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2_0712_금요일_05:00pm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Tel. 02_733_9636 www.altpool.org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며, 그 안에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빛으로 다가온다. 그 빛은 어둠가운데 침잠하여 절망가운데 빠져 있을 때에도 다가오며, 지치고 두려운 마음에 평안을 준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에 대해, 진리에 대해 이러한 정의를 내린다. 어둠 가운데 빛은 드러날 수밖에 없으나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할 사람을 보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어둠 속에 빛이 비추면 누구나 그 빛을 볼 수 있을 텐데,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는 말은 영혼의 눈이 멀어진 우리의 모습을 뜻한다. 그 빛은 내게 다가온다. ● 어둠 가운데 있을 때, 짙은 어둠을 걷어내며, 내 모습이 어떠한 지, 내가 어디에 서 있는 지를 보여준다. 내가 그 빛을 향해 눈을 들기 전에 이미 그 빛이 내게 다가오는 것이다. 빛으로 다가오는 하나님은 살아계시며 인격적이며, 말씀하시고 먼저 접근하신다."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_요한복음 15장 16절 ● 『Coming Light』는 하나님의 존재와 인격에 대한 요한복음의 은유적인 증거와 개인적 경험의 표현이다. 이것은 또한 요한복음의 주제인 예수그리스도의 증거이기도 하다. 예수를 믿는다는 그 자체가 어둠에서 빛으로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 빛 가운데 거하는 삶을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진리를 좇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_요한복음 3장 21절 ●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 지도 알수 없고 자신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같이 어둡고 깊은 동굴 속에서 절망과 공포를 느낀다. 이 어둠 속에 빛이 다가온다. 그리고 손을 뻗어 다가오는 빛을 만지게된다. 그 빛은 손의 미세한 손금까지도 밝게 비추며 움직이고 퍼져나간다. 단순히 그 빛을 만지게 되는 경험에 멈추지 않고 손에 퍼지는 빛을 통해 어둡고 우울하며 절망적인 동굴은 즐거운 축제와 같이 활기 넘치는 공간으로 변화한다. ■ 김기연
젤리는 유들거리고 매끈한 형체를 가졌고 그래서 더욱 물성자체에 집중하도록 한다. 이와 연결해 인간의 다층적인 욕망을 드러낸다. 젤리벽돌을 쌓으면서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욕망도 실현되어 간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기준이 되면 무게를 이기지 못해 허물어진다. 성경에 보면 성을 쌓은 최초의 인간은 가인이었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 자녀였는데 시기심을 이기지 못해 동생 아벨을 죽인 인물이기도 하다. 최초로 살인을 범한 가인에게 찾아온 것은 극한 두려움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죽일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성을 쌓게 되었다. 성을 쌓으므로 두려움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을 쌓는 것은 이제는 더 이상 친절하지 않은 세계로부터 자기를 방어하기 위한 의식적 작업인 것일 테다. ● 젤리로 성을 쌓는 다는 것은 불안한 공사이다. 그 성은 견고하지 못하고 무너질 것이 뻔히 예고되어 있기 때문이다. 젤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부패하기 시작한다. 곰팡이가 피기 시작하고 수분이 빠져서 추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이것은 성의 파라다이스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실상과 허상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지표 위의 현상들과 그것의 실체는 엄연히 다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_요한복음 2:19-21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의 내적 타락상을 경고하신 부분이다. 발전 진보하는 물질세계와 달리 인간의 정신세계는 더욱 퇴행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상이고 허상인지 생각해 보자. ■ 김현진
요한복음의 여러 상징들 중에서 물상징은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중요한 언어이다. 요한의 복음서에서 예수는 세례요한의 물로 세례주던 곳에서부터 처음 등장한다. 요한복음에서 가장 첫 표적으로 기록된 갈릴리 혼인잔치 사건은 예수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증거하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또 물과 성령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설교하는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할 때에도 물을 주제로 하는데, 예수는 여인이 물을 긷는 야곱의 우물은 먹어도 다시 목마를 것이나 그가 주는 물은 영생토록 솟아나는 생수가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 계속해서 베다니 못가나, 큰 파도가 일어 죽음으로 위협하는 갈릴리 바다 등, 예수를 통해 요한복음서에는 극명하게 대립되는 두가지 물, 즉 죽음과 죄와 한계적인 인간 실존의 상징으로의 물과, 예수가 제공할 수 있는 참 죄씻음, 잔치의 포도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영원한 생수로서의 물의 대립이 드러낸다. 이 가장 대표적인 사건인 물위를 걷는 예수사건은 날이 저물었을 때 예수의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였는데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는 장면이다.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리쯤 가다가 예수가 바다 위로 걸어서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자 예수가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고 말한다. ● "물이 없다면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지만 반면에 어두운 바다는 죽음의 공포이다. 바로 이러한 순간에 예수는 그 물위를 걸어온다. 이것은 그가 물이 가지고 있는 죽음의 속성을 완전하게 극복한 그리스도(구원자)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사마리아 여인의 우물물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의 물이 되고, 기적의 베다니 물이 영원한 안식의 물이 되고...그리고 '물에 빠진다'는 공포와 죽음의 법이 생명의 기쁨으로 변하게 된다는 요한복음의 물상징이다."_강대위 ● 나는 예수가 발로 걸으신 갈릴리에 대해 생각한다. 진정한 생수를 위해 그가 이룬 역사는 그의 피를 마시우게 하는 십자가 사건에서 완결된다. 참된 씻음과 죽음을 통한 부활, 구원의 역사는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 흘린 사건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는 내 삶을 유지하기 위한 일상적 행위인 빨래 행위 속에서 예수가 갈릴리에서 행한 역사에 대해 묵상한다. ■ 최정혜
Vol.20020705a | 요한복음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