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중심을 향한 여로

김용진展 / installation   2002_0828 ▶ 2002_0903

김용진_work 1_철판, 철사, 시멘트_250×250×52cm_2002

초대일시_2002_0828_수요일_06:00pm

덕원갤러리 기획

덕원갤러리 3층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02_723_7771

소낙비와 뜨거운 햇살이 번갈아 가며 내리쏘는 후덥지근한 여름 날 방문한 김용진의 작업실은 어디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를 만큼 어수선했다. 작업실, 특히 조각가의 작업실이라는 것이 전쟁터 같기 마련이지만, 그 곳은 극단적이었다. 그런데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여기저기 놓여진, 최근의 작품들이었다. 대부분 강한 중심 집중적 구조를 가지는 이 작품들은 그 혼란스러운 환경 속에서 오롯이 자신들만의 상징적 우주를 형성하고 있었다. 약간 과장해서 말한다면 진흙탕 속에 피어난 연꽃 같다고나 할까. 꽃은 진흙에서 뿌리를 내리고 피어나지만 진흙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점에서, 양자는 질서와 무질서, 예술과 삶 등의 관계를 유비하는 상징으로 설정될 수 있겠다. ● 아닌게 아니라 그의 작품에는 연꽃 무늬를 비롯한 꽃과 나무, 눈(目), 천체, 동심원 등 만다라의 변형이라고 할만한 도상들이 존재한다. 작업을 구도(求道)의 도구로 삼는 듯 한 작가의 태도는, 이 삐까뻔쩍한 21 세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듯 하다. 또한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 잘 영합해 살면서 그 질서의 한계 안에서 가끔 일탈을 시도하고, 깨끗한 전시장을 어지럽히는 부류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반짝이는 아이디어와 재치, '시대의 흐름'에 뒤지지 않기 위한 끝없는 두리번거림, 그리고 발빠른 정치적 행보와 현란한 수사들이 감탄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쩐지 허전하다. 물론 그렇다고 혼자 처박혀서 단순 무식한 노가다에 매몰되는 것에 작가로서의 진정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필자는 작업이란 것을 지속하기 위해 삶에 어떤 댓가를 치룰 수밖에 없다는 가혹한 진실을 우선 지적하고 싶다. ● 90년대에 숭숭 뚫린 구멍과 남근 등으로 이루어진 신체들을 비롯하여, 충격적인 작품들을 토해내던 작가 김용진이 2000년대에 들어 새로 몰두하게 된 세계는, 자신 또는 세계의 중심을 향한 향수와 그것에 이르는 우회적 통로들, 그리고 이 미로를 통과하여 도달할지 모르는 어떤 이상적 질서의 세계이다. 그것은 실로 오래 지속되어온 인류의 보편적 정신 전통이라 할 수 있다. 김용진은 이 전통에 자신의 만다라를 추가한다. 만다라라는 기본적인 컨셉을 발전시켜 전개된 다양한 형태들은 2차원적 캔버스에 자리잡는다. 통상적인 만다라가 사각형과 원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때, 사각 캔버스 틀도 상징적 기능을 가지게 된다. ● 김용진의 작품은 꼼꼼하게 칠해졌거나 색가루를 뿌려서 만드는 전통적인 만다라와 달리, 마치 팽팽하게 당겨진 수틀에 수를 놓듯이 금속선들을 찔러서 형태를 만든다. 마치 음문(陰門)이나 난자를 향하는 듯한 반복적이고 가학적인 행위는 과거의 선정적인 작품과 가느다란 연결점을 가진다. 그것은 동심원의 형태를 이루면서 아득한 심연으로 빨아들이기도 하고, 마치 거대한 식충 식물처럼 관객을 향해 뻗어 오르기도 한다. 작품은 보이는, 또는 보이지 않는 중심을 향해 움직이는 수렴과 발산을 통해서, 고요한 정지 속에서 숨쉬고 있다.

중심의 상징 ● 김용진의 작품에는 신기한 형태가 존재하고, 정교하고 화려한 장식, 그리고 조각가만이 할 수 있는 기술과 노동량이 집적되어 있기는 하지만, 기발한 형태의 고안이나 장식성, 장인적 솜씨의 발휘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우선 상징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작가가 경험하고 느낀 것들은 상징으로 나타나지만, 이 상징은 개인적인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상징에 눈을 돌리게 된다는 것은, 작업을 통해서 세상의 일상적 리듬과는 또 다른 응축된 시간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다. 현대성의 저편으로 내몰린 상징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 속에 잠복하여 상상력의 근원을 이룬다. 그리고 누군가 말했듯이 상상력이 인간의 삶을 이끌어 간다. ● 종교학자 M. 엘리아데는 『종교사개론』에서 어원적으로 상상력은 이마고imago, 즉 '표상, 모방'과, 이미토르imitor, 즉 '모방하다, 재생하다'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지적한다. 즉 상상력은 규범적 모델인 이미지를 모방하고 재현실화하며, 무한히 반복한다. 상징적 사고 속에서 의미가 유효성을 획득하는 것은, 사이비 새로움이 아니라, 원초의 우주적 행위를 반복하는 것에 있다. 상징적 사고는 언어와 추론적 이성에 선행한다. 상징은 다른 인식수단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현실의 어떤 심오한 양상들과 존재의 내밀한 양상, 물리적 경험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실재의 구조를 드러내 준다. 또한 상징은 인간 실존의 구조와 우주의 구조 사이에 내재하는 상호의존성을 밝혀준다. 상징적 우주에서 모든 피조물들은 서로서로의 모습을 본 따 이루어졌기에 서로 조응한다. ● 김용진의 작품에서 기본을 이루는 것은 원의 형태이다. 그런데 그것은 여러 가지 변주를 거치면서, 모든 것이 상응성과 동질성을 지닌 체계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상징주의 특유의 다가(多價)성을 지니고 있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언어나 문자의 경우에는 시간적 계기에 따라 연속적으로 표현되는 반면에, 상징은 한꺼번에 동시적으로 여러 세부적 사실들을 표현함으로서, 내포적 다양성을 띄게된다. 그의 작품은 유사성에 의해 만들어진 구조적 관계들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변모하기 때문에, 하나의 상징이 하나의 의미로 귀속되는 것은 아니다. ● 이번 전시에 공개되는 김용진의 최근 작품들은 대부분, 강력한 중심을 가지고 있다. 보통 영구불멸을 구현하는 상징들은 중심에 위치한다. 태양처럼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는 중심에서 발산되는 빛살들이, 철근에 시멘트 물을 발라 방사형으로 뻗어나간 선들로 표현되어 있다. 중심은 제의적으로 구축된 성스러운 공간으로, 여기에서 전 우주는 확장된다. 실재의 원천이자 에너지의 중심인 이 '우주의 배꼽'에서 통해 세계가 창조되었고, 이곳으로부터 세계가 온 방향으로 퍼져 나간다. ● 종종 그 중심이 비어있거나 가려져 있기는 할지라도, 작가는 어떤 총체적 실재를 가지는 중심에 대한 향수를 가지고 있다. 가장 널리 퍼진 중심의 상징의 변화형은 우주의 중심에 서서 축으로서 삼계(三界)를 지탱하는 우주목(宇宙木)이라고 한다. 김용진은 만다라형의 원형에다가 쇳가루를 바른 나무를 붙이기도 하는데, 우주의 중심부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듯한 이 나무는 가지를 방사형으로 뻗친다. 하늘, 땅, 지옥이라는 우주 삼계의 개념을 알고 있는 문화에서, 중심은 이 삼계의 접합 점을 이룬다. 이 접합 점에서 각 차원간의 분리가 가능한 동시에, 세 영역간의 소통이 가능하다. ● R. 아른하임은 「중심의 힘』에서 중심 집중적 체계centric system가 중력의 지배하에서 발생하는 모든 인간적 경험을 기술하는데, 필수적인 상하좌우의 차원을 제공한다고 지적한다. 중심이란 힘들의 장으로, 힘들이 발생하고 수렴되는 곳이다. 그것은 2차원 혹은 3차원적으로 한 점을 중심으로 조직화된 체계로서, 대상들이 귀속되는 하나의 압축적인 체계이다. 중심은 머물러 있는 것만이 아니라, 시간에 따라 스스로 변형되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중심은 시간의 차원밖에 있는 부동의 위치를 지닌다. 보편적으로 원은 주변으로부터 완전히 밀폐된 총체적인 대칭의 형태로서, 종교적인 완전성의 이미지로 받아들여져 왔다. 원은 시작과 끝이 없는 선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영원성을 상징해왔다. 그것은 신의 중심에서부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창조행위의 시작을 암시한다. 김용진의 작품에서 원은 최소의 특성으로 다른 형태들을 생산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모태로 작용한다. 중심과 더불어 둘레를 가진 이 작품들은 자기 집중과 발산을 동시에 나타낸다.

김용진_work 2_합판, 동선, 철사, 나무_147×210cm_2002

만다라와 그 변형들 ● 김용진의 작품의 기저를 이루는 만다라Mandala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이 용어는 '원, 중심'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한 만다라는 우주와 제 신의 거처를 의미하는 복합적인 그림으로, 세계상인 동시에 상징적인 만신전이다. 만다라의 중심은 태양, 또는 하늘의 문이며, 하늘로 통하는 길을 의미한다고 한다. 만다라는 인류의 문화사에서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만다라라는 말의 구체적 유래는 있지만, 상징으로서의 만다라는 기독교의 십자가, 원불교의 일원상, 불교사찰의 표시인 만(卍)자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중심이 비어있는 원을 가진 원반을 하늘의 상징으로 보았고, 그 중심부에 있는 구멍은 신성을 향하는 길을 나타냈다. 만다라의 중심부에 비어있는 원은 바퀴의 움직이지 않는 축에 해당되었다. 이러한 모티브는 서구의 연금술에서 '영원한 창'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밖에 교회들의 원화창rose window나 인도 전통에서의 연꽃, 그리스도나 그의 성도들의 후광이나, 가로 세로 길이가 같은 그리이스형의 십자가에도 만다라가 간접적으로 암시되어 있다. ● F. 플라우트가 편집한 『융 분석비평사전』에 의하면 만다라는 산스크리트어로 '마법의 원'이란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원이 네모 안에 들어있거나 네모가 원안에 들어있는 기하학적인 그림을 말한다. 그것은 다소간의 규칙적인 하위 분할을 가지고 있다. 김용진의 작품에서는 동심원 형태와 그것의 변형인 중층적 형태들의 방사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마치 '바퀴 속의 바퀴, 공 속의 공'(쿠사)같은 세계를 이룬다. 그의 작품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중심으로부터 방사되거나 중심 쪽으로 향한다. 캔버스의 사각 틀까지 포함한 이 만다라의 형태는 일종의 '명상의 대좌'로서, 동심의 원들과 네모로 이루어진 기하학적 꼴들로 이루어진다. 김용진의 만다라는 연꽃 같은 패턴이나 나무 등 이미지가 동원될 때도 그것은 구체적인 물질적 형태라기 보다는, 명상에 적합한 초점을 부여해 주는 추상적 형태를 지향한다. ● 그의 작품은 그 내부에 다양한 에너지의 장들 간의 마주침이 존재하는데, 그 속에서 관객은 구도자처럼 마음으로 그 중심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금속선으로 이루어진 가느다란 돌기들은 상징적 우주 전체를 연결짓는다. 융은 만다라를 통합적인 정신의 중심인 자기와 연관시켰다. 만다라는 정신의 기저에서 거미줄과 같은 전일(全一)성의 패턴을 마련한다. 수잔 핀처에 의하면 만다라를 만드는 것으로 모든 에너지를 집중하며 고유의 신성한 공간을 만들게 된다. 만다라를 만드는 행위는 자신의 무의식의 언어에 귀기울이고, 이 무의식으로부터 오는 원형적 에너지를 의식에 동화시키는 것이다. 작가는 조각난 물질들을 전체적인 조화 속에 수용하기 위해 일원(一圓)상을 사용하였다. 원상이라는 틀은 분리된 여러 차원을 통일시킨다는 점에서, 심리적인 치유와 종교적인 구원 사이를 오가는 중심적이고 우주적인 상징을 지닌다. ● 김용진의 작품에서 원형은 여러 가지 형태로 변주된다. 우선 가장 강력하게 연상되는 것은 눈(目)이다. 환형으로 배열된 선들은 동공의 조리개처럼 움직이는 바늘 모양의 세포들 같이 조밀하다. 융은 눈을 만다라의 기본형prototype이라고 간주하였다. 융에 의하면 눈은 확실히 만다라로서, 그 구조가 무의식 속의 중심을 상징한다. 눈은 빈 구형으로 그 속에 검은 것이 있으며, 유리 액이라고 부르는 반액체 상태의 물질로 채워져 있다. 눈은 바깥에서 보면 표면에 둥글고 색깔이 있는 동공과 검은 중심점이 있다. 눈은 만다라와 같이 원상의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심점은 빛이 어둠 속에 숨겨져 있는 요소를 포함한다. 그것은 만다라가 가지는 원상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자기를 나타내는 상징이다. 여기에서 눈은 예언자와 같이 초인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징하는데, 이는 전능하고 모든 것을 볼 수 있으며 언제나 보고 있는 눈을 대변한다. 그의 작품에서 눈은 선 불교에서는 말하는 견성(見性)을 내포하고 있다. ● 눈 다음에 떠오르는 이미지가 식물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꽃이나 과일의 단면같은 형태를 찾아 볼 수 있다. 보통 꽃잎들은 중심부에서부터 가장자리로 둥글게 퍼지면서 자란다. 김용진의 작품 중에서 나뭇가지가 에워싼 환형은 꽃을 연상키며, 연꽃 무늬와 나뭇가지가 같이 배치되어 있기도 하다. 부처를 비롯한 여러 신들이 연꽃 속에 그려져 있다는 동양의 전통을 생각한다면, 그의 작품에서 꽃은 중심이자 영혼을 나타내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또한 꽃의 이미지는 무궁한 창조라는 관념을 가진다. 폰태너에 의하면 꽃이 벌어지는 것은 창조, 즉 중심으로부터 바깥으로 발산되는 에너지의 발현과 태양 에너지를 나타낸다. 꽃은 생기의 보편적 상징이지만, 오래가지 못하기 때문에 덧없음을 뜻한다. 하지만 김용진의 꽃은 쇠가루와 시멘트를 덧입힘으로서 석화(石花)같은 견고함을 지니고 있다. ● 김용진은 식물적 이미지 외에 계절의 순환을 추상적으로 표현한다. 만다라 시리즈 중 첫 번째로 완성된 작품 『사계』는 원상을 기본으로 해서, 만물이 발생하는 봄, 시원하게 텅 빈 중심을 가지는 여름, 내부로 알차게 성숙해 가는 가을, 그리고 두터운 외곽선 안에서 생명의 씨앗을 보호하고 있는 겨울 등을 나타냈다. 사계는 인간에게 씨뿌리고 가꾸고 거두어들인 후에, 다시 씨앗으로 되돌아가 성장의 주기를 가르쳐 준다. 수잔 핀처는 이러한 계절적인 리듬이 반복적인 패턴을 가진 주기적인 것에 대한 사고체계를 생성시켰다고 말한다. ● 김용진의 작품에서 녹물을 뒤집어 쓴 나뭇가지들은 만다라의 평면적인 형태에 조각적인 활기를 주는 요소이다. 나무는 스스로 새롭게 자라고 끊임없이 재생하는 살아있는 풍요로운 우주를 상징한다. 나무는 생명의 구현물이며, 하늘, 지상, 바다라는 세 영역을 통합점이고, 전우주가 그 주변으로 조직화되는 세계 축을 이룬다. 수잔 핀처에 의하면 나무는 위를 향하여 자라나는 가지와, 땅 아래로 뿌리가 뻗어 내려간다는 특징을 통해 여러 차원의 현실 사이를 연결한다는 상징성을 가지게 되었다. 즉 나무가 걸쳐 있는 세 영역에서, 지하 땅 속은 무의식을, 중간 세상인 대지는 보편적인 의식성을, 꼭대기 부분은 천상, 혹은 초개인성을 나타낸다. ● 융은 나무를 자기원형의 상징이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나무의 이미지는 정신과 육체의 성장에 있어서 닫혀져 있던 어떤 부분이 열린다는 느낌과 함께 아래에서 위로 솟아나고,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상하 지향의 성장을 나타낸다. 융은 만다라가 자기를 나타내는 상징의 단면도라고 한다면, 나무는 자기를 나타내는 상징의 측면도라고 덧붙였다. 김용진의 작품에서 나무는 잎새 하나 없이 쓸쓸하다. 마치 겨울잠을 자는 나목처럼 에너지를 깊숙히 숨겨둔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나무는 한정된 원둘레를 벗어나면서 그 너머로 성장하고 싶다는 의지를 나타낸다.

김용진_work 3_시멘트, 동선, 철사,나무_220×220×60cm_2002

자신을 찾아 떠나는 여행 ● 수많은 금속 돌기들로 동심원을 이루는 작품은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의 상태를 넘나들면서, 성장을 향한 원초적인 시작이나 모든 것이 끝나 마침표가 찍어지는 순간을 포착한다. 빈 중심을 궤도처럼 돌고 있는 동심원들은 시작과 끝을 연결한다. 화학처리를 해서 부식시킨 금속선들은 어두운 먹 색을 배경으로 겨우 그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 텅 빈 중심, 혹은 가려진 중심을 통해 작가는 어떤 공백, 즉 만물이 탄생하기 이전 단계, 신화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성장을 향한 주기의 시작, 또는 끝을 암시하고 있다. 모든 시작과 끝이 그러하듯, 거기에는 활력과 혼돈이 공존한다. ● 엘리아데는 우주 창생 이전의 혼돈과 무정형의 상태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원초적 혼돈의 세계는 매혹의 근원이 된다. 이러한 매혹의 근저에는 수많은 발전방향의 가능성을 지닌, 아직 형성되지 않은 살아있는 물질에 대한 욕망과 원초적 통일성에의 향수가 있다. 또한 김용진의 작품에서 동심원은 '수태하고 정화하며 용해하는'(켈로그) 물의 이미지가 존재한다. 부드러운 물 속과 같은 세계 속에 침잠하는 것은 쾌락적이지만, 그것은 모든 것이 삼켜지는 죽음을 동시에 나타낸다. 그것은 창출과 파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 만다라를 심리치료에 활용하기도 했던 수잔 핀처는 만다라가 깨달음을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내면세계의 지도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 그녀에 의하면 만다라는 삶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게 하고, 우주적 리듬과 자신을 연결시킨다. 김용진의 작품에서도 만다라는 자기 발견을 위한 통로이자, 영원히 변형하기를 소망하는 여로를 나타낸다. 그의 작품에서 동심원 중앙 부분은 다른 곳보다 밀도가 높은데, 그것은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같은 지점으로 계속하여 되돌아오면서도, 위쪽을 향하여 진행하고 있는 나선형 여로의 출발(또는 끝) 점이 된다. 융이 지적하듯이 만다라는 이미 존재하는 질서를 되찾아주는 기능에 한정되지 않고, 아직 존재하지 않는 어떤 새로운 형태를 표현하도록 하는 창조성을 가진다. ● 김용진의 작품에 나타나는 중심을 감싸는 복잡한 선들은 미로처럼 나타난다. 만다라 그림은 대부분의 경우 미궁 모양을 하고 있다. 엘리아데는 그것이 세계를 상징하는 이미지라고 설명한다. 가령 그것은 미궁의 늪을 빠져나가 보다 높은 지혜의 땅에 이른다는 스토리를 가진다. 그때의 만다라는 외부의 나쁜 힘으로부터 보호함과 동시에, 구도자를 안으로 집중시켜 자기의 중심에 이르도록 도와준다. 김용진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복잡한 선들은 구도자가 중심에 다다라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게 될 때까지 거쳐야 하는 혼란과 갈등을 대변하는 내적 여행로를 나타낸다. 그 중심이 있는지,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이 상징적 여로는 순례 그 자체를 통해 얻어지는 것들이 더욱 소중하다. ● 김용진의 작품에서 중심을 에워싸거나 중심을 덮고 있는 굵고 가는 선들은 마치 머리카락이나 모세관처럼 얽혀 있으면서, 복잡한 미로를 이룬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미궁은 중심에 대한 방어를 목적으로 했다. 즉 미궁은 신성성, 절대적 실재에 대한 통과 제의적 접근을 표현한다. 만다라의 영역에 들어가는 상황, 즉 몰입은 통과의례처럼 죽음과 부활을 내포하며, 이것을 다른 맥락에서 표현하면, 지옥으로의 하강과 하늘로의 상승이다. 미로와 낙원을 대극에 놓은 작가--'미로는 지옥이다. 시간과 공간, 무한성은 다 미로와 같다. 반면에 낙원은 모든 것을 다 포괄하는 총체적인 구상의spherical 세계이다. 거기에는 유한도 무한도 없다. 다시 말해서 낙원이란 유한과 무한의 문제가 생겨나지 않는 그런 공간이다'(이오네스코)--들도 있지만, 김용진의 작품에서 미궁은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주는 곳이다. 그것은 다른 세계와 교통하고자 하는 욕망이 투사되어 있는 입구의 속성을 지닌다. ● 김용진의 작품은 시간에 대한 투쟁, 즉 파멸을 가져오는 '죽음의 시간'과 그것이 지닌 무게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희망이 존재한다. 인간은 의식 속에서 줄 곧 자신의 죽음을 의식하는 유일한 존재라고 한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죽음은 우주적 생명의 원천과의 재 접촉이다. 죽음은 존재 양식의 변화, 다른 차원으로의 이행, 우주적 모태로의 회귀이다. 그것은 윤회사상과도 통한다. 고디베르는 윤회란 죽음과 재생 상태의 총체, 가령 식물의 삶이나 달, 또는 태양의 순환적이고 주기적인 죽음과 재생 상태의 총체라고 말한다. 죽음은 신비의 밤들, 연금술에서의 암흑 단계(검게 태우기, 부패), 지옥으로의 하강, 물질 속에서의 용해, 흙 또는 물, 괴물의 배로의 삼켜짐 등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그것들은 재 탄생 이전의 내적 경험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순간들이다. 이러한 상징적인 죽음은 삶 속에서 죽음의 체험을 말한다. 김용진의 작품에서 상징적 죽음은, 인간의 가장 비속하고 불순한 차원에서까지 원형을 실현하려는 초월적 욕망과도 닿아있다. ● 신화적인 상상력에서 크게 벗어난 듯 한 현대 작가들의 운명 역시 이와 비슷하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뿌리뽑힌 자로서의 현대 작가는 상징적인 소모와 죽음 사이의 좁은 길을 위태롭게 걷기 마련이다. 김용진의 작품에서 죽음은 은유적으로 나타나지만, 90년대 중반에 발표된 작품들을 보면, 맹렬하게 분출하는 야생적 삶에조차 죽음의 그림자가 더불어 나타나는 점은 흥미롭다. 모리스 블랑쇼는 『미래의 책』에서 작업은 사라짐이라는 그 본질을 향해서 간다고 지적한다. 그는 작업 행위를 삶이 행해 가는 본질적이며 궁극적인 경험인 죽음과 연결시킨다. 그에게 현대의 작가들은 불꽃과도 같다. 그들은 자신을 소진하면서 생명을 얻는 존재이다. 작가란 죽음을 통해서 사는 존재인 것이다. 작업이란 죽음의 체험이자 또한 죽음의 공간에로의 끊임없는 불가능한 접근이다. 그렇기에 작업하는 자는 '무한히 죽는 자', 즉 삶 속에서 끝없이 자기의 죽음과 만나는 자이다. 이러한 죽음의 매혹을 통해서만 순수한 삶의 노래가 시작되고, 삶의 모험에 대해 무한히 이야기 할 수 있다.

김용진_The four seasens_2002

수렴과 발산을 거듭하며 다시 태어나기 ● 김용진은 만다라를 통해 우주적 상징체계를 만들면서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 곧 인간의 한계 상황을 의식한다. 상징적 사고는 우주와 몸 사이의 동일성을 전제한다. 신체기관을 어떤 힘과 동일화시킴으로서 인간을 위대한 포괄자, 곧 대우주와 똑같은 구조나 본질을 지닌 소우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작품의 기본을 이루는 원은 우주이자 자신이기도 하다. 융에 의하면 원은 인격의 모든 것이 원만하고 조화롭게 통합되었을 때 형성되는 자기Self를 나타낸다고 한다. 동시에 이러한 원의 상징은 생명의 원동력이 되는 궁극적인 완전성을 표상 한다. ● 그래서 플라톤은 창세에 대해서, '신이 이 세계를 거대한 구형이자 유일한 원형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하였다. 우주론의 복제로서, 인간의 창조도 세계의 중심에서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모태 속의 알의 형태를 이루고 태어난 이래 몸은 일원상의 공간 속에서 사지와 모든 장기가 중심점을 향하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김용진의 작품에서 원은 눈 같은 신체의 일부분만이 아니라, 소우주로서의 몸 전체를 상징한다. 융에 의하면 원이나 구의 모양은 온전한 완성을 상징하므로, 그 원은 완전한 자기를 상징하게 된다. 이러한 중심은 에너지의 원천이다. 이러한 중심으로부터 솟아나는 에너지는 한 개인이 본래의 모습이 되기 원하는 정신적 에너지로서, 마치 모든 생물체가 그들 모습을 그대로 유지시키고 번식하기 위하여 모든 노력을 동원하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 ● 엘리아데는 수많은 주술적, 종교적 의례에서 사용되는 '주술적 원'의 첫째 목적은 이질적인 두 공간 사이에 칸막이를 세우는데 있다고 지적한다. 자신이 있는 폐쇄된 세계의 경계를 벗어나면 위험한 미지의 영역이 시작된다고 믿는 것이다. 만다라 형태를 이루는 도시의 성벽은 주술적 방어물이기도 해서, 그것은 주변의 우글거리는 카오스적 공간의 한가운데에 조직화된, 즉 중심을 갖춘 공간이나 영역을 확보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자면 하나의 원을 그린다는 것은 몸과 심리적인 공간을 보호하기 위한 선을 그리는 것과 같다. 김용진의 작품에는 구체적인 현실묘사가 없지만, 원이라는 형태 안에 현실에 대한 방어적 자세가 압축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것은 만다라처럼 보호적인 원상을 이룬다. ● 융에 의하면 마술적인 원을 그린다는 것은 우리 내면에 있는 최선의 인성, 신성한 영역의 범람을 방지하거나 외부로부터 교란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사악한 외부의 힘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동시에 자신에게 집중하여, 자신의 중심을 발견하도록 도와준다. 수잔 핀처는 재난이나 전환기에 있는 개인이 만다라를 그리고자 하는 내면의 촉구가 생기는 것은, 원형적인 자기를 보호한다는 기능과 함께 치유적 가치를 가진다고 지적한다. ● 그의 작품에서 만다라는 인간의 소우주이자 자신의 모습이다. 융은 만다라를 정신, 특히 자기 표현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한 세계를 대변하는 단위로서 정신이 가지고 있는 소우주적 형태와 상응한다. 그렇기 때문에 만다라는 총체적인 인격을 지향하는 정신의 그릇이자, 자기를 거울을 통해 보는 것과 같다. 만다라는 그것을 그린 사람들을 반영하는 우주적인 패턴이자, 내면 세계에 있는 창문과 같다. 물론 이렇게 그려진 만다라는 자기 역동성을 표출하고 있는 동시에, 내면세계의 패턴을 새롭게 생성시킨다. ● 김용진은 만다라를 통해 우주적인 전체성을 표현하면서 동시에 분열된 마음을 다잡는다. 융에 의하면 원상을 그린다는 제의적인 행동을 통해 인간 정신의 근원이자 목표이며, 삶의 조화가 내재되어 있는 내부의 신성한 영역으로 되돌아가게 한다. 작가에게 만다라란 완전한 자기와 정신의 근본적인 질서와 통합되고자 하는 상징이다. 그의 어떤 만다라는 매우 혼란스런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만다라를 이루는 모든 선들은 결국 중심이라는 신성한 근원을 향한다. ● 이번 전시에 출품되는 작품 중 가장 마지막에 제작된 작품인, 캔버스에 달 표면을 구현한 것 같은 원상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같다. 그것은 만다라 시리즈 중, 마치 영화의 엔딩 장면같은 마침표를 찍어준다. 원은 시작도 끝도 없음으로 해서 영원과 전체성의 사상을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원은 태양의 전통적인 이미지를 이룬다. 한편 달은 엘리아데가 지적하듯이 흐름과 변화의 과정, 차고 기울음, 출생과 죽음 및 재생에 대해, 즉 시간에 대해 특히 잘 보여준다. 식물이나 눈, 그리고 태양 빛처럼 밖으로 뻗어나가는 이미지를 보여주는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한다면, 달은 이러한 지상의 시간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 본드에 철가루를 섞어서 캔버스에 칠해진 두터운 표면은 녹이 잔뜩 슬어있어, 달이 가지는 낭만적 이미지보다는, 마치 '신의 일식'(M. 부버)처럼 어둡고 비관적인 느낌을 준다. 그것이 신의 죽음인지 단순한 일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은 오늘날 더 이상 신의 현존을 확인 할 수 없으며, 신이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지 않는 암울한 상황을 암시하는 듯 하다. ● 김용진이 활용하는 인류의 오랜 상징체계들은, 과학주의와 실증주의에 치인 현대인에게 풍부한 상징적 사고가 되돌아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김용진이 보여주는 위대한 일원 상은, 심리적인 성장을 나타내는 나선형의 통로가 된다. 오늘날 신성은 인간조건과 역사를, 우주의 끝없는 나선형의 순환적 시간에 결부시키기 위해 순수한 선적 이론들에 반대한다. 물론 그것은 완벽하고 단조로운 원운동에 의한 동일한 것의 회귀가 아니라, 동일하면서도 변화된 모습으로의 부활이다. ● 신화적 사고에 의하면 인간에게 존재의 비역사적인 부분은 한층 풍요롭고 완벽한 존재에 대한 기억을 지닌다. 엘리아데에 의하면 인간은 직관적으로 전체라고 여겨지는 절대적 실재에게 스스로를 통합시키려고 한다. 이로서 인간은 보편적 생명과 우주의 일부가 된다. 김용진은 원형을 바탕으로 모든 진실의 진수를 가진 어떤 완벽하고 초월적인 장소를 구현하고자 한다. 금속선으로 천을 꿰뚫고 완성시키는 그의 만다라는, 인간조건과 한계에서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작가의 갈망이, 타자 안으로 뚫고 지나가는 경험을 통해 충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견고한 개체성의 벽을 뚫고 보편성에 이르고자 한다. ■ 이선영

Vol.20020824a | 김용진展 / 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