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자기의 월장越牆

추상공간과 직물회화:조선시대 보자기와 한국현대미술展   2002_0912 ▶ 2002_0922

혼례용수보_41×41cm_19세기_한국자수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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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0912_목요일_05:00pm

김봉태_김상란_김선두_김영순_김지희_김현태_박숙희 석철주_신영옥_안필연_왕경애_이성순_이승철_이인 장연순_장혜용_전혁림_정종미_차계남_최선호 한국자수박물관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마로니에미술관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0번지 Tel. 02_760_4601

독특한 문화유산 우리의 보자기에는 몬드리안이 있고, 폴 클레도 있다. 현대적 조형감각을 유럽을 훨씬 앞질러 드러내고 있다. 그러면서 그 표정은 그지없이 담담하다. 마치 잘 갠 우리의 가을 하늘처럼 신선하다. 그것은 어느 개인의 폐쇄된 자의식自意識에서 풀려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대로 익명성匿名性의 느긋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그대로 또한 우리 배달겨레의 예술 감각이요 생활 감정이다. 거기에는 기하학적 구도와 선이 있고 콜라쥬의 기법이 있다.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것들끼리의 결합, 쉬르리얼리즘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가장 기능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렇다. 그것은 또한 가장 격조높은 미니멀 아트가 되고 있다. 거기에는 아름다움을 한결 따뜻하게 하고 한결 가깝게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은 그대로 우리韓國人의 가슴에 와 닿으면서 고금古今을 넘어선 세계성을 지니고 있다. 이런 것이 바로 우리 배달겨레가 간직한 겨레의 슬기가 아니었던가 ?_시인 김춘수金春洙의'보자기찬讚''

진분홍모시조각보_44×44cm_18세기_한국자수박물관 소장

I. 기획의 변 : 창호지 너머로 쏟아지는 아침햇살 ● 1995년에 필자는 『20세기의 동경(銅鏡)』전을 인사동 화랑 사계에서 개최한 바 있다. 되돌아 보면, 두 달간 4부로 나누어 전시되었던 이 기획전은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큐레이팅의 첫 출항(出航)인 셈이었다. 젊은 날의 무모한 열정으로 시작했던 이 기획의 항해 중에 전국에 산재한 16인의 작가들을 작업실에서 만났으며, 도록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거의 보름간을 하얀 새벽과 만나야 했다. 당시 이 도전적인 항해에는 공예와 회화, 조각의 경계를 허물고자했던 나의 결연한 의지가 돛을 올리게 했고,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찾고자 했던 열망이 현실적 파고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동력이었고, 끝내 벅찬 희열감의 정박지에서 우리 미술의 싱싱한 활어(活魚)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후 7년이 지났다.... 필자는 그동안 한국미술의 긴 역사의 혈맥을 더듬기 위한 기획전은 어떠했으며, 이를 위해 공부한 것은 또 무엇이었고, 그리고 새롭게 발견한 것은 무엇이었던 것일까.......이제 나는 다시 『보자기의 월장(越牆)』이라는 기획으로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두 번째 항해를 시작한다. ● 본 『보자기의 월장』전은 조선시대 보자기 중 조각보, 수보 15여점과 함께 섬유예술가 10인과 한국화, 서양화, 조각, 설치미술가 10인의 작품 40여점을 혼합적으로 구성한 새로운 기획개념의 전시회이다. 조선시대 보자기는 한국을 대표하는 보자기 컬렉션인 한국자수박물관이 처음 일부대여를 한 경우로, 허동화 관장님의 전폭적인 협조로 전시가 가능할 수 있었다. 또한 일부 섬유작가의 조각보 생활공예품과 한국얼전통천연염색연구협회(The Association of Korean Mind for Traditional Natural Dyeing Reasearch) 회원들의 보자기 개념을 담아 제작한 아트상품들이 「보자기 예찬」이라는 특별코너에 선보이게 된다. 본 전시회의 기획개념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보자기의 미적 특질을 현재적 시각에서 재조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시기구분이나 장르개념에 얽매이지 않는 통합적 시각에서 보자기 유물, 섬유예술, 한국화, 양화, 설치미술작품을 한 공간에-마치 조각보의 구성처럼-공존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기획개념은 어쩌면 혼란스럽게, 맥락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 듯이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점이 하나의 전시회라는 그릇 속에다 상식의 틀을 깬 내용물을 담아 사회와의 소통을 꾀하려는 나의 의도를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게 되는 출발점이 되리라 믿는다. 다시 말하자면, 현존하는 모든 예술작품이라는 것은 불변의 시간 속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로 인해 영원성을 보장받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보자기가 역사의 시간 속에서 변색되고 훼손되었지만 오늘날 새로운 예술적 가치를 발하듯이-현존하는 예술작품 역시 '시각적 허구 혹은 환영의 그림자'일 수 있다는 예술철학의 입장과 관련하여-모든 조형적 대상은 실용성과 심미성의 맥락을 떠난 지점에서 그 가치평가가 새롭게 정초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혼례용수보_49×49cm_19세기_한국자수박물관 소장

따라서 이 전시회는 비결정적임과 동시에 유동적이고, 미완성적 유보의 상태로 일상적 관념의 틀을 벗어난 곳에 위치하게 될지도 모른다.·이것은 마치 과거 우리의 일상생활 쓰여졌던 보자기가 낡고, 색 바랜 상태로 액자나 진열장에서 새로운 회화적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과 연관된다. 이처럼 조선시대 후기의 보자기 유물과 현대섬유미술, 회화, 설치작품을 한자리에 공존시키는 방식은 오브제(작품)의 의미를 시대적 맥락이나 역사적 관점에서 일탈시켜 전통과의 연계성이나 정신적 맥락에서 다시 구성될 개연성이 커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예술적 대상을 보는 기존의 관점들이 해체됨과 동시에 시대적 혹은 장르개념상 차이점을 갖는 오브제들이 상호충돌하거나 크로스 오버(Cross-over)되는 현상학적 관계들이 보다 활성화되는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조각옷보_76×84cm_19세기_한국자수박물관 소장

『보자기의 월장(越牆)』이라는 전시제목은 보자기를 의인화시키고 주체화시킴으로써 도구 자체를 하나의 인격화시킨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농경사회였던 우리나라의 민간신앙 중에는 도구에도 자연의 신(神)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물격(物格)이라는 말을 통해 도구와 인간을 일체화시키려 했던 것(物我一體)을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농부가 쓰는 낫, 괭이, 호미 등과 같은 도구들을 신성하게 다루었던 것이고, 함부로 버리거나 없앨 수 없는 삶의 연장으로, 그야말로 물질을 넘어선 정신의 도구로 생각했던 것이다. 보자기 역시 이러한 삶의 원리와 미덕으로부터 크게 떨어져 있지 않은 우리의 역사적 자료임에 분명하다. ● 특히 전시제목에서의 서술어이자 테제인 '월장(越牆)'이라는 용어에는 사회질서에 반하는 비정상적이고 불법적인 행위 혹은 현실로부터의 탈출하려는 의지와 같은 능동적 맥락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담장을 뛰어 넘는다는 것은 '담'이라고 하는 안과 밖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의지이다. 그런데, 월장은 바깥세상에서 집안으로 들어가려는 행위, 남의 눈을 피해 집안에서 바깥세상으로 탈출하려는 의도 중 하나의 사건을 말하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담장 안으로 들어설 수 있는 합법적이고 정상적인 통로인 '문(門)'을 통하지 않거나, 그렇게 할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에 대한 이유를 확인하고 싶게 된다. 즉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담장을 넘어서 안으로 월장한다는 것은 남의 물건을 훔치려 하거나, 복수하거나, 눈에 띄지 않게 들어가려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이 점에서 필자는 '긍정(肯定)의 부정(否定)'을 떠올려 보게 된다. 앞에 든 경우의 수가 모두 그 행위자 자신이 어쩔 수 없다는 합리화로 출발하지만 그것은 결국 사회적 질서에 반하는 행위로 귀착된다는 사실이다. 이에 반해 집안에서 밖으로의 도피 혹은 탈출을 위한 월장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열망, 자신이 처한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정해진 집안의 규율에 대한 저항과 같은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밖에서 집안으로의 월장과는 다르게 '부정의 긍정' 즉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의 이상이나 열망을 향한 긍정의 가치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본 전시의 제목인 『보자기의 월장』은 집안에서 바깥세상으로 탈출하려는 주체의 긍정적 의지가 담긴 로맨틱한 사건의 경우를 상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보자기의 월장』은 '부정을 통한 긍정적 세계에 대한 열망'이라는 측면을 강하게 노정하고 있는 셈이다.

김선두_행-가을볕_장지에 먹과 안료_160×120cm_2002

그렇다면 무엇을 부정하고 무엇을 긍정한다는 말인가. 기획자는 그간 우리가 인식하고 접근해왔던 한국미술에 대한 접근방식들을 돌아볼 때, 현재의 작품들을 통해서 과거의 미적 원리들을 탐구해 들어가는 즉 '시간의 가역성(可逆性)'에 대한 신화에 깊이 매료되어 왔다고 보는 것이다. 우리의 많은 미술품에 분류하는 입장은 역사적 시기구분의 강고한 벽에 가로막혀 왔다는 사실이다. 저작 우리 역사의 유산이라고 할 박물관의 미술품들은 미술사적 가치평가에 돋보기를 들이대면서도, 결국엔 고고학적 유물로 분류되어 유리상자안에서 고착화되는 것이 통례이다. 이러한 결과 생명력을 상실한 유물들은 박제화되고, 감상의 대상으로 전락한 박물관의 오브제들은 현실과 적극적으로 동화되지 못한 채, 진열장 안에서 이 시대를 호흡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우리의 문화유산들은 지난 과거사의 거울일 뿐이고, 전통의 빛바랜 궤적을 보여줄 뿐이다. 더구나 박물관의 많은 유물 중 공예품이 커다란 위치를 차지함에도 불구하고 이 공예품들은 만져볼 수도 없으며, 현대의 미술과는 더더욱 호흡하지 못해 왔다. 시대로 구분된 역사의 철창 속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제도화된 개념적 이데올로기는 너무나 강고한 것이다. ● 예술생산자나 관람자를 막론하고 유리를 통해서 실물의 피부를 감지해야 하고, 입체임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정면만을 바라보아야 하는 직립자세를 요구한다. 이러한 모든 것이 우리의 창의성을 저해하는 현실의 틀(Frame)이자, 우리가 구축해 온 경직된 비창의적 사고의 담장들인 것이다. 이러한 제도와 형식의 낡은 담장은 우리시대가 뛰어 넘어야 할 월장의 이유이자, '긍정'의 세계를 향한 화려한 탈출의 필요성을 강하게 부추기는 시대적 동인(動因)인지도 모른다. ● 20세기의 미술의 궤적은 과거의 역사적 전통이나 양식을 거부하고 새로움을 향한 지난한 도전으로 점철되어 왔다. 과거의 전통으로부터의 월장, 기존 양식으로부터의 월장, 제도적 미술로부터의 월장,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개념으로부터의 월장.....20세기동안 현대미술은 끝없는 월장을 거듭해 왔다. 이 모든 월장의 행렬들이 긍정을 위한 부정이 아니고 무엇이었는가?

석철주_생활일기_캔버스에 먹과 혼합재료_244×122cm_2002_부분

II. 소박한 생활미의 정수(精髓)로서 보자기의 개념 ● 보자기만큼 우리의 생활문화와 미적특질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유물도 달리 찾기 어려울 것이다. 현존하는 보자기는 대부분 명주, 모시, 삼베, 비단, 순면 등 직물로 만들어졌는데, 간혹 식지보(食紙褓)와 같이 종이를 부가적으로 덧댄 것도 있다. 이러한 보자기는 크게 세 가지 기능을 지녀온 것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물건이나 문서 등을 싸서 보관하거나 운반하기 용이한 포장(Wrapping) 기능으로, 둘째는 예절과 격식을 갖춘 의례용 혹은 혼례용(婚禮用)의 장식(Decoration)이나 상징적(Symbolic) 기능으로, 셋째는 차림상이나 경대(鏡臺) 등을 덮어두는 보호(Protection) 기능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보자기의 어원은 한자의 '보(褓, 褓) 혹은 복(?, 福)'에서 유래하는데, 특히 '보자의(褓子衣)'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즉, 보자기의 기능을 물건을 신체로, 보자기를 옷에 비유하여 '물건을 싸두는 옷'으로 이해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 우리나라 보자기의 역사적 기원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가야국의 건국신화에 보면, 자주색 끈에 달려 하늘에서 내려온 붉은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는 금상자에 관한 기록이 있다. 이 금상자 속에는 시조가 될 황금알이 들어 있었다고 전한다. 즉, 천상의 신성한 비밀을 지상으로 운반한 보자기 속의 황금알에서 지상의 개국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 보자기는 지상에서 처음 시작되는 건국과 그 시조의 탄생을 함께 포용하는 의미를 동시에 지닌 것이다. 신화에서 시작을 상징하는 보자기는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혼례의 사주보 풍습에서 그 의미를 재확인할 수 있다. 사주보가 청홍의 이중보로서 특별히 신성시되는 것도 남녀가 결합하는 시작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보자기 유물과 관계문헌은 대부분 조선조 후기의 것들이며, 고려시대 중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선암사의 탁자보와 궁중에서 쓰여 졌던 궁보(宮褓)로는 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가 1861년 혼례시 사용했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전통적으로 물건을 싸거나 덮기 위하여 헝겊이나 종이로 만든 생활용품이었던 보자기는 민속에서 초복(招福)의 매체(媒體) 혹은 복(福)을 싸두는 도구로 생각하였다. 즉, 보자기는 보관과 운반이 편리한 도구였으며 일상적으로 밥상보, 이불보, 횃댓보, 책보, 혼서지보, 사주보 등으로 쓰여져 왔던 것이다. ● 보자기의 재료를 보면 명주(明紬), 갑사(甲紗), 면직(綿織), 모시, 삼베, 비단 등이 주로 사용되었다. 특히 수보(繡褓)는 무명과 명주에 쪽, 잇꽃, 치자, 꼭두서니, 쑥 등 다양한 식물로 천연 염색하여 이를 소재로 수를 놓은 것인데, 보통 실은 바탕천과 반대되는 색으로 눈에 드러나게 하는 것이 특징적인 점이다. 또한 여러 색상을 구성하여 제작된 조각보는, 일단 구상을 한 후, 도안을 그려 채색하거나 조각천을 같은 크기로 재단하고, 접어 다림질을 하였다, 그런 후에 낱장 하나하나를 겉에서 감친 후 안감이 될 천과 홈질해 붙여 뒤집어 다시 한번 감침, 상침으로 마무리하여 전체적으로 다지는 제작방식을 택하였다. 이처럼 보자기는 제작기법이나 직물의 재료 면에서 다양하기 이를 데 없는데, 조각보만큼 물자를 절약하고 폐품을 활용한다는 의미와 함께 생활미술로서 여인들의 미감이 창조적으로 발현된 문화유산도 그리 흔치 않다고 하겠다.

장연순_묵은 생각의 먼지를 순식간에 날려버린다._삼베와 등나무_가변크기 설치_1996

III. 보자기의 미에 관한 세 갈래의 해석-정오의 뜨락에서 ● 미술평론가 이경성 선생은 보자기의 미를 '폐물의 미학'으로 보아 20세기 미술 속의 오브제 미술과 연과 지은 바 있으며, 구성주의에서 볼 수 있는 기학학적 추상공간이 특징적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보자기는 비전문적이고 아마츄어적인 발상과 작품이라는 의식없이 필요한 물건을 만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전문가가 빠지기 쉬운 양식화에서 벗어나 신선하고도 독창적인 이미지가 강하다고 평가했다. 이러한 점은 '선(線)의 미, 익명성, 무작위성'을 한국미술의 특질로 보았던 일본인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견해와의 유사점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미술사학자 고유섭 선생은 조선미술문화의 성격에 대해 '풍부한 상상력과 구성력, 순박순후한 데에서 오는 구수한 큰 맛, 질박담소한 무기교의 기교'라는 논지를 언급한 바 있는데, 이는 어쩌면 보자기에 배어있는 조선조 여인들의 슬기와 예술적 감각을 적확하게 표현한 것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동양사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이 보자기는 계층의 구별없이 보편적으로 쓰였다는 점과 함께 일상생활 속에 깊이 밀착되어 있었던 민속자료였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그 민속적 가치를 넘어선 새로운 미학적 가치와 예술적 평가의 대상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 본 『보자기의 월장』전은 보자기에 담긴 미적 특질을 형식적인 면과 내용적인 의미, 이 양자의 측면을 함께 연결지어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하고 있다. 보자기에는 우리 한국미술의 성격과 미적 전통의 기운들이 녹아있다고 할 수 있는데, 기획자는 보자기의 내용적 특질을 분석하면서 '색채, 자연, 사유에 기반을 둔 추상적 공간의 미학'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점은 본 전시기획을 가로지르는 중심축으로 작용하고 있다. ● 본 전시를 구성하는 세 개의 섹션 중 제1부는 「사유(思惟)의 공간(Meditative Space)」으로 설정되었다. 이 섹션은 천연빛깔로 이루어진 단일한 색조 위주의 염색보(染色褓)에 주목하여 단일한 색조(Monochrome)와 한국적 색채의 상징성이 자아내는 사유적 정서를 조명하고자 하였다. '사유(思惟)'는 논리적이고 분석적이며 종합적인 인간의 정신활동으로 규정된다. 사유의 방식은 흩어져 있는 파편들을 조합하여 하나의 짜임을 유추해 내는 것과 같아서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자의 정신과 비견할 수 있다. 또한 사유 속의 논리라고 하는 것은 비논리적인 것을 구별해 내는 능력이자 다른 것과의 관계성 속에서 유사성 내지는 차별성을 찾아내는 지적활동이기 때문에, 다분히 선험적이고 직관적이고 역사계승적(歷史繼承的) 특성을 갖게 된다. 따라서 「사유의 공간」에서는 단색조의 보자기, 이와 연관된 현대미술 작품 속에 내재되어 있는 동양적 사유의 빛깔과 정신적 의미를 짚어보고자 하는 의도가 강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 제2부는 「자연의 추상(Abstract on the Nature)」으로, 자수보(刺繡褓)를 중심으로 한국적 문양, 소재, 상징적 개념들을 담보하고 있는 현대미술작품들을 배치시킨 섹션이다. 여기서는 자수보에 담겨있는 자연대상물, 즉 꽃, 새, 나무 등과 함께 십장생(十長生), 문자의 상징성, 민화적 요소, 문양의 조형적 특징 등을 총체적으로 살펴보게 된다. 이를 통해 전통적인 구복신앙의 이미지들, 자연물에 대입한 기원(祈願)의 상징적 양태들, 자연질서의 표상으로서 오방색(五方色)의 의미들이 어떻게 현대미술 속에 투영되고 있으며, 새롭게 해석되고 있는 가를 집중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 제3부 '색채의 건축(Constructive Colours)'에서는 색상의 조합 혹은 직물의 색을 이용한 색면구성으로서의 조각보에 초점을 맞추고, 이러한 맥락과 일정한 관련성을 맺고 있는 현대미술 작품들을 집약한 것이다. 조각보의 색상은 버려진 직물이나 천조각을 이어서 실용적인 목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표현상의 구속을 받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주어진 조건과 일정한 규격을 유지해야 하는 제약들은 오히려 이 틀 안에서 원색적인 색상의 대비, 자유로운 구성미가 가능케 하는 동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대부분 천조각들을 이어 붙힌 탓으로 사각형의 기하학적 구성이 조각보의 형태적 요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런데, 기하학적 구성이 자아내는 추상성과 강한 원색구성이 장내는 긴장감, 중간색의 사용을 통한 색상의 조화 등에서 조각보는 다양한 변화와 율동감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조각보를 만들면서 천의 질감이나 조직의 미묘한 차이를 조율하는 감각은 마치 건축가가 건축재료를 선택하고 그것을 조합하는 데에서 오는 건축미의 아름다움을 연상시킨다. ● 기획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조각보가 가진 색채구성의 건축적 태도와 재질감의 화음을 현대미술 작품 속에서 찾아보고자 한 것이다.

안필연_연상Ⅱ_천과 혼합재료_가변크기 설치_2001

IV. 기획에 관한 몇 가지 의미들-저녁나절 뒤뜰로의 산책 ● 본 『보자기의 월장』전은 역사의 지평너머로 전개되어 온 한국미술 속의 조형감각과 색채의식을, 일상을 장식해 온 조선시대 보자기 유물과 섬유미술, 회화, 설치미술 작품을 한 공간에 아우름으로써 새롭게 조명해 보고자 한 것이다. 장르적, 시대적 구분을 가로질러 현대미술의 대하(大河) 속에서 한국미술의 본류와 그 정체성을 찾고자 기획된 전시이다. 바로 '지금, 여기'의 시점에서 보자기, 그 원류로서의 한국미의 본질을 다시금 사유(思惟)하면서 현대미술 속에 흐르고 있는 전통의 맥박, 그 혈맥의 근원(根源)을 탐색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기획의도가 제대로 공감을 얻게 될지는 지금으로서는 터널 속의 보행(步行)일 수밖에 없다. 다만, 본 기획이 현대적 공간 속에 호흡하는 우리 미술의 본류를, 유교적 전통과 남존여비 사상의 사회구조 속에서도 추상의 정신을 구가했던 여성미술의 한 단면을 살펴보는 의미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 우리 곁에 존재하는 보자기의 미학은 전통 속에 내재한 과거의 회고적 가치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그 미적본질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재창조하는 가운데서 진정한 한국미술을 대변하는 정체성의 거울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건데, 보자기에 담긴 조형적 가치는 이제 전통으로부터 월장하여 현대미술의 지평 속에서 새로운 예술적 변신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각을 이어서 하나의 예술적 지도를 그리고, 불규칙한 돌을 쌓아서 견고한 성과 담을 축조했듯이 보자기의 미학, 그것은 한마디로 창밖에 떨어지는 매화 꽃잎을 보며 자연을 담으려 했던 추상(抽象)의 정신이었다. 이제 그 아름다운 숨결이 우리 시대 삶의 공간을 새롭게 채색하려 하고 있다. ■ 장동광

Vol.20020922a | 보자기의 월장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