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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공원 기획전시실 부산시 중구 영주동 산10-16번지 Tel. 051_642_1060
영화 『그랑블루』의 한 장면. 어느 날 밤 문득 잠이 깬 주인공은 천정에서 바다가 쏟아지는 환각을 경험한다. 깊고 푸른 물이 그의 몸을 완전히 감싸자 돌고래와 열대어가 헤엄치는 심해가 펼쳐진다. 그는 안전함과 편안함을 느끼며 자꾸만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심연은, 어두운 곳이다. 바다는 종종 우리에게 낯설고 신비한 곳에 대한 동경과 원형적 공간으로의 회귀라는 이중의 성격으로 다가온다. 임영선의 작업을 보면서 『그랑블루』를 떠올린 것도 그녀의 바다 역시 이와 비슷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 우리가 본능적으로 바다에 이끌리는 것은 모든 생명이 그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의 바다 역시 그 푸른색이 주는 일차적인 느낌은 어머니의 자궁과 같은 편안함이다. 작품마다 조금씩 색감을 달리하는 바다의 깊고 푸른 이미지가 그녀의 작업을 지배한다. 그리고 바다 속에는 항상 인간의 모습이 있다. 주로 작가 자신의 이미지며 때로는 어머니와 자신이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그녀와 어머니는 사방이 해초로 둘러싸인 안락한 바다 속에서 편안하게 서로를 의지하면서 앉아있거나 헤엄치거나 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해파리에 감싸이기도 하고 산호초를 침대삼아 누워있기도 한다. 바다나 해초 묘사의 간략함에 비해 사람의 모습은 단순화되기는 했지만 현실적이다. 그녀의 작업이 단순히 환상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체험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그녀는 거동이 불편하신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애정과 연민으로 바다 속의 보금자리를 만든다. 물은, 종종 고통의 치유를 상징하기도 한다.
하지만 바다는 안식만이 아니라 미지의 공간을 향한 여행이나 모험의 이미지를 갖고 있기도 하다. 그녀의 바다 역시 한편으로는 '다른 곳'을 향한 동경이나 떠남을 암시하고 있다. 이 점은 전체적으로 평화롭고 소박한 분위기를 언뜻 동요시키는 푸른색의 강렬한 색감에 의해서도 표현된다. 그녀의 바다가 따사로운 해변이 아니라 차가운 심해라는 점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녀가 뉴욕에서 작업한 비디오 작품 「회귀」 속에서 결국 떠남과 돌아옴의 장소가 하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다. 그녀는 뉴욕에서 홀로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외로움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으로 힘들어하던 주인공은 어느날 코니 아일랜드의 바닷가에서 놀고있는 한 소녀의 모습을 보고 평안을 찾는다. 어린시절 어머니와의 추억이 그곳에 다시 펼쳐진다. 커다란 원색 띠로 이루어진 그림을 그리고 그 속에 눕는 주인공의 영상이 그 위로 교차된다. 고향 부산에서 멀리 떨어진 지구의 반대편 뉴욕에서 그녀가 결국 돌아간 곳은 어머니의 품과 같은 바다였다. 그녀가 가고싶어했던 '다른 곳'과 한편으로 또 그리워했던 고향은 결국 같은 장소였던 것이다. 다른 곳으로 가되 그곳은 결국 그리움의 장소라는 것.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있는 바다'의 이미지를 통해 떠남과 돌아옴의 소박한 화해를 꿈꾼다. 그곳은 현실과 환상이 조화를 이루는 마법과 같은 공간이며 갈등이 해결되는 위안의 장소이다.
이번 전시는 그녀가 한국에서 처음 갖는 개인전이다. 그녀는 대학 졸업 후 중국으로 떠났고 그곳에서 판화를 공부했다. 북경에서 열었던 첫 번째 개인전에서 그녀는 소박한 농민들의 모습과 동심을 간직한 어린아이의 얼굴들을 그렸으며 정교한 표현력을 살린 석판화도 보여주었다. 중국에서 돌아온 이후 그녀는 다시 단신으로 뉴욕으로 건너갔고 거기서 비디오 작업을 배우는 한편 바다의 모티브를 담은 작업을 시도했다. 그동안 그녀는 매우 다양한 경험을 했으며 다양한 스타일의 그림을 그려왔다. 하지만 공통된 것도 있다. 인간적인 애정이 담긴 것, 소박하고 자연스러운 것, 평화로운 화해라는 모티브에 대한 관심이다. 중국 시절에 제작한 판화들에서도 노동자와 소시민들의 모습, 어머니와 아기의 행복한 순간 등 이런 관심사를 느낄 수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그린 작품 중에는 어머니의 투병 모습을 그린 비교적 사실적인 스타일의 작업도 있다. 여기서 그녀는 현실에 좀 더 밀착한다. 일부러 감정을 배제하고자 하는 노력도 보이지만 역시 바탕에 깔린 것은 소박한 애정이다. 반전(反戰)을 주제로 그린 「No War」에서도 저항의 강렬함보다는 평화에 대한 소망에 좀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그녀가 뉴욕에 있을 때 9.11 테러가 일어났다). 한 소녀가 고래 등에 타고 바다 속을 여행한다. 'No War'라고 쓰인 조그만 피켓을 들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우리의 시선이 가는 것은 이 여행에서 풍기는 평화로움과 동화적 상상력이다.
바다가 주는 화해의 이미지를 세상 전체에 대한 애정으로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그녀의 작업이 지향하는 또 다른 방향을 보여준다. 그것은 개인적 체험을 넘어 자연과 인간, 평화와 공존이라는 좀더 커다란 세계로 향하고자 하는 의지이다. 바다 풍경 시리즈 역시 내면적 화해라는 차원에 머물기보다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테마로 접근해가고 있다. 대학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사회비판적 태도를 소박성이라는 또 다른 기질과 조화시키려 하는 그녀의 작업이 예전의 리얼리즘 미술이 성취하지 못했던 장을 열어줄 것인지 기대해본다. 또한 앞으로 그녀가 떠남과 회귀의 양면성, 환상과 현실의 행복한, 때로는 씁쓸한 조화를 더욱 박진감있고 개성적인 표현으로 보여줄 것을 믿는다. 아마 우리는, 그녀의 작업을 계속 지켜보고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 조선령
Vol.20020610b | 임영선展 / LIMYOUNGSUN / 林英宣 / painting.vid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