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공간 루프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3-3번지 B1 Tel. 02_3141_1377 www.galleryloop.com
명상적 기둥 ● 공단으로 둘러싸인 이 기둥들 사이를 거닐어 보라. 이 단정한 기하학적 물체들에 화려함, 질감, 엉뚱함에 대한 막연한 사고들. 그리고 한 사람의 사적 경험의 무의식적 단편들이 가지치기 작업을 거쳐 가득 들어차 있다. 기둥의 정직한 형태와 색 앞에서, 우리는 그들을 가볍게 받아들일 수 없다. 기둥의 표면을 장식하는 주름잡힌 공단은 정지되어 있는 격동이며, 나무가 보내온 세월을 말해주는 나이테이다. 기둥에 따라 안을, 혹은 밖을 향하는 주름들은 사물의 변증적 양면을, 혹은 덧없고 찰나적인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 '커튼기'에 홍영인이 제작한 작품들은 점차 개념적인 관심을 벗어나 추상적, 철학적 사고로 이행하고 있다. '커튼기' 이전의 작품들은 보다 다양하고 실험적이자 자기 체험적이었으며, 젊은의 충만함과 변덕스러움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품에 존재하던 풍부한 다채로움은 몇 년 전부터 점차 엷어져, '커튼기'에 들어와서는 몇몇 부분에서 보다 끈질기고 확고하게 대체되었다. 2000년에 홍명인은 런더에서 무대를 상기시키는 묵직한 커튼을 선보였었다.(London, Goldsmith College 졸업 작품전, London, Whitechapel, 'Assembly'), 그러나 다음 해인 2001년에 서울의 주한 영국대사관저에서 열린 전시회 'Detached House'에 참가하고, 이어 런던의 한 예술인 공간인 Proof에서 'The Curtain'이라는 타이틀 아래 전시를 열면서, 커튼에 존재하던 연극적 요소가 없어졌다. 이전에 비해 사적인 전시공간에서 그녀의 커튼은 마치 가정을 장식하는 커튼처럼 보이게 되었다. 일찍이 음악 교육을 받고 연주회를 통해 무대에 선 경험이 있는 작가의 전력을 생각할 때, 무대와 무대 고유의 예술적 표현 형태에 대해 홍영인이 느끼는 매력은 당연하다면 당연할 것이다. 그녀의 커튼들은 아마 여기에서 그 창조적 원동력을 얻었을 것이다.
홍영인의 현 커튼 작품들을 읽는 데 있어 이전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타이베이에서 상주 작가로서 활동하는 동안, 그녀는 「두 개의 기둥: 무대 위, 무대 아래 Two Pillars: On the Stage, Off the Stage」를 제작, 타이베이 시립미술관에서 열린 'London Underground'에서 전시하였다. 당시에는 알 수 없었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 이전에 제작된 홍영인의 모든 커튼 작품들에 대한 최고 행위였다. 무대 막의 변형된 형태, 가정의 커튼, 혹은 연주회 무대라는 과거를 추억하는 몽상적 커튼, 어떻게 보이든 그 존재 목적을 당시 우리는 묻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사실적인 작품,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내러티브의 한 형태였다. 아니, 자신의 작품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 공적/사적 공간과 그 관계에 대한 지극히 사적이고 독특한 해석이라는, 이른바 개념적 관심의 대상을 작가는 찾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서 런던으로, 또 다시 서울로 이어지는 작가의 행로에서 타이베이는 지리적으로, 혹은 문화적으로 최상의 기류지寄留地가 아니었을까. 그곳은 고국에 근접한, 그러나 어디까지나 '타지他地'인 것이다. 타이베이에서 전시된 「두 개의 기둥: 무대위, 무대 아래」에서 우리는 내러티브가 없어지면서 이 작품 시리즈에 대한 작가의 오랜 집착이 새로운 방향 의식으로 승화된 것을 알 수 있다. 금년에 계획된 두 개의 주요 전시회에서 만나는 커튼들은 정교히 바느질되어 기하학적 형태의 기둥들을 감싸고 있다. 그것은 '커튼'이라는 형태를 거의 상실하고 순연하고 추상적인 존재로 서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홍영인의 신작은 반복되는 바느질 작업을 통해 작가 자신과 대상의 경계를 허물고자 한다. 자기실현의 고요한 잔재는 사색적 사고를 불러일으켜, 관객으로 하여금 외적 관능과 내적 이성을 통해 미에 눈뜨게 한다. 홍영인은 천을 바느질하고 모양 잡는 작업에 자신의 창조적 열정을 불어넣는다. 그 작업을 통해 그녀는 무대에 대한 내러티브, 재료와 공간에 대한 의식들을 벗어나, 대상과의 관계를 정화하고 자신과 대상을 동화시키는 것이다. 근원으로 돌아감으로써 이 기둥들은 수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삶의 방식에 대해 폭넓은 시야를 가지게 된다.
나는 이 글에서 작품에 대한 홍영인의 접근 방식을 단순히 아시아의 문화 전통 안에서 설명하지 않으려고 한다. 나에게 있어 타이베이 이전의 작품에서의 '커튼들'은 그저 커튼에 지나지 않는다. 의도적으로든 아니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구 고전주의적 영향을 받은 '서구식'사물이었다. 런던이라는 그녀의 수업 배경이 그러한 해석을 뒷받침해주고 있으며, 작가의 그 어떤 해석도 우리의 의심을 완전히 해소해주지는 못한다. 홍영인의 작품에는 다양한 형태의 무대에서 가져온 수많은 요소들이 존재하고 있다.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커튼과 동일시한다는 사실은 그녀의 작품이 가지는 정체성과 문화적 유산을 보다 명백하게 하는 셈이다. 그러나 작가의 생각을 이야기하기 위한 인식 가능한 물체로부터, 사람과 사물이 하나로 뒤섞이는 정화의 과정이자 사색적 사고를 담아내는 그릇이라는 자기발생적 존재로 이행하면서, 커튼은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이에 따라 당연히 작품의 정신 또한 이전과는 다른 전통을 이야기한다. 무엇이 이러한 변화를 가져왔는가? 그리고 홍영인은 앞으로 또 어디에 설 것인가? 아직은 그것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작가에게 있어 창작 과정은 생명의 샘과 같이 끊임없이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 작품이 점차 내면을 향하게 될 때 작가는 자신의 창작 과정을 어떻게 늘 새롭게 할 것인가? 또한 관객과의 최소한의 교류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홍영인의 창작 세계를 지켜보는 한 사람의 평자로서, 나 또한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을 해 보지 않을 수 없다. ■ 자오촨·趙 川
Vol.20020823a | 홍영인展 / HONGYOUNGIN / 洪英仁 / 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