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있다

하진展 / photography   2002_0906 ▶ 2002_0912

하진_거기 있다_흑백인화_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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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0830_금요일_06:00pm

오프닝 행사에는 lali의 「거기있다」퍼포먼스 버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스페이스 사진 서울 중구 충무로 2가 52-10번지 고려빌딩 1층 Tel. 02_2269_2613

동물을 찍은 사진이다. 동물들은 하나같이 동물원 우리의 구석에 포로 같은 모습으로 웅숭거리며 움츠리고 있거나 구석에 숨어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노릇이다. 시속 9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평원을 질주하던 치타가 사방 10미터도 안 되는 우리에 갇혀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치타만 불쌍한 게 아니다. 하룻동안의 행동반경이 수십 킬로미터가 넘는 코끼리도 그렇고 하이에나도 그렇고 얼마나 답답할까. 그래서 하진의 사진은 일차적으로 동물들의 우울함인 것 같다. 하지만 사진에서 우울함이나 쓸쓸함이라는 메시지는 하나도 새로운 것이 아니다. ● 그런데 사진 속에 동물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동물원도 보인다. 그런데 동물과 동물원은 별개가 아니다. 동물원에 있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평소에 잘 보지 않는 희미한 때 같은 것, 동물과 나의 눈 사이에 끼어 있는 그 때는 내가 야만스럽고 위험한 동물을 바라보는 안전한 인간임을 보장해 주는 몇가지 장치 중의 하나이다. 그때는 유리에 묻은 티끌 같은 것, 혹은 긁힌 자국이다. 만일 그런 자국이 없다면 우리는 동물들을 우리와 같은 공간에 있는 존재로서 착각하게 될 것이다. 즉 우리가 아프리카의 평원에서 동물을 직접 보고 있다는 착각이나 환영에 사로잡힐 것이다. ● 동물원에 철책이 없다면 우리는 동물을 스펙타클로서 즐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스펙타클을 가능케 하는 그 장치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결국 문제는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대상의 어떤 층위를 보느냐 하는 것이다.

하진_거기 있다_흑백인화_2002

사진을 배운 사람은 누구나 초점심도라는 말을 안다. 초점심도란 대상에 공간적 깊이가 있을 때 그 공간에서 초점이 맞는 범위를 말한다. 그런데 그 대상이 물리적 대상일 뿐 아니라 심리적 대상일 때, 초점심도의 문제는 사진의 의미까지 결정하는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동물원에 가서 동물들을 볼 때 우리 눈의 초점 심도는 먼 곳에 있는 동물들에 맞춰져 있다. 우리 눈에 아주 가까이 있는 철망이나 유리에 초점이 맞는 일은 거의 없다. 그런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가정하고 세워진 시설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진의 사진에서는 그런 시설들이 시각적 장치로서 해석되고 있다. 즉, 철망 자체는 보라고 쳐 놓은 것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철망 자체가 눈에 안 보이는 것은 아니다. 즉 사람들은 눈앞에 있는 물리적인 철망을 눈으로 보고 마음 속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안 보이는 것이라고 해석해 버린다. 사진의 프레임이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우리는 프레임을 보려고 사진을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진을 보다 보면 프레임을 보게 된다. 프레임이야말로 그 안에 들어 있는 사진의 내용과 질서를 결정짓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하진_거기 있다_흑백인화_2002

하진의 사진에 나오는 철망이나 유리의 흔적은 동물원의 프레임이다. 그러나 진은 그 프레임의 심리적이고 사적인 차원을 보여주고 싶어한다. 이러이런 식으로 프레임이 작용한다고 명시적으로 말하는 방식이 아니다. 그의 사진에 나오는 동물들은 쓸쓸해 보이지만, 그것이 심리적인 해석이라기보다는 동물원의 프레임에 의해 규정된 모습이라서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싶다. 결국 문제는 심리적인 초점심도를 어디다 맞출 것이냐 하는 것이다. 대개는 동물원에서 동물을 볼 때는 두가지의 극단적인 심리적 초점심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하나는 동물을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경우이고, 이 경우 동물과 나 사이에 놓여 있는 철조망은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진_거기 있다_흑백인화_2002

하진의 사진이 흥미로운 것은 그 철조망을 시각의 장치로서 해석하고, 덫에 걸리듯 그 시각의 장치에 걸려든 동물의 이미지를 한 장의 사진에 같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사진 속의 하이에나는 괜히 슬픈 게 아니라, 시각의 덫에 걸려 있기 때문에 슬픈 것이다. 즉 일방적으로 들여다보여질 수밖에 없다는 그 상태가 슬픈 것이다. 만약 한 인간을 철망 안에 넣어놓고 다른 사람들이 구경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슬플까? 철망 안에 갇혔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방적인 시선 때문에 슬플 것이다. 동물이라도 마찬가지다. 특히 하진의 사진 속의 동물들은 대부분 검은 실루엣으로 처리되어 있기 때문에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최소한의 정체성이나 존엄성도 부여받지 못하고 있다.

하진_거기 있다_흑백인화_2002

그리하여, 동물원을 찍은 사진이지만 더 이상 동물원이 아닌 상태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많은 사진가들이 그러한 의미의 전이상태를 꿈꾸고 있지만 대개는 의미는 엉뚱한 곳으로 빠져 버리는 경우가 많다. 사진가는 단순히 동물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어하기 때문에 의미의 전이가 일어나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들의 우울이 과도하게 강조된 나머지 사진을 찍은 사람의 개인적인 감정의 투사로 끝나는 경우도 실제로 많았다. 그러나 의미의 전이는 보는 사람의 눈에서도 일어난다. 동물과 동물원이라는 장치의 결합으로서 하진의 사진을 본다면 흥미로운 의미의 전이가 일어날 것이다. ■ 이영준

Vol.20020910a | 하진展 / photography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