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2_0703_수요일_05:00pm
참여작가 김영우_노세주_이경자_이영호_이종균 이희석_정상기_최한선_한선현
덕원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02_723_7771
사물의 생김새나 됨됨이를 얕잡아 일컬을 때 우리는 통상 '꼴'이란 말을 쓴다. 이를테면 마름모꼴 등은 사물의 생김새를, '꼴사납다'는 사람의 됨됨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순수한 한글인 꼴을 그룹의 명칭으로 채택한 이들은 같은 학교에서 수학한 동문이란 점과 모두 젊다는 사실 외에 어떤 공통된 이념을 내세우고 있지는 않다. 굳이 이들을 결속시키는 요소를 찾는다면 손의 정직성과 그 가치를 믿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꼴만큼이나 '짓'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꼴과 마찬가지로 순수한 우리말인 '짓'은 몸 또는 몸의 일부를 놀려 움직이는 동작이나 행동 또는 행위를 일컫는 것인데 이 말들에 해한 이들의 해석이 흥미롭다. 즉, '조각이란 짓이 전제된 꼴이며, 만들어온 행위(짓)로서 시간과 그의 형태(꼴)로서 공간'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순우리말이 비논리적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그 뜻을 되새겨보면 이들이 추구하는 바가 조각의 원초적 속성, 즉 장르적 독자성을 고소하고자 하는데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서든 행위는 결과를 예시한다. 그러나 그 과정의 정도에 따라 결과는 여러 방향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만약 이들이 꼴에만 집착한다면 과정의 중요성이 무시될 수 있으나 오히려 축적된 과정을 소중하게 여김으로써 결과로서의 꼴이 많은 이야기를 내포할 수 있다는 신념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의 자기완결성 또한 높은 것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이들은 나름대로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들은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도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몇 차례 찾아와 자신들의 작업개념과 작품에 대해 발표했고, 마지막에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작품을 한 곳에 모아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이런 일들이 지극히 당연한 과정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에게 이들의 모습은 큰 인상을 남겼고, 작업에 대한 신뢰를 쌓도록 만들었다.
대체로 젊은 작가들이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기회는 극히 제한적이다. 의욕에 비해 환경과 제도는 이들에게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서 그들은 비슷한 연배의 동문들끼리 그룹을 조직하여 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한다. 사정이 좋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학력이 미술계의 권력을 확대재생산하는 구조 속에서 이런 단체의 취약성은 그대로 드러난다. 게다가 미술여론을 주도하는 비평과 저널리즘이 새로운 매체와 방법, 시대에 부응한다는 담론으로만 편향될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통적인 손의 공정에 의존한 작품일수록 시대에 뒤떨어졌다거나 참신성이 결여되었다는 부당한 이유로 소외당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논란을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전혀 관심을 끌지 못할지도 모를 순 우리말로 이 견고한 제도의 철옹성에 출사표를 던진 이들의 '무모한' 행위가 가상하기조차 하다.
그러나 사실인즉, 조각이란 매체나 재료, 방법이나 기술을 떠나 궁극적으로 형태를 찾는 작업이다. 문제는 그 형태 속에 세계와 사물을 바라보고 해석하려는 작가의 시각과 의지가 얼마나 생동하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손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신뢰가 재료에 대한 학대로 발전할 수 있으며, 노동에의 과도한 헌신이 작품의 의미보다 형식적 완결성만 좇는 결과를 낳을 수 있으므로 손과 노동만이 조각의 유일한 길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동이 결여된 형태는 공허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떤 작품에 대해 공감하거나 가치를 인정할 때 그 개념과 방법의 참신성 못지 않게 그것을 구현함에 있어서 동원된 노동의 시간도 소중하게 취급한다. 특히 손의 가치가 점진적으로 무시당해온 현대미술의 궤적을 돌이켜보면, 말씀의 승리 뒤에는 늘 조각의 해체란 꼬리표가 따라다니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죽어버린 것은 조각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규정해온 특정한 개념이다. 조각이란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말했던 것처럼- 역사적으로 규정되어온 카테고리이지 보편적인 카테고리는 아니다. 어떤 전제된 규범이 붕괴된다고 조각 자체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변화하는 과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애석해 하거나 애통해 할 필요는 없지만 어차피 인간의 짓이란 것이 규범을 만들고 부수는 과정의 연속일 석이므로 변화를 능동적으로 바라보고 판단할 수 있는 적극성이 요청된다.
꼴조각회 회원들의 작품을 지켜보면 각자 추구하는 바는 다르다고 할지라도 이들이 하나의 내재적 논리를 찾아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손에 대한 존경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손의 존중만큼이나 현상과 본질을 분리하지 않고 형태 속에 그것을 결합시키고자 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전통적인 인체조각으로부터 장르의 틈새를 파고들며 장르의 경계를 넓히고 있는 작품에 이르기까지, 풍자와 해학으로부터 존재의 존엄성을 숙고하는 심각한 주제에 이르기까지, 육중하고 견고한 양괴로부터 드로잉적 요소가 강조된 선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과 주제, 형태와 방법은 다양하다고 할지라도 이들이야말로 조각의 진정성(authenticity)에 헌신하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이미 사라져버린 것에 대한 향수(memento-mori)를 자극하는 것이 아니라 조각의 지속에 대한 자기신념의 발로임을 증명하는 증거물이자 각자에게 고유한 문제의식의 시각적 현시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중 한 작가는 가드닝(gardening)을 주제로 작업한 바 있다. 조각이란 실로 파종(播種)하고 생육시키는 과정과 닮은 부분이 잇다. 거기에는 계획과 관심, 땀과 노력은 물론 육종하고자 하는 식물에 대한 지식이 요구된다. 생각이란 무형의 것이지만 마치 뭉게구름처럼 피어올라 현상너머에 있는 -사실은 현상 속에 깃들여 있는- 본질을 간파하게 만든다. 물질을 가공하는 일은 정원을 가꾸는 일 이상의 성실함을 필요로 할 것이다. 더욱이 교본(敎本)이 없는 작업의 세계에서 중요한 것은 사고의 유연함과 개방성일 것이다. 형태를 만들었으되 그것으로부터 사유(思惟)의 줄기를 뻗어나갈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죽은 것이고, 물질의 논리에 굴복한 꼴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평범하지만 의미심장한 제안을 하고 싶다. 성실성이 작업의 가치를 판단하는 유일한 척도는 아닐지언정 그것이 결여된 형태는 결코 감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 조각을 일종의 육종(育種)과도 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유전학적인 품종 개량은 지속적인 관찰과 실험, 지식과 경험을 필요로 한다. 시행착오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자긍심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 최태만
Vol.20020628a | 조각에의 헌신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