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쇄원, 머물다 떠나기

프로젝트 그룹 '이동시점' #01展   2002_0724 ▶ 2002_0730

문주영_여름.대.숲.바람. I,II,III_디지털 출력_15×80cm, 15×80cm, 가변크기_2002

갤러리 가이아 서울 종로구 관훈동 145번지 Tel. 02_733_3373

당대(唐代)의 미술사가였던 장언원은 『역대명화기』에서 회화란 '발어자연 비유술작(發於自然 非由術作)' 즉, '저절로 그렇게 발현하는 것이지 지어서 만든 것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 아니다'라고 썼다. 편협한 성정 때문인지 아니면 무식한 탓인지 나는 아직까지 이보다 더 가슴을 쓸어내리는 명쾌한 회화, 아니 예술의 정의를 보지 못했다. 회화뿐 아니라 장르를 불문하고, 그것이 무겁게 표현되든 한없이 가볍게 제시되든 자신을 속이지 않는 '스스로 발현됨'은 곧 창작의 본질일 것이다. ● 내게 이 구절이 유난히 깊게 박힌 이유는 장언원이 주장하고자 했던 서화동체론에 입각한 문인화의 우월함에 감화되어서도 아니고, 지필묵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기복(祈福)적인 자부심과도 거리가 멀다. 그저 비좁은 미술판에서 권력화된 '그들만의 리그'를 지켜보는 일, 절대 이벤트가 되지 못하는 전시 이벤트, 무수해 보이나 실상은 단순 채널로 여과되곤 하는 유행성 담론화(전염병과도 비슷한), 해외에서 수입되는 담론들의 참을 수 없이 표면적인 맵핑(mapping) 작업에 끌려 다니는 일에 싫증났고, 감성의 즉발과 그것을 사심 없이 표현할 때 오는 창작의 엑스터시, 그것을 나누는 즐거움이 위축되는 자괴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인제_광풍각 뒤에. 바람_도화지에 연필_가변크기_2002

이같은 갈증에 공감하는 이화여대 조형예술 대학원생들로 작은 모임이 만들어졌다. 프로젝트 그룹의 이름인 '이동시점'은 본래 동양 산수화의 독특한 투시법을 지칭하는 말이다. 결코 한 자리에서는 바라볼 수 없는 다양한 시점이 한 화면에서 매우 불합리하게, 그러나 어색하지 않고 자유롭게 구사되는 것이다. 이 발생, 변화하는 시점의 이동 때문에 동양의 산수화(山水畵)는 어떠한 조건의 제약도 받지 않고 지척에 천리를 담을 수 있으며, 감상자로 하여금 작가와 함께 마치 그곳을 넘나드는 듯한 시간과 공간의 소통을 교유(交遊)할 수 있게 했다.

정주연_間_장지에 수묵, 아교_150×250cm_2002

우리가 품고 나가려는 창작 태도 또한 그러하다. 서로의 개성을 독려하면서 각자의 본성에 밀착되도록 소박하고 즐겁게 '놀 듯' 해보자는 것이다. 그러나 태도의 유연함이 시선의 날카로움을 가리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쉽게 내면에 침잠하거나 관조하지 않고 우리가 직면한 현실의 다양한 접점에 촉수를 뻗어 때로는 못말리게 산만한 상상력을 증폭시켜 다양한 형태의 전시로 현실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바램이다. 앞에 쓴 '스스로 발현됨'이 아무런 노력없이 거저 오는 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 속에서 배울 것이다.

이정민_투죽위교(透竹危橋)_혼합재료_48.5×34cm_2002

소쇄원은 그 '이동'의 한 지점이다.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조선시대의 양산보에 의해 조영된 소쇄원은 인위적인 조경작업이 주를 이루는 정원과는 달리 자연의 풍치를 그대로 살리면서 인공의 미를 가하는 원림(園林)의 미학을 품고 있다. 따라서 소쇄원에는 문이 없으며 울창한 대숲만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울타리라고 해봐야 50여미터에 이르는 흙돌담이 전부인데 흐르는 개울물을 막지 않아서 담장 밑으로 물이 흐른다. 나무 한 그루, 화초 하나도 예사로 보아넘기기 힘든, 소쇄원의 절묘하게 열린 아름다움을 하나 하나 몸소 체험하며 그 에너지를 안고, 만들고(무엇이든!), 돌아오는 것이 이번 프로젝트의 테마였다.

이찬주_대나무-바람_단채널 비디오 영상설치_가변크기_2002

디자인을 전공한 문주영을 제외하고는 모두 한국화 전공자들이지만 작품 경향은 모두 다르다. 이찬주는 「이동시점」이 소쇄원에 가게 되는 과정에서부터 소쇄원 풍경의 생명력을 담은 영상작품을, 문주영은 소쇄원 입구 대나무숲의 청량한 이미지를 입체 작품으로, 성인제는 광풍각에 앉아 주변의 자연을 담담하게 소묘하여 전시한다. 정주연은 소쇄원의 자연 환경을 '사이(間)'라는 제목의 수묵 추상 작품으로 형상화했으며, 이정민은 소쇄원에서 받은 감흥과 조선시대의 김인후가 쓴 소쇄원의 찬시인 '소쇄원 48영'을 감필(減筆)의 드로잉 작품으로 보여준다. ■ 이정민

Vol.20020724a | 소쇄원, 머물다 떠나기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