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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0606_목요일_05:30pm 타악기 연주가 박재천&미연 공연_조우(遭遇)
갤러리 창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6번지 창조빌딩 Tel. 02_736_2500
메타모르포시스 바라보기 ● 눈은 사물을 바라보는 도구이자 우리의 의식을 여는 하나의 통로이다. 오정선은 「눈」의 이미지로 환원될 수 있는 영상이미지와 설치 작업으로 우리의 의식을 탐험한다. 작가에게 있어서 의식은 정신분석학에서 이야기하는 의식/무의식의 경계의 근저에 자리잡은 원초적 의식인 이드(Id)가 아닌 현상학에서 이야기하는 사유의 일시적 중단으로 의식의 지향성을 통해 드러나는 본질적인 자아(존재)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작품을 탐구해 들어가면 그의 의식은 반드시 이러한 인식구조와 일치한다고 보여지지 않는다. ● 작품「Eager Desire」(1999)에서 간신히 몸을 구부리고 들어갈 수 있는 원통의 어두운 공간과 거미줄과 같이 얽혀있는 낚시줄 사이에서 그 공간을 더듬는 남성의 몸짓은 사회의 굴레에 억압된 인간의 실존과 마주하는 마임이다. 신체보다 작은 원통은 태어나면서부터 짐지워지는 인간의 조건을 암시하고, 어둠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은유하고, 보이지 않는 낚시줄은 삶의 과정에서 얽히게 되는 인간 각자마다의 관계의 망으로, 그리고 바람 소리는 그 속에서 체험되는 내면의 심리를 투영하고 있다. 작가의 말을 빌면 이 작품은 "나약한 인간이 거대한 사회구조에 의해 짐지워진 인격, 도덕, 책임감, 의무감에 억눌린 모습을" 묘사하고 있지만, 또한 자유롭고자 하는 인간의 몸부림과 갈망을 그 안에 담고 있다.
생득적으로 주어진 인간의 굴레를 뚫고 나가고자 하는 인간의 소망을 보여주는「Eager Desire」는 현상학과 맞닿은 실존론의 향수에 젖어들게 한다. 작품「Self」(2000)는 이러한 그의 사유를 강하게 느끼게 하는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금속성의 두꺼운 철문을 사이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서서히 드러내며 반쪽의 얼굴만 내밀고 있는 남성의 모습은 대면하는 어떤 상황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심리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은 이번에 전시되지 않지만 '모니터를 중앙으로 하여 한편은 삶의 흔적을 발자국으로 남기고 다른 한편은 미완의 생을 의미하는 백색의 투명한 석고로 설치한'「Path, Journey」(2001)의 작품과 그 연결고리를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연계속에서「Self」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망설임을 나타내며, 그 미지의 영역은 일상의 사유의 뒤편에 놓인 또 다른 자아, "나와 타인 사이에 놓인 거리"를 표현하고 있다. ● 이러한 그의 의식은 이번에 전시될 작품「Duality」와「Two Channels(Portrait)」,「Contemplation」에서 다소 변화된 사유를 엿보게 한다. 먼저「Duality」에서 빨간 입술의 영상물과 청색 입술의 영상물로 대비시켜 이중적인 인간의 심리를 보여준다. 각막의 이미지로 조형화한 아크릴 박스안의 빨간 입술은 일반적으로 에로틱한 이미지로 연상되어 퇴폐적인 이미지에서 악의 이미지를 느끼게 하는 것과 달리 찬송가의 소리로 선의 이미지를 비유하고 있다. 청색 입술은 색의 이미지에서 순수함과 칸딘스키의 초월적 의식을 의미하는 것과는 달리 자동차 소음과 일그러진 입의 형태로 악의 이미지를 조형화한다. 즉 작가는 청색 입술의 영상이미지에서 거짓된 인간 심리의 위축되는 모습을 섬세하게 표현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성은 서로 다른 본성이 아닌 그 이면에는 동일한 내면 의식, 원초적 의식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형상이 왜곡되지 않는 붉은 색의 입술은 선을 상징하며 악의 이미지는 왜곡된 푸른 입술로 나타난다. 아크릴 원통 안에서 영상은 인간 내면에 내재된 뫼비우스띠와도 같은 인간 존재의 원초적 양면성을 드러낸다."
이중적인 대비를 통한 내면 의식의 탐구는「Two Channels (Portrait)」에서 다른 의식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Two Channels (Portrait)」는 마임 배우가 의자에서 잠이 드는 모습과 하얀 밴드로 나비와 별과 입체적인 삼각형의 기호를 공연하고 다시 잠든 모습으로 돌아온다. 칼라의 잠든 모습과 흑백으로 기호들의 연출은 일상에서 의식이 통제되지 않는 꿈의 세계로의 전환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꿈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나비는 장자의 제물편에 장주(莊周)의 고사에서 '인간인 나'와 '나비'와의 존재 구별은 만물의 무한한 변화속의 한 양상에 불과하다는 구절을 연상시키며, 삼각형의 기호의 공연과 화면의 반복은 시간의 순서로 진행되는 일상의 의식 차원(선적인 차원)과 대비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공존하는 다차원적인 의식 구조와 불교의 순환적인(되풀이되는) 사유관을 암시하기도 한다. 제목에서 암시하는 'Channel'은 TV를 시청하는 사람이 같은 공간일지라도 채널을 달리함으로써 다른 영상물을 볼 수 있듯이 사람의 관심에 따라 다른 내면 의식구조로의 경험이 가능함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자신이 지닌 무의식의 다른 시공간을 '나는 7개의 다른 채널을 가지고 있다'고 표현한 빌 비올라(Bill Viola)의 말을 빌어 의식아래에 존재하는 내면 세계를 표현하고자 하며, 꿈을 통해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간 인간은 무중력의 상태에서 공간을 부유하듯 얽매임 없이 편안하고 자유로운 존재로의 변화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조형물 앞에 서있는 순간 모니터가 부착된 여백의 아크릴 거울에 자신의 이미지가 비춰짐으로써 일상(현실)의 의식/각성되지 않은 의식(꿈)의 공존을 반추해보게 된다.
작품「Contemplation」은「Two Channels(Portrait)」에서 꿈에서 변형되는 의식이 상상이나 환상이 아니라 자아와는 다른 의식의 존재일 수 있음을 눈의 이미지와 각막 속에 어리는 그림자로 영상화하고 있다. 각막 속의 빛은 탄생을, 그림자의 영상은 개별자(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하며, 눈은 그림자의 탄생과 소멸을 지켜보는 이미지로 형상화되어 주시자의 이미지를 암시한다. "인간 존재의 모습은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관조의 시선 속에 신체의 그림자로 대상화되었으며, 걷는 동작, 멈춰진 상태, 뛰는 동작, 생각에 잠긴 모습 등의 다양한 동작의 그림자를 채집하고 교차 편집하여 역동적 움직임을 표현하였다." 이 작품에서 눈은 삶에서 우리의 경험이 각막에 맺힌 사물의 지각을 통해 인식되기에 '깨어있는 인간의 의식'과 '인간의 탄생과 소멸을 지켜보는 보이지 않는 힘'을 이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또한 각막 속의 그림자의 소멸은 땅으로 돌아간다는 이미지와 함께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암시하며, 그럼으로써 보이지 않는 힘은 개체와 우주의 질서를 운행하는 힘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들 작품들에서 작가가 탐험하는 인간의 의식은 '언어' 뿐만이 아니라 몸짓이나 그밖의 다른 행위를 통해서도 교류가 가능한 것으로 자신의 울타리에 갇힌 실체가 아니라 개아의 망각을 통해 '나'와 '우주'와 일체감을 이루는 노장의 사상과 선(禪)의 의식에 가깝다. 이러한 인식 구조에서 비춰볼 때 나와 타인은 분리된 실체가 아니며, 우리의 삶은 나로 인해 드리워진 그림자만큼 타인과의 거리를 만들고, 그럼으로써 자신속에 불안과 두려움을 낳는 것이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인간의 자유로움은 이러한 사유로의 전환을 통해서 가능하며, 아마도 그 긴 여정의 길 위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 조관용
Vol.20020611a | 오정선展 / OHJUNGSUN / 吳政宣 / video.install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