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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_창세기 9:13
예술에 있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감각의 존재이고 그런 감각의 존재들은 우리가 세계를 지각할 수 있는 일종의 가능성으로서 열려있고, 사유와 존재의 깊이가 된다.또한, 감각은 현상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세계에 있음을 의미하고, 예술은 감각 속에서 형성되며 동시에 무엇인가가 감각 속에서 일어난다. 하나가 다른 것에 의해, 하나가 다른 것 속에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세계를 신체/몸이라고 얘기할 때, 결국, 동일한 신체가 감각을 주고 다시 그 감각을 받는다. 이 신체는 동시에 대상이고 주체인 것이다. 이것은 "세계-내-존재" 메를로-퐁티(M.Merleau-Ponty)가 언급한 예술에 대한 현상학적 사유의 애매함이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 여기서, 감각이란 빛과 색의 자유롭거나 대상을 떠난 유희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체 속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원한다. 즉, 색은 신체 속에 있고 감각 또한, 신체 속에 있다. 그것은 공중에 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림 속에서 그려지는 것은 오로지 감각과 신체일 뿐이다. 그렇지만, 신체는 대상으로서 재현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감각을 느끼는 자(존재)로서 체험되어진 신체이다. 이렇듯, 현상학的 차원에서 감각이란 신체의 내부에서 세계로 드러나며 그것은 그림 속으로 나선형 같이 방향 없는 애매한 형태의 화살표를 그려나간다.
「풍경의 언약 저 너머... ; 무지개 (L'arc en ciel)」 란 테마는 세계를 바라보는 풍경화가의 비젼(vision)이 감각적 존재로서 기인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원한다. 사전적 의미로서, 태양과 반대편에 강수(降水)가 있을 때 그 물방울에 비친 태양광선은 물방울 속에서 반사·굴절되어 아주 작은 파편들의 방향으로 분출될 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지개를 의미한다. ● 성서 속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언약의 증거는 무지개이다. 창조주는 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둠으로써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이 언약을 기억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런데 그는 왜 무지개를 언약의 증거로 선택했는가? 무지개를 히브리어로 "퀘쉐트"인데 이 단어는 무지개라는 의미 외에도 "활(弓)"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하나님이 구름 속에 무지개를 걸어 두셨다는 것은 "활을 걸어 두었다"는 의미와 동일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하나님이 주신 무지개 언약은 평화를 선언하는 언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화가에 의해 그려지는 세계 저 너머에는 「풍경의 언약...; 무지개( L'arc en ciel)」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풍경 속에 등장하는 사물의 말과 이미지는 무지개, 나무, 정원, 바다, 기억, 저녁노을...등이다. ● 회화의 처음 장을 열면서, 「풍경의 무지개」란 제목의 작품들은 우리에게 풍경화가의 무한한 상상력(imagination)의 강한 힘을 느끼게 한다. 여기서, "풍경의 무지개"는 다름 아닌 우리 현실의 풍경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환경的 요소들이다. 그것은 화가의 눈과 손에 의해서 캔버스 위에 감각되어지고 표출된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과 그 중에서도 들판 위에 놓여진 집의 형태는 빠른 속도 때문에 구체적인 현실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명확히 말해서, 그것은 집이란 의미로 파악될 수 있지만 반대로, 그 집을 둘러싼 우주로 확장하며 변화한다. 더 멀리 본다면, 형태의 변형 뿐 아니라 장소의 이동이다. 무지개 빛깔의 집은 들판 위에서 군림하고 있으며 추상과 구상의 풍경 사이를 넘나들고, 너풀거리며 차별된 풍경으로 가기 위한 설레 임을 암시한다.
두번째 회화의 장을 열면서, 「반복의 풍경」이란 작품은 같은 풍경의 이미지가 7가지의 각기 다른 색으로 캔버스 위에 그려지고 찍혀진다. Rouge, orange, jaune,vert,blue, blue fonce,vilolet 의 색들은 회화의 표면 위에 그 색보다 밝게 찍혀진 풍경의 이미지로서 세리그라피(serigraphie)방식을 선택하여 반복의 이미지와 구별된 색으로 인한 반복과 차이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 여기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이 만들어낸 아우라 상실의 문제를 잠깐 생각해 본다. 벤야민은 화가와 사진가를 각각 마술사와 외과의사로 비유하기도 한다. 화가는 현실로부터 자연스런 거리를 유지하고, 여기서 현실과의 간극은 화가의 표현된 세계에 의해 다르게 감각되어질 수 있다. 이에 반해 사진가는 그 현실의 조직 안으로 깊게 파고든다. 그래서 그들이 얻는 영상은 완전히 다르다. 화가는 총체적인 이미지를 얻어내는 반면 사진가는 다수의 편린들로 엮어진 이미지들을 획득한다. 고로, 현대인에게는 필름을 통한 현실의 반영이 화가의 그림보다도 훨씬 가깝게 다가온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계적인 도구로 현실 깊숙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의 풍경」을 통해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이 토해낸 아우라 상실의 문제를 회화-사진-판화-영화를 합한 다중 적/총체적 이미지를 표현함으로서 새로운 풍경의 아우라가 생성될 것이다.
세번째 회화의 장을 열면서, 「예술가의 정원」이란 작품 중에서 그 하나는 광활한 대지 위에서 붉게 타버린 저녁노을에 의해 한낮에 태양 보다 훨씬 더 뜨겁게 캔버스 안으로 스며들기 시작한다. 내프톨 스칼(Napthol Scarlet)색으로 변장한 「예술가의 정원」은 복사꽃이 떨어져 남기고 간 희생의 흔적들이다. 희미하게 보이는 저녁 나무들의 반복된 행렬은 붉은 욕망의 덩어리로 떠오르고 화려한 풍경의 언약이 무지개로 나타날 것이다. 「풍경의 무지개」, 「반복의 풍경」, 「예술가의 정원」이란 회화의 장을 펼치면서, 이모든 풍경들의 이야기는 세계를 지각하고 감각하는 화가의 비젼에 의해 세계 저 너머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예술을 통해서만 우리가 타자의 언저리, 즉 타자의 눈에 비친 풍경에 관해서 알 수 있고, 그것은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장을 드넓게 전개시킬 수 있는 것이다. 즉, 세계가 새롭게 거듭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타자로 생성되어 가며 인간 이전의 풍경을 바라본다는 것은 오로지 예술과 그것을 지휘하는 예술가의 힘으로만 가능한 것이라고 확신한다. ■ 한광숙
Vol.20020911a | 한광숙展 / HANKWANGSUK / 韓光淑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