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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비유해서 말하면, 오재규의 그림은 소설이기보다는 시에 가깝다. 캔버스에 물감으로 쓴 서정시. 그의 그림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으면 부드럽고 따뜻한 시를 읽고 있는 듯한 기분에 빠져든다. ● 오재규의 그림에서 먼저 눈에 들어오는 색채다. 풍부하고 안정감이 느껴지는 색채는 캔버스의 분위기를 전체적으로 차분하게 만들어주고 있다. 이런 색채감은 아주 천천히 보는 이의 마음으로 전해진다. 여러 가지 색을 반복해서 칠하여 얻어낸 풍부한 색채감, 그리고 그 색채감이 만들어내는 톤과 분위기가 캔버스 밖으로 걸어 나와 우리의 영혼을 부드럽게 감싸는 것이다.
오재규의 그림은 평면적인 듯 하지만 사실은 입체감이 살아있다. 그의 그림이 입체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다양하게 사용하는 재료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여러 가지 천, 실과 끈, 장식용 레이스, 마대 . 이렇듯 그는 제법 많은 재료를 활용한다. 다양한 재료는 다양한 질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다면적인 질감은 다시 그의 그림에 입체감과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이다. ● 색채감과 재료의 질감도 중요하지만 그의 그림에서 더욱 중요한 것은 풍부한 색과 재료를 이용해 표현한 형상들이다. 그는 여러 가지 재료를 자르고 오려서 다양한 사물들을 형상화한다. 그 형상들은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더 나아가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감상하는 시간과 공간에 따라 이미지와 모양, 심지어는 느낌까지 다를 수 있다. 어제는 하늘을 날아가는 새로 보였으나 오늘은 종이 비행기로, 내일은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오재규 그림에 나타나는 형상의 다면성을 발견하게 된다. 형상의 다면성은 그러나 미리 계획되었거나 치밀하게 준비해서 얻은 결과가 아니다. 따라서 형상의 다면성은 즉흥성의 열매라고 표현해도 무방하다. 재즈 음악에서 확인할 수 있듯 즉흥성의 본질은 자유이다. 규칙과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는 즐거움. 이렇듯 오재규는 스스로를 해방시키고, 그 해방감을 회화 언어로 풀어낸다. 그리고는 마침내 우리를 열린 세계, 상상과 자유의 세계로 초대한다. 오재규 그림의 매력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오재규는 자신의 그림에 큰 이야기를 담아내지 않는다. 어떤 의미나 메시지, 철학을 표현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는 마음을 담아낸다. 정서나 영혼의 흔적을 캔버스에 새겨놓는다. 그의 그림에서 현실이나 일상의 고민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는 오히려 현실을 훌쩍 뛰어넘거나 아예 초월해버린다. 오재규는 현실의 저편, 꿈이나 상상의 세계를 그린다. 우리는 그가 그림마다 붙여놓은 수사학적인 낱말에서 이런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꿈, 향기, 마음, 비밀, 나비, 날개, 창, 흔적 . 이렇듯 그의 언어는 거의 대부분 추상언어이다. 몽롱하고 신기루 같다. 개념어가 아니라 감성과 이미지의 언어이다. 그의 그림이 소설이 아니라 시라는 말은 그러므로 옳은 진술이다. ● 오재규 작품은 여성적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의 작품이 힘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그림이 외향적이기 보다는 내면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여성적이라는 것이다. 그의 그림엔 울림이 있다. 그 울림은 그러나 작고 은은하다. 작고 은은하지만 여운이 긴 울림. 클래식 음악에 비유하면, 오재규의 그림은 교향곡이기보다는 소나타나 실내악에 가깝다. 그의 모든 그림은 작지만 영혼을 흔드는 음악 소리를 낸다. ● 캔버스는 오재규의 마음을 보여주는 창이다. 소통과 만남의 창문이다. 작가는 창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그 창문을 통해 우리는 오재규의 내면 풍경을 살짝 들여다본다. 현실과 일상 저편의 창을 통해 그와 세상이 만난다. 꿈과 자유에 대한 대화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 유명종
Vol.20020617b | 오재규展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