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아트센터 한국화 대기획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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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암 박지원의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라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사통팔달의 거리에서 한 남자가 울고 있다. 연암이 왜 우느냐고 물었다. 남자는 자신은 장님인데 수십 년 만에 눈을 뜨게 되어 동네 구경을 나왔다고 했다. 그런데 도무지 어디가 어디인지 모르겠고 정신이 없어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자 연암은 말했다.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 세 작가의 작업실을 차례로 둘러보면서 나는 문득 연암이 한 말이 떠올랐다. 아무런 매듭없이 흘러가는 일상에 관한 한 나는 장님이 아닐까. 아니 장님처럼 지내기를 원한다는 편이 솔직할 것이다. 감수성의 촉각을 곤두세운 다음 '사는 것은 재미없지만 그래도 그 속에서 재미를 찾아보려는' 주변의 노력들을 바라만 보는 나는 장님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나에게 이들의 작품들은 생활의 순간들과 나를 밀착시켜보라고 제법 유혹을 한다. 이들은 아무런 극적 흥미도 일으키지 않는 일상의 사소한 에피소드에서 희노애락의 감정을 끌어내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일상을 다룬 작품들이라고 해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일상으로부터 벗어나길 꿈꾸는 판타지도 있고, 일상에 천착하는 리얼리즘도 있을 수 있으며 일상에 대한 명상도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이들 작가들의 작품을 굳이 분류하자면 일상 속으로의 침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들은 나로 하여금 나를 둘러싼 일상을 낯설게 그리고 느긋하게 바라보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용히 내 안으로 가라앉으라고 권하는 듯했다. 나는 시끄럽고 소음으로 가득 찬 세상의 분주함 속에서 잠시 조용히 나를 바라보는 기회를 가질 수가 있었다. 비록 그들 작품의 하상(河床)을 이루는 것이 지독한 고독이나 죽음일지라도 나는 그것들을 바라보면서 잠시나마 눈을 감지 않고도 집으로 돌아갈 어떤 힘을 얻을 수가 있었다.
2. 일상성은 1990년대 이후 한국미술을 특징짓는 성격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전세계적으로 미술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현상- 서구 중심의 미술로부터의 이탈, 예술적 규범의 퇴조 등-의 하나인 '삶의 예술'이 한국미술에서, 그리고 한국화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비단 한국화단에만 국한되지 않고 미술계 전반에서 나타난 현상이다. 조각, 설치, 서양화, 한국화를 하는 작가들은 모두 자신의 출신학과와는 상관없이 작품을 제작하며 장르 개념이 무너진 지 오래다. 그리고 이러한 매체와 표현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이미지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증가하는 것과 동시에 삶과 일상성이 부각되기 시작하였다. 한국화에서 이러한 특징들이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까지 한국미술, 특히 한국화를 둘러싸고 있던 여러 가지 경전화(經典化)된 관념들이 사라지기 시작하면서 대신 그 자리를 '지금 여기-현장성과 구체성'에 대한 관심이 차지하게 되었다. 처음 '구체적인 삶'에 대한 관심은 빌딩숲이나 고층 아파트, 공사현장 등 번화한 도시의 모습이나 포장마차, 건물 유리창의 블라인드에서 스며나오는 불빛 사이로 보이는 인간 군상 등을 주로 다루며 도시 소시민의 삶에 대한 연민과 서정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점차 서사성과 리얼리티를 추구하면서 역사와 삶의 풍경을 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한국화에 대한 아무런 선입견 없이 맨눈으로 자신들을 둘러싼 남루하고 사소한 풍경들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다. ● 인습화되고 정형화된 기존 한국화의 형식에서 벗어나 삶의 현장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이러한 경향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을 것이다. 특히 1980년대 초의 민중미술, 같은 무렵에 전개된 수묵화 운동은 한국화가 전통적인 관념에서 탈피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당시에 이루어졌던 논쟁―결국 지필묵은 정신인가 물질인가에 대한―과 함께 한국화에서 매재(媒材)에 대한 탐색은 이미 저만치 시작되고 있었다. 이 논쟁은 서화일치정신이 무너진 현대에도 과연 지필묵 자체나 혹은 이 재료를 사용하는 행위 자체가 동양의 전통적인 회화정신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인지를 짚어보고자 한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지필묵은 단지 다양한 표현가능성을 보여주는 매재의 하나일 뿐이라는 점에 주목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기존의 한국화의 패러다임으로는 포괄할 수 없는 새로운 작품 경향들이 다양하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김덕기, 박재철, 박종갑은 이러한 시대의 세례를 받은 작가들이며 한국화를 둘러싼 갖가지 경전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들 그림의 출발은 자신을 둘러싼 일상, 혹은 바로 나 자신의 삶이다. 그림을 단지 그림으로 보는 이들이 담담하게, 진실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세계는 삶의 속내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는 시선이다.
3. 매일매일 만나거나 마주치게 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나 거리의 풍경, 이것들이 우리들의 인상에 남는 것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일까. 쉼 없이 흘러가는 일상들 속에서 자기들만의 스타일로 작품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일까. ● 이들의 작품 속에는 어떤 극적인 투쟁이나 가열찬 자기 주장이 없다. 어떤 고조된 위기감이나 일탈에의 욕구가 나타나있지 않다. 단지 일상을 조용히 들여다보기만이 남아 있다. 그저 아이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거나, 쇼핑을 가거나, 혹은 길가의 화분들을 들여다보고 보도블록 위로 날아가는 나비를 쳐다보는 등의 지극히 사소한 모습들이 마치 하나의 정물화처럼 담겨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들의 작품은 정신성, 한국성과 같은 기존의 동양화로서의 존재론이 결여되어 있다고 비판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 그림들 속의 일상적 장면들은 금세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는 순간 관찰자의 뇌리 속에 잔잔한 심상으로 남아있다. 특별히 화려한 제스처를 취하거나 강렬한 표현을 하지 않은 채 그저 오래 묵은 글처럼 낮게 가라앉아 있다. 그래서 이 작품들은 자기 주장의 목소리를 직접적으로 내질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품들이 주는 파문이 오랫동안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일까. ● 김덕기는 기억에 집착하는 작가이다. 그의 그림들은 지워지기 쉬운, 그래서 언제 떠날지 알 수 없는 행복을 구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리고 그가 보는 행복, 혹은 사랑은 그것을 소유하고 있는 지금의 순간보다 과거로 흐른 뒤 남는 감정 속에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의 작품은 마치 앨범 속 사진들의 보여지는 모습에 대한 미련과 같다. 그의 그림은 그림일기이다. 여러 번 칠해서 마치 닳은 삼베 조각 같은 느낌을 주는 바탕 위에 그려진 집의 풍경은 낡은 사진 같이 포근하다. 아들의 사탕이며 장난감, 아내의 화장대며 갖가지 색채로 그려진 아기자기한 정물화도 매우 사랑스럽다. 산, 시골집, 나무, 뛰어 노는 아이 등은 사랑, 모성애, 가족 등을 이야기하며 보는 사람과 쉽게 친밀감을 형성한다. 그러나 김덕기의 작품 속에서 일상은 무언가 만들어진 듯한 느낌을 받는다. 소중한 노스텔지어를 위해 투박한 일상까지도 팬시화시켜 놓았기 때문은 아닐까. 그가 회상하는 커다란 상처-죽음과 죄, 가난-를 받고 난 뒤에는 자잘한 행복도 훌륭한 위안거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 담긴 애절한 감정도 오랫동안 동감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혹시 자신의 그 애틋한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 포기한 것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한번쯤 되돌아볼 때가 아닐까.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그의 기억의소산이고 작가의 자화상이거나 그의 또 다른 현현(顯現)으로 이해되는 데에 머무르고 있다. 이제는 더 나아가 그의 기억의 단면들에 대해서 다른 관객들이 다각적으로 해석할 여지를 남겨놓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 박재철의 그림은 천성적으로 순박한 마음씨를 지닌 사람을 만날 때처럼 조용하고 편안하며 보는 사람들을 느긋하게 만든다. 그러나 고요하고 평화로우며 무심한 듯한 그림 속에는 지나가는 눈길을 붙잡는 무엇인가가 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의 어느 한 순간 갑자기 시간을 정지시켜놓은 듯한 화면에서 풍기는 낯설음 때문이다. 이 낯설음은 보는 이를 무언의 힘으로 어떤 적막함 속으로 가만히 옮겨 앉게 한다. 그는 주위를 낯설게 응시하는 데에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일상에서 어느 순간 다른 차원으로 비상하는 듯한 순간을 맛보게 한다. 화면에 미묘한 반향을 일으키는 초록 풀잎과 점점이 찍혀져 있어 뭉글뭉글한 느낌에 실체감이 없는 먹, 그리고 나머지 하얀 여백이 어울려서 비현실적인 느낌을 배가시킨다. 그래서 작가는 일상의 고독과 권태를 이야기하지만 보는 이들은 그속에서 힘을 느낀다. 이 정지된 듯한 고요 속에서 현실의 비속함에 대면할 수 있는 힘을 얻고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 박종갑 역시 1996년에 가진 『일상의 힘-체험이 옮겨질 때』전람회 출품에서도 알 수 있듯이 비루한 일상에 대한 응시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위의 두 작가와 달리 일상은 그에게 표현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일상은 그 위에 무엇인가가 그려져야 할 하얀 벽이다. ● 그 하얀 벽 위에 그가 그리는 것은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자아이고 부유하는 영혼들이며 순례하는 군상들이다. 그에게 자아는 완벽한 창조물이 아니며 비연속적이고 모순된 것이다. 이는 그가 죽음을 항상 염두에 두고 그것을 강렬하게 느끼면서 시간의 무화작용 가운데 점차 마멸해가는 것에 대해서 위태로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지워지기 쉬운, 그러나 아직은 완전히 떠나가지는 않은 기록을 남기고 싶어하는 듯하다. 때문에 그에게 있어서 먹은 음울하고 허무해 보이는 현재를 표현하는 데에 매우 적절한 재료이다. 그 위에 거칠은 터치와 무심한 농담의 번짐이 어울리면서 두렵지만 가까이 다가가지 않을 수 없는 삶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작가들 모두 작품 속에, 혹은 작품 외적인 부분-도록에 실린 말들-에서라도 문학적인 요소를 끌어들여 화면 속에서 못다 한 말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조형예술의 영역에서 추방되었던 문학적 요소를 다시 화면에 끌어들이는 것을 굳이 문인화의 전통에 빗댈 것은 없다. 이들은 단지 표현의 영역을 확장시키기 위해 , 작품의 의미를 더 풍부하게 만들고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이다. 그만큼 일상사에 대한 작가의 느낌이나 생각의 편린들과 같이 관객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그만큼 삶에 대해 진지하고 열정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4. 작품들을 통해-보거나 혹은 그리거나- 아름답다고 한 번 느끼게 되면 그 후에는 그와 유사하다고 생각되는 사물들을 계속 찾아다니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스스로 살아있는 실존으로서 자신을 증명할 수 있게 된다. 즉 이러한 과정 속에서 생활의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 과연 이들이 즐겨 그린 그림들은 무엇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삶과 예술을 관통하는 구체적인 일상사에 대한 사랑, 그 낱낱에 가라앉아 있는 고요의 힘, 그 고요한 힘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그림을 보면서 진정으로 강한 것은 충격이 아니라 여운이라는 생각을 했다. ■ 김경연
Vol.20020605a | 3인의 수묵, 3인의 표정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