이기는 하다.
2. 사진에 문법을 부여한다. ● 사진이 통시적으로 인지된다는 말은, 시간의 차이를 두고 점차적으로 인식해 가는 언어와는 달리 하나의 화면이 그대로 시각화되고, 그 시각화된 이미지들이 마구 뒤엉켜 그대로 인식된다는 통념에 따른 것을 의미한다. 어느 지점으로부터 점차적으로 인식을 한다기보다는 한꺼번에 그 이미지가 담고 있는 기호와 그 기호가 안고 있는 의미를 순서 없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리라. ● 그러나 과연 그런가? 단번에 사진을, 또는 사진 속에 들어있는 사물의 지시된 의미를 '알아버리는 것'은 쉬우나, 그렇게 알게 된 정보의 값으로 사진이 다 읽혀지거나 '감상'되어진 것이라고 확신할 수가 있을까? 아는 것과 이해하는 것, 그리고 본 것과 인식하는 것 사이의 엄정한 차이가 너무도 일상적인 오류 속에서 간과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문법을 익히지 않은 누군가가 복잡한 말이나 글을 '보았을' 경우 그에게 그 말과 글은 어떤 형태로 '인식'될까? 만일 누군가가 한 복잡한 내용의 말을 소음으로 이해하거나, 복잡한 내용의 글을 검은 잉크의 집합이라고만 이해할 경우,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무엇이라고 이해하게 될까?
사진을 언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래서, 그 사진 안에는 문법이 엄존한다고 믿는 사람 또한 많다.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믿음을 기존의 언어와 제스처로 설명하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단지 느끼면 된다고 하던 (무작정한) 믿음이 종교 내에서조차 비판을 받아 온 지 오래다. 종교가 역사의 코드를 회복한 것은, 이러한 맹목적 감성의 축으로부터 인식의 장으로 나아감을 뜻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읽기가 피어나는 것이리라.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증명하는 것처럼. ● 사진을 보는 것으로부터 읽기에로의 전환은 단지 보는 것의 변화만을 뜻하지 않는다. 화면을 읽어나감으로 해서 그 스캐닝된 이해의 축 안에 읽고 있는 관자의 경험이 다시 투영되어 의미를 견고하게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함으로써 사진은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사물의 사실성과, 그 사진을 바라보는 관자가 읽어나감에 따라 덧씌워지는 의미의 확장이 새로운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는 지점까지 나아가게 된다. 새로운 경험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문법을 통해서. ● 이때 문법으로 작동하는 것은 여러 가지이겠으나, 한성필은 포커스와 노출시간 그리고 색을 사용하였다.
3. 다시 바다로. ● 한성필은 '그때' 바다를 향해 긴 시간동안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 동시에 긴 시간동안 카메라의 조리개를 열어 빛을 받아들이면서 바다를 받아들였을 터이다. ● 흔히 사진가들이 사용하는 장 시간의 노출은 여러 가지를 얻게 하고 또 파괴하기도 한다. 색을 파괴하고 흐름을 파괴하며, 그 파괴된 색으로 새로운 색을 얻게 하고 흐름을 파괴하여 사물의 외형을 해체하고 그러면서 다른 형상을 가져다준다. 지금 한성필의 사진이 그렇다. ● 한성필의 바다를 바라보면 정지되고 명료한 바다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몽롱하며 비현실적인 공간에 갇힌 그런 바다가 다가옴을 느낀다. 또렷하지 않기 때문에 더 울렁거리며 흔들리기 때문에 보고 있는 나만의 바다로 다시 보여진다. 바다의 색과 공기와 흐름이 감지되기도 한다.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바다이리라. 동시에 그의 바다에 부유하는 몇 개의 구체적인 사물들은 삶을 살풋 연계시킨다. 그물은 마치 솟아오른 섬과도 같이 보이나 그 안에 들어있을 물고기는 우리 삶의 자양분으로 환치되어 시선을 교란시키고,(My sea #18) 그리고, 먼 바다에 떠있는 검은 배는 그것 자체가 고립된 존엄한 삶을 상기시킨다. 흐름을 느끼게 할 녹색 바다의 움직임과 턱져 있는 먼 바다의 갈색 톤은 그 검은 배를 부유시켜 우리가 얼마나 고립된 개인인지를 상기시켜준다. 완전히 외롭게 말이다.( My sea #21) 다시 그 바다 안으로 몇 명의 사람들이 들어간다. 형체를 알아볼 수없이 흔들려져 있기는 하지만 바다와 같은 색으로 변한 저 인간들은, 그러나 바다보다 더 진한 모습으로 바다에 일체되고 있다. 어째서? 바다와 인간이 하나인가? 오른쪽 위에서 내리쪼이는 빛은 이미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하고 그저 그렇게 밝게 비추고만 있다. 그래서 바다다.( My sea #26) 바다.
4. 사진으로 누군가의 가슴에 상처를 낼 수 있다면, 그것은 사진이 그의 가슴에 담겨진 경험 속으로 들어가 자리해야 하리라. 순간, 완전하게. ■ 정주하
Vol.20020927a | 한성필展 / HANSUNGPIL / 韓盛弼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