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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재하는 것에 대한 탐욕"은 남성중심적 사회와 그 사회의 근간이 되는 남근주의적 발상에서 가장 강력한 열쇠 말이 된다. 이 열쇠 말로부터 이근범의 그림은 시작되고 있다. 그가 그려낸 인물은 초상이라는 형식을 빌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 인물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물의 형태를 빌려 상실과 상실로부터 배태되는 욕구를 암시할 뿐이다. 그리곤 그 형상이 결국 남성의 권위의식을 드러내는 옛 그림의 초상화를 닮아있을 뿐이다. 결국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그리고자 하는 욕망'의 의식 밑바탕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없는 것'을 메우려 하는 과도한 상상력의 지배의식이 깔려 있는 것이다. 그림을 이루는 형상은 그래서 나른하다. ● 거세된 남성-그리지 않았거나 아니면 그리다가 중도에 그만 둔-과 남성 성기를 부여잡은 형국을 드러내는 그림의 공통점은 거세 콤플렉스라는 남성 일반의 위기의식을 반영한다. 아니 투영하고 있다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그들은 부수어지는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익명으로 보기보다는 '부재함-여기 없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 같다. 따라서 이근범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결국 권력으로부터 배제된 '나'이거나 중심으로부터 이탈된 '자의식'으로 읽혀지게 된다. 이는 작가의 자화상일 수 있고 우리 사회의 남성 일반의 진짜 모습일 수 있다. 그림은 그저 그리는데 사용된 도구나 물질들이 남긴 흔적의 집적소가 아니다. 하찮게 남겨진 연필 자국조차도 당연히 작가의 의식이 투영된 거울과 같다. 우리가 그것을 모두 다 읽어내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모두 그림 한 점을 통해 일체의 감동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이근범의 그림이 보여주는 형상은 작가의 솔직함만큼이나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일련의 작품들이 '애국(자)'이라는 연작으로 만들어 졌다. '장미꽃이 있는 정물'처럼 명확하거나 친절하지 않은 이 작품 제목들은 기실 작품의 실재 내용들과 일치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함의를 가지고 작품을 읽어내도록 유도하는 사유의 단초도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의 개인적이지만 아주 구체적인 정황과 육화된 경험의 일단을 드러내는 제목이다. 물론 이 부분에 이르기까지는 필수적으로 작가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 때로 우연하게 마주친 인물이나 풍광 그리고 단어 하나가 자신의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사고방식에 파열을 내게 한다. 그리곤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곧잘 보다 넓은 지평으로 자신의 사유방식을 옮겨가게 하는 경험을 공유하기도 한다. '애국(자)'는 그런 의미에서 작가에게 자극이 되었던, 새로운 사고와 상상력을 자극했던 '부재 중에 드러난 욕구'와도 닮아있다. 연상을 필요로 하지 않아도 이 연작의 제목은 그래서 작품이 가지는 불편한 관계들-노랑색 모노톤이 주는 색감의 비지시적 의도와 형상의 모호함이 주는 난독성까지 아우르며 작품을 구성하는 재미있는 그림의 요소가 되고 만다. ● 이근범의 그림은 여러 가지 충돌 요소들을 함께 가지고 있음으로 완성된다. 우선 그의 그림은 꼭 집어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재현하지 않는다. 그저 유사하다거나 닮아 있는 정도다. 족자를 닮아있는 틀이 그렇고 전통적인 조선조 초상화 형식을 빌려온 것이 그렇다. 묘사되지 않았지만 형상이 드러나고 있어 확실하게 그 형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지칭할 수 없지만 인물이라는 점을 간과하기 힘든 점도 그렇다. 인물의 살점과 옷을 구별할 수 있지만 정확하게 그 경계를 나누어 의습을 구별할 수 없다는 점 또한 그렇다. 배경으로 사용된 노랑색은 배경이면서 그림 전체이고 인물을 드러내는 검정색 물감과 목탄, 연필의 흔적들은 그림의 부분이면서 노랑색 처럼 그림 그 자체를 버텨내게 한다. 조화를 꾀하기보다는 적절하게 버무려지는 상황을 작가는 원했던 것 같다. 낯선 충돌을 통해 완성의 의미를 부여하는 이 방식은 결국 작품을 심상적 차원에 머물게 만든다. 그 점은 이근범의 작품에서 매우 주효할 뿐 아니라 그림으로 남게 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론이 되고 있다. 세계에 대한 작가의 의식은 의도적이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의도적으로 의식화시켜 세계를 판단하기를 원하고 그렇게 한다. 늘 '하거나 하는' 그 방법론으로 그림은 다 그릴 수 있다고 맹신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고 이 확신은 늘 아무 것도 그리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물론 이근범의 방법론으로 의미세계가 정립되거나 확연하게 존재를 드러낼 수는 없다. 이 점은 앞으로 작가 스스로가 보다 명확한 자기 확신을 보여주어야 할 대목이 된다. 왜냐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일을 지속적으로 해야하는 노동이란 없기 때문이다. 사유 또한 마찬가지여서 무의미한 것을 지속적으로 사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정확하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나 생각의 정도와 범위를 지금 잘 모르거나 굳이 애써 감추려 할 때를 제외하곤 말이다. 그럼에도 이번 개인전까지 가져 온 일련의 작업들을 보면 작가는 완결된 '것'과 '의미'를 규정하고 달려가기 보다 과정 중에 만나는 찰나를 잘 거두어들이고 있다. 혹 미진하고 충분하지 않아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미완성의 상태가 되어 있어도 말이다.
이번 전시에서 보게 되는 작품 중에 초상화 형식을 빗겨 가는 세 점의 작품에 대해 굳이 방점을 찍어 이야기 할 만하다. 왜냐하면 애국 시리즈에서 결국 작가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상대적으로 잘 포착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판단에서다. 도록에 표기된 10번과 11번 그리고 14번 작품을 보면 작가는 자기 연민에 대한 오해를 스스로 풀어내고 있다. 동시에 편린으로 점철된 그림 속의 이상이 더 이상 상실되지 않는다는 자신감도 드러내고 있다. 그림에서 인물들이 가지는 표정은 14번 그림을 제외하고, 성형되지 않는 재미있는 방식으로 그려져 있음을 보게 된다. 어떤 표정을 만들지 애당초 계획 없이 그림이 진행되다가 그만한 정도의 얼굴이 성형되면 손을 떼고 얻게된 결과라는 뜻이다. 이런 인물의 표현방식은 작가가 자신과 외부 사이를 연결하는 어느 선상에 지금 '있음'을 밖으로 알리는데 적절하다. 물론 작가가 속 시원하게 보여주거나 말하지 않음으로 우리는 선분 상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 길 없다. 하지만 이 심상적 인물들은 분명 '부재에 대한 탐욕'을 가장 확실하게 드러내는 표상이다. 남성으로 유추할 수 있는 인물은 확실하게 성차를 두고 구별할 필요를 보여주지 않음으로 이제 스스로 음경을 부여잡거나 그 곳을 거세할 필요 또한 없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남근주의에 대한 맹폭을 통해 사회의식을 확연하게 드러내고, 세계를 이해하는 보다 명확한 인식태도를 작가는 보여주길 거부하고 있다. 그렇지 않음에도 말이다. 또한 보편적인 인간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자칫 지루하게 일반화시키거나, 시대 뒤떨어진 이슈로 드러낼 위험성을 떨구어내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그 경계를 위험하다고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럼에도 가장 확실한 것은 '있음'에 대한 거부와 판단에 대한 확신을 선택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빌미를 이 그림을 통해 작가는 찾아내고 있다. 이 세 점의 작품이 앞으로 작가의 긴 노정을 암시하게 하거나 혹은 애국을 그만 두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한 자기부정과 반대 급부의 집착은 결국 충돌을 전제로 밖을 바라보게 만든다. 이근범의 작품은 유별난 테크닉을 구사한다거나 회화로서 자기부정을 극복하려는 요즈음의 어떤 유행과 결별된 상태다. 따라서 밖을 바라보는 자신의 태도가, 물론 선택과 동시에 결정되겠지만, 이제 결정을 통해 일정한 선상에 위치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림을 통해 진리를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말이다. ■ 이섭
Vol.20020923b | 이근범展 / LEEKEUNBUM / 李勤範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