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에서 풍경으로, 노닐다

황혜선展 / installation   2002_0904 ▶ 2002_0919

황혜선_snow globe_15×10×10cm_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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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0904_수요일_05:00pm

갤러리 피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7-28번지 백상빌딩 Tel. 02_730_3280

2002년 7월호 월간 미술세계의 젊은 작가란에는 황혜선의 작품에 대해 언급한 글이 있다. 그 글의 요지를 간단히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건 황혜선이 작품을 통해 말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 것인데, 정형탁 기자는 거기에서 황혜선이 가진 파롤의 불명료함에 대해 말했다. 그 글에서 정 기자는 불명료함을 '말과 사물사이를 재현'한다는 문장으로 해석한다. 즉, 말은 사물의 총체성을 전부 다 드러내 놓을 수 없다는 것이고, 사물은 말로써 자신을 다 드러내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뭐, 간단하다. 존재론적으로, 의미를 가진 사물이라면 그것은 부단히 자신의 의미를 은폐함으로써 의미를 풍성하게 하는 건 당연한 거다. 만약 의미가 탈은폐된다면, 즉 의미가 자신의 몸뚱아리 한 조각이라도 노출시킨다면, 그만큼 그 작품은 단일하고 명료해서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한 전략이야말로 작품이 현존의 지평을 확장하는 하나의 방식 아니겠는가. ● 황혜선이 이번 개인전에 내보이는 작업 역시 이런 연속선상에 있다. 즉 지시와 표상, 그리고 의미의 혼전양상을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말이다. 이 글은 바로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번 개인전에 '제작한' 작품들을 드로잉 해 보겠다. 일단 개인전이 이루어지는 피쉬갤러리라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겠다. 현대미술에서 공간, 특히 전시공간-그것이 공공 공간이든, 환경적인 공간이든-에 대한 발언이 무척 많아진 것이 현대미술의 한 양상이다, 는 점은 여러분도 잘 아실 터. 특히 이번 개인전을 위해 황혜선이 피쉬갤러리(공간)를 선택했다는 점에서 공간에 대한 이야기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작가는 이 공간을 염두에 두고 작품을 꾸민 것이다, 고 필자는 말할 참이기도 하기에 더욱 그렇다. 피쉬갤러리는 사각형의 일반 갤러리 두 개가 합쳐진 꼴의 공간인데, 마주보는 벽면의 반이 서로 맞물려 있는 공간이다. 필자, 처음 개관전 때-아마 작년(2001년) 가을 쯤인가로 기억한다.-전시장을 둘러보고 많이 실망했던 공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반 캔버스 작품이 소화할 수 없는, 또한 설치 작품까지도 쉽게 소화할 수 없는 공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동선이 갑자기 좁아져 전혀 다른 공간으로 들어가는 듯 일체감이 전혀 없고 불안해 보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필자의 생각이다. 그러나 작가 황혜선은 이 공간이 무척 재미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상식(?)을 뒤집는 발상이야말로 사실 황혜선의 장점인 거 같다고 필자 어렴풋이 생각하고는 있었다. 각설하고… ● 이번 작품에 출품된 작품은 세 개다. 첫번째 갤러리는 하얀 구조벽이 관객을 막고 서 있다. 유일한 통로는 「Still Life」(1999)에 등장한 정물모양의 출/입구다. 이 정물풍경은 관객들로 하여금 황혜선의 정물을 탐색케 하는 첫 장치물이다. 다섯 개의 하얀 정물을 통과하는 '사건'을 체험한 관객이 마지막 벽멱에서 마주치는 것은 투명 스노우 볼 속에 '갇힌' 「Still Life」다. 첫번째 공간을 지나 두번째 공간에는 가로 세로 높이가 각각 2m인 창문만 하나 달린 텅 빈 하얀 구조물과 대면하게 된다. 직사각형 공간에 정사각형의 구조물을 보게 되는 것이다. 관람객은 보이지 않고, 닿을 수 없는 2m짜리 사각형 상자에 달린 창문을 '궁금하게'생각하고 발길을 돌리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이번 개인전에 출품된 작품을 드로잉해 본 것이다.

이번에 '제작한'작품들은 그가 해 오던 평면, 혹은 입체 작품에서 조금 더 '나아간'것이다. 필자는 이를 "정물에서 풍경으로"라는 표현을 썼다. 일단 그의 유리판 정물작품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이 작품은 1999년도에 제작된 유리판을 여러 겹 겹쳐 그 위에 온갖 병과 컵, 꽃병, 접시 등을 그린 작품이다. 모든 지시작용이란 개별화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경계짓기에 다름 아닌데, 다시 말하면 정물로서의 하나의 병, 하나의 컵은 맥주병으로만 연상되어서 표상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맥주병 연상할 때 소주병을 동시에 연상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물론 이 경우는 하얀 캔버스 천으로 만든 병과 컵의 경우를 두고 한 말이지만, 그의 첫번째 설치작품인 「Still Life」(작가가 이 작품의 제목을 이렇게 붙일 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역시도 이 경우에 어긋나 보이지 않는다. 즉, 하나의 유리판과 유비될 수 있는 하나의 하얀 벽면을 오직 하나의 사물만을 지시한다/연상케 한다. 그럼에도 각각의 유리판에 만든(그린) 정물은 사실 '서로간에는 닮아 있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동일한 하나의 정물화를 제시하지 '못한다'. 무슨 말이냐고? 그가 '만든 부피'는 사실 환영적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라기보다 각각의 사물(유리판)들이 상호 삼투를 일으키면서 교섭하기 위한 장치물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정물조각은 실제의 환영이길 거부한다, 고 보는 것이다. 필자는 오히려 그 정물이 사물자체의 성격(objecthood)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투명한 유리 플레이트에 그려진 정물들은 그래서 오히려'텅 빈', '깨어지기 쉬운'사물이다. 필자는 그러나 이 유리판이 닮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에 설치된 하얀 벽면 작업에도 적용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여기서'닮았다'는 것은 어떤 원형을 상정한 닮음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간(유리판 간, 하얀 벽면간)의 닮음이다. 필자는 이 닮음을 푸코의 말을 좇아 '유사성(ressemblance)'보다는 '상사성(similitude)'을 보여주는 것이다(『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김현 옮김, 민음사, 1995)고 보는 것이다. 즉'리얼'보다 '나누어 가짐'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는 전통적인 원본을 대상으로 하는 정물화가 아니라는 말이다. 황혜선의 정물화는 재현하는 원본이 없다고 보아야 한다. 하나하나의 하얀 가벽에 그려진/뚫린/지워진 정물은 합쳐짐으로써 하나의 원본(사물)을 형성하겠지만, 각각의 가벽은 각각의 서로'다른' 연쇄적인 유사성을 드러내 보여주면서 각각 하나의 완전한 원본(사물)으로 기능한다. 재현과 원본의 관계가 수직적 유사성의 관계라면 그의 정물과 원본(사물)의 관계는 수평적인 동일성/차이의 관계라 보여지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덧붙여 중요한 점은 바로 이러한 정물이 하나의 풍경으로서 체험되어지는 공간에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이 체험적 공간은 정물을 풍경이라는 장으로 끄집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 두번째 작품인 스노우볼(snow ball) 속에 갇힌 정물은 그가 기왕에 해오던 작품 「Still Life」를 스노우볼이라는 소재 속에 집어넣은 작품이다. 첫번째 작품을 통과해 나오면 마지막 벽에 설치된 이 작품은 정물을 '다시'가둔다. 정형탁 기자는 이미 「Still Life」는 '기표와 기의 사이를 재현'한다고 했다. 그 애매모호함의 경우를, 시각적인 기표와 기의 사이의 애매모호함, 즉 기표가 의미하는 기의는 '없(을 수도 있)고', 아주 명료한 '모든 사물이 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이 말도 애매한가? 필자의 생각으로 하얀 캔버스로 짜진 정물은 그것이 오비맥주병이기도 하지만, 맥주병, 아니 병이라는 사물전체를 표상할 수 있는 것이라는 말로 읽혔다.-1999년 7월 박영덕 화랑에서 발간한 그의 개인전 도록에 신정아(=류병학)는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백색-사물은 특정한 사물을 모델로 상정한 것이라기보다 일반적 사물의 이미지를 나름대로 표현했다."고. 따라서 그것은 "어느 특정의 실제 사물을 모델로 채택했다기보다 차라리 '언어적 사물'을 모델로 차용했다고 말이다."-그러나 그의 이 작품은 투명 구 속에 Still Life를 가둠으로써 정물은 이제 진정 죽은 사물이 된다. 즉, 그것은 병인 것과 아닌 것을 확연히 경계 지으며, 병이라는 대상, 병이라는 대상이 존재하는 세상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와 표상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는 말이다. 이제 유리구 안의 정물은 '저 세상의 정물'이 된 것이다. 완전한 하나의 정물, 그러나 그 어떤 사물도 가리키지 않는 순수한 정물이 되는 순간이다. 또한 사물이 순수한 시각의 풍경이 되는 순간이다. 뉴욕의 하얀/창백한/깨끗한/텅빈/무색의(blanc)의 빌딩을 연상시키기도 하듯-실제로 이 작품의 아이디어는 뉴욕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했다고 작가는 말했다.-우린 투명 구 안에서 풍경의 아우라를 느끼는 것이다. ● 마지막 작품인 자그마한 창문이 달린 2m짜리 하얀 상자를 보자. 직사각형 화이트 큐브 공간에 '서면' 관객은 직사각형의 화이트 큐브와 어우러진 정사각형 구조물이 만들어 내는 묘한 공간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는 물론 관객으로 하여금 호기심을 유발할 것이다. 공간이 그림의 구도를 결정했던 400년 전이 아니더라도, 관객은 올 화이트의 창백한 시선을 통해 공간이 그려주는 사물의 시선을 감지하게 될 것이다. 정사각형에 달린, 그러나 볼 수 없는 창문과, 설령 본다고 해도 텅 빈 블랙의 풍경은 이제까지 보아왔던/체험했던 작품 공간과는 확연히 격리된다. 빛과 색채의 관계처럼 그가 연출한 화이트와 블랙의 무채색 조화는 시각보다 공간을, 공간에서의 체험을 유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필자는 사실 이 작품과 앞의 두 작품과의 논리적 연계성을 찾을 수 없었다. 아니다. 찾지 못했다는 표현이 옳다. 소심한 필자, 물론 이 작품의 의미를 작가에게 '고집스럽게' 물어보지 않았다.-물어보기는 했다. 근데, 작가 역시 웃음으로 넘어갔다.- 왜? 이런 작품을 물어서 남는 건 빈 기표뿐이니깐. 작가의 말대로 '기표가 기의에 닿으면?' '미끄러지니까'말이다.

이번 개인전에 제작된 세 작품은 시선의 세 측면을 이야기하고 있다. 첫 번째 작품에서의 시선은 작품의 시선이다. 작품의 출/입구가 불러내는 시선 말이다. 중국식 정원에서 겹겹이 세워진 나무대문은 건너편 풍경을 숨겨둠으로써 우리를 불러내듯 말이다. 두번째 작품에서는 관객의 시선이다. 관객이 창조주처럼 바라보는 시선이랄까. 사물을 이렇듯 하나의 시·공간 속에 묶어 둔다는 것은 좀 더 과격하게는 사물을 장악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인간이 서 있다는 것은 사실 사물을 시간과 공간 속에 박제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죽은'정물을 본다. 세번째 작품은 작품과 관객, 공간이 만들어 내는 시선이다. 글세, 이 시선에 대한 개념은 '잡히지' 않는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동안 그 공간을 체험하지 못한 필자로선 그 공간이 주는 느낌을''로 표현하고 싶다. ● 바로 이 세 시선은 "존재는 총체성, 즉 기호자체의 의미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즉, 인간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디트리히 슈바니츠, 『교양』, 인성기 외 옮김, 도서출판 들녘, 1999)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첫번째 시선에서 마지막 시선까지 작품과 화해하는 과정을 겪게 된다/될 것이다. 작품 속으로 들어갔다가(첫번째), 작품과 서로 타자가 되는(두번째), 그리고 작품과 함께 하는(세번째) 체험을 하는 것이다. ● 황혜선의 정물공간이 풍경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은 바로 이 점, 차이와 연속의 정물들을 시간과 공간 속에 둠으로써 우리의 시선/감각을 생생하게 끄집어내고자 하는 데에 있다. ■ 정형

Vol.20020904a | 황혜선展 / 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