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이야기

이지향展 / LEEJIHYANG / 李知鄕 / mixed media   2002_0710 ▶ 2002_0716

이지향_보석상자I_석고, 자물쇠, 빛_31×21×23cm_2001

초대일시_2002_0710_수요일_05:00pm

가나아트 스페이스 3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19번지 Tel. 02_734_8621

'채워진'이 아니라 '채워지는' 상자 ● 이지향은 상자라는 일관된 매개를 통해 자신의 작업과 만날 뿐 아니라 관람자와도 그것을 통해 만나게 한다. 무엇보다도 그 상자는 작가와 친밀하고 내밀한 관계로 밀착되어 보인다. 그것은, 그의 작업이 소녀로서의 혹은 여성으로서의 경험 등과 같은 자서전적 요소가 보여지기 때문일 것이다. 다양한 크기의 상자들이 설치 형식으로 등장하고 있는 「상자I」, 「상자II」들에는 작가의 추억, 은밀함, 사랑스러움, 소중함 등이 투영되고 있다. 이지향은 그 상자들을 전체적으로는 통일감 있게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 개별적인 작가의 얼룩이 묻어있는 것이다. 즉 석고로 재현된 상자 속에 들어있었던 물건에는, 작가의 다양한 향수와 다른 시간 속에서 경험된 기억의 농도가 미묘하게 담겨져 있다. 이런 측면 때문에 이지향은 상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상자로 인해 발생됐던 아련한 기억들을 다듬고 포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지향_상자VI_아크릴, 천에 드로잉_45×45×40cm_2002

이지향의 작업은 두 가지 구조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상자들을 작가와 무관한 무의미한 존재로 내버려두지 않고 자신과 밀착된 세계를 형성하는 것이 그 첫 번째 구조라면, 그 두 번째 구조는 관람자로 하여금 그 상자의 의미를 채우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지향의 석사논문 제목 중 '의미로 채워지는' 상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거기에서 '채워진'이라 밝히지 않고 굳이 '채워지는'이라고 쓴 이유가 바로 두 번째 구조와 연관이 있어 보인다. 이지향은 상자의 보여지는 외형 속에 보이지 않는 진실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관람자의 상상력으로 '채워지는' 상자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지향의 작업의 핵심은 내부의 실체를 볼 수 없게 외부세계인 상자를 통해 방해함으로써 무한한 가능성으로 그 비밀스러운 존재해 대해 상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상자는 관람자로 하여금 그 실체의 진실에 직접적으로 다가서지 못하게 만드는 장애물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외형이 아니라 그 이면의 알 수 없는 '무엇'에 집중하게 함으로써 보는 이를 설레게 하는 신비이기도 하다.

이지향_상자 III_압축합판, 천, 솜, 실, 수채화 물감_130×120×50cm_2001

이지향은 상자의 내부에 무엇이 포장되어 있는지에 대해 정확한 해답을 주지는 않지만 은근한 단서로 유혹을 하는 측면도 있다. 전체적으로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모습을 찾아 볼 수 없지만, 그의 작품 중 관람자를 향해 가장 적극적인 작품이 있다면, 그것은 상자 안 속에서 빛이 발산되고 있는 「보석상자 1」일 것이다. 시간의 길이를 암시해 주는 듯한 낡은 자물쇠 속에 갇힌 대상은 빛을 발산하고 있다. 이지향이 판도라의 신화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하는 이 작품은, 그 자물쇠를 따고 뚜껑을 열었을 때 어마어마한 빛의 현현에 휩싸일 것 같은 다소의 두려움을 주기도 한다. 동시에 그 두려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 내재된 존재를 만나고 싶은 호기심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이지향_상자 IV_철판, 종이, 종이상자, 잔디_135×90×102cm_2001

이지향의 어떤 상자들에는 내부에 담겨진 내용물이 공개된 것들도 있다. 「상자 III」, 「상자IV」와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상자 안에 일상적이지 않은 의외의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다. 천과 실을 이용해 여성적인 정서와 연관된 듯한 꽃잎의 패턴과 같은 유연한 형태를 만났을 때, 실제 잔디로서 싱그러운 생명이 자라고 있는 것을 목격했을 때, 관람자는 상자의 공간이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것을 경험하게 된다. 즉 상자가 갖고 있는 외적인 한계를 벗어나 무한한 다른 공간의 세계가 존재하는 가능성에 대해 암시해 주는 것이다.

이지향_상자I_석고, 석고붕대, 종이상자_147×80×140cm_2000
이지향_상자 V_폴라폴리스, 실_80×300cm_2001_부분

결과적으로 자신의 추억을 담기도 하는, 상자 내부에 존재하는 보여지지 않는 진실을 강조하기도 하는, 상자의 내부를 일상 세계와 동떨어진 비일상적 세계를 펼쳐보이기도 하는 이지향은, 계속해서 상자 만들기를 지속하고 있다. 자신의 의미, 혹은 관람자의 의미로 채워지는 상자를 만들기 위해서 일 것이다. 실제로 이지향의 상자 내부는 현재 텅 비워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채워진' 상자가 아니라 작가를 통해 혹은 그 상자와 만나는 이를 통해 '채워지는' 상자이기 때문이다. ■ 김지영

Vol.20020704a | 이지향展 / LEEJIHYANG / 李知鄕 / mixed media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