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2_0717_수요일_05:00pm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번지 Tel. 02_733_6469
희망찬 하루의 빛이 밝아오는 시점인 새벽. 우습게도 많은 사람들이 피곤에 지치고 아직 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생활에 쫏게 억지로 일터로 향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다. ● 진급의 불확실성, 박봉의 시달림, 명퇴의 위기까지 항상 그들을 압박하고 있기 때문에 초기에 보였던 열정과 성실함보다 매달리고 버텨나가야 하는 것이 삶의 전부가 되었다. 그들에게 있어 새벽은 또다시 자신의 시간을 팔아야 하는 하루의 고된 시작이고 이전에 꿈꾸었던 많은 꿈들, 이제는 변질되어 대박의 꿈이나 '부자 되세요'같은 물질적 풍요가 되 있을지라도 현실에 적응하고 살아남기 위해 이루어지지 않는 꿈을 토해내고 눈앞에 닥친 고단한 삶으로 향한다. ● 상실의 상실이란 반어적인 의미가 아니다. 자신이 무엇을 상실했는지조차 알수 없어져 버린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 하나를 얻기 위해 하나를 버려야 한다지만 순식간에 변해 가는 세상의 흐름에 가까스로 따라가다 보니 결국 어느 순간인가 '놓쳐 버린 무엇'인가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 혹은 삶의 의미 일수도 있다. 눈에 보이지 않고 쉽게 다가오지 않는 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보다 차라리 눈에 보이며 변화가 있는 물질에 몸을 맡기는 편이 더 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손에 잡히던 것이 사라졌을 때 정신과 육체의 공허와 물질의 노예가 되 버린 채 내면과의 대화도 단절되어 있다면, 벼랑 끝에 선 자신의 고독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가. ● 이번 전시에서는 관객들 내면에 숨겨진 기억, 보고 싶지 않고 경험하고 싶지 않던 모습들이지만 실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곁에서 흔히 벌어지고 있는 장면들을 형상화하여 전시장이라는 낮선 공간에 설치함으로써 그들을 바라봤던 시점, 혹은 그들에게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제3자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왜 이런 모습으로 변모하게 된 것인지, 무엇을 잊고자 했으며 무엇을 상실했는지 다시 각성하고 변화할 계기를 마련 하고자 한다. ● 『상실의 상실』전을 준비하면서 조지 시걸의 유령과 같은 텅 빈 영혼의 인물을 묘사하는 것이 아닌 인간 개개인의 심리를 그대로 담아 그들의 고통을 표현하고 사람들의 감추고 싶은 상처를 굳혀 형상으로 만들기 위해 실제 인물의 캐스팅 작업을 기획하였다. ● 대다수 사람들이 거절하였지만 남의 부탁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 좋은 이들이 작업에 참여해 주었다. 그들은 인내력과 성실함을 가진 이가 대부분이었는데도 10시간에 가까운 캐스팅 작업에서 2명이 석고의 무게와 고정된 자세를 견디지 못해 쓰러지고 2명이 아무 문제 없이 시작했다가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구토를 시작했다. 그만큼 모델을 구하는 것도, 모델이 되어준 사람에게도 쉽지 않은 고통스러운 작업이었다. 자신의 인내력에 화가 나고 너무나 벗어나고 싶었으며 나중에는 욕이 절로 나올 정도로 참을 수 없어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다 형을 뜨고 난 다음에는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혐오스러운 껍질을 벗어 놓은 기분이라고 그들은 토로했다. 작가인 나 자신도 보는 사람도 유쾌하지 않고 타인에게 고통을 주고, 치부를 드러내고 아픈 상처를 쑤시고 더러움을 상기시키고 고통을 토로하는 작업을 왜 하는 것인지 .... 사실, 작업을 하면서도 내내 그 생각이 멈추지 않았고 회의도 들었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젊기 때문인지 정제되고 아름다운 작업을 하기에는 '내 안의 화'와 사회의 문제점, 그냥 그렇지 뭐... 하며 넘길 수 있는 무난함을 갖추지 못했다. ● 때문에 쉽지 않은 길이지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방법으로, 앞으로도 계속 이 길을 걸어 나갈 것이고 내가 깎이고 깎여져 둥글어지는 과정에서 나의 모남에 타인도 자신들의 잊고자 했던 부분, 이미 잃어버리고 그게 무엇인지도 알 수 없어진 이들에게 내 작업이 약간의 자극이 될 수 있다면 이 작업이 단지 고통스럽고 힘든 무의미한 작업은 안될 것이라 생각한다. ● 세상이 쉽게 변화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어차피 인생은 마라톤....(내가 재수 시절, 술 취한 어떤 아저씨가 내 처진 뒷모습을 보고 격려하며 헤어지기 전 멀리서 소리쳐 외쳐준 명언이다) 지금은 나를 사랑하고 후회 없이 노력하자. ■
아침부터 일을 시작해서 점심에 이를 무렵이면 시간을 표기하는 한국어 중 몇 안 되는 정확한 시간 '정오'가 있다. 아주 찰나이지만 아침이나 점심, 저녁과 밤이라는 모호한 시간성과 달리 정지되어 있는 시간이면서 의식도 하기 전에 지나가 버리는 시간이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이 영원으로 통할 것처럼 고정된 사람들을 보았다. ● 열심히 살아야 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 썩어버린 고목처럼 자신의 육체를 길 위에 나뒹굴게 하면서 타인의 시선도, 무엇인가를 위해 움직여야 할 의지도 그들에게는 관심 밖이다. 그들의 태도가 지탄을 받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자기애의 상실이며 자기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변화하고자 하는 의욕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실제 겉으로 보이는 그들의 태도보다 단 한번도 자기의 모습을 제3자적인 입장에서 바라볼 용기가 없는 사람들 모두 지금의 삶에서 벗어날 자격을 가지지 못하고 단지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질 뿐이다.
저녁의 어스름한 푸른빛은 숨기고 싶은 면들을 천천히 감싸준다. 그러나 사실 저녁의 의미는 더 깊은 밤으로 향하는 시간이고 아직은 더 감춰진 고통의 시간이 이어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나라의 기둥인 청소년이 밤거리를 헤매고, 짓뭉개져 사라질 지라도 우리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듯 뉴스에서 흘려듣고 한치 앞에 들이닥친 삶의 무게에만 신경 쓴다. ● 하지만 진정 자신에게 닥친 위기의 순간에 누군가의 절실한 구원의 손길을 기대하듯 우리 자신도 누군가의 목소리에, 그 왜곡되고 감춰진 슬픈 진실에 진심으로 한번이라도 귀 기울여 본적이 있는가. 그들이 보이는 과장되고 과격한 언동이, 사실은 진정으로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 소중히 생각해줄 그 누구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더 깊은 절망이 온 세상을 뒤덮기 전에 나 자신을 변화 시켜야 한다.
생물의 성장에 꼭 필요한 요소인 뼈가 생명력을 상실한 후에는 죽음의 의미로, 혹은 상대방을 저주하는 주술적 의미로 사용되는 이중적 면모를 보인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의 말이 상대에게 뼈가 되어 박힐 수 있는 말인지 농담으로 흘려 넘길 수 있는 것인지 말을 던지기 이전에는 파악하기 힘들다. 단지 그 말을 받아들인 상대의 증오와 원한이 어린 표정에서 자신의 과오를 인식하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 가끔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사람에게서 가시가 돋친 말을 들었을 때 상대방에게 증오심을 품기보다 언젠가 내가 던진 뼈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은 아닌가 다시 한번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과 행동일수록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 던진 것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증오로 바뀔 수 있는 비중이 너무나 크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곁에서 항상 같이 하고 사랑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더 방심하고 이해해 주겠지 하며 함부로 하는 경우가 많다. ● 사랑이 크면 클수록 상대방에 대한 배신감도 커지기 때문에 행동으로 받는 구타보다 더한 언어의 폭력이나 무시는 뼛속 깊이 박히고 반복적으로 상기 될 때마다 날카롭게 갈려진다. 메마른 가슴에서 닳고닳아 날카롭게 갈려진 뼈는 상대방의 심장을 꿰뚫고 극심한 고통을 줄 날카로운 비수로 변모한다.
맞선 본 친구가 푸념하며 하는 말이 "그 남자 꿈이 부자 되는 거란다. 벌어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니...". 실제로 내가 교직에 있을 무렵 학생들의 대다수가 이미 성적 문제로 자신의 꿈의 단계를 정하고 나머지는 무작정 돈을 벌어 즐겁게 놀아보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자신의 존재를 좀 더 소중히 여기지 못하고 무작정 학교에서 학원으로 남들 하는 것처럼 따라 하면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낸 사람들에겐 삶의 질의 척도와 가치 기준이 되어버린 물질이 최선의 길로 여겨질지 모른다. ● 자신이 무엇을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하며 사는지, 자신의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한다면 눈먼 장애인보다 더 나아갈 바를 알지 못하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기심이 아닌 '자기애'이고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이며, 자신이 잃어버린 그 무엇이 무엇인지 생각하려 하지 않는 데서 오는 공허와 빈곤한 정신을 깨닫고 변화하려는 의지이다. ■ 황혜신
Vol.20020713a | 황혜신展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