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_이 영혼을 기억하라

김현숙展 / painting.installation   2002_0513 ▶ 2002_0530

김현숙_이 영혼을 기억하라Ⅰ_베트남 전통의상, 붉은천 등_가변크기 설치_2002 김현숙_이 영혼을 기억하라II_종이박스에 혼합재료_2002(뒷면 회화작품)

프랑스 쁘와띠에 les couleurs du temps 187 Grande rue 86000 Poitiers France

나는 인류미래의 공동의 염원인 '평화'를 그림과 설치작품을 통해 표현한다. ● 나는 전쟁의 반대 개념으로써의 평화가 아닌 나와 타자-사람이나 자연, 문화 그 외의 내가 아닌 모든 것-를 존경하고, 생명의 값어치를 존중하며 진정한 의미의 인류공동체를 위해 우리 스스로가 내면의 폭력을 제어하는 그런 평화를 원한다. ● 오늘날 전쟁은 '평화의 이름'으로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수행되고 있으며 우리의 가장 가공할 무기는 '세계의 평화를 지키고 보장하기 위해서' 만들어져 왔다. 우리는 전쟁능력을 무자비하게 키우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은 평화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왜곡된 가치로서의 '평화'와 인간야만의 본성의 외면화로써의 전쟁이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에 가져다 줄 것은 '평화'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인류는 긴 시간동안 이루어 왔던 모든 문명의 긍정적 부분을 스스로 소멸시킬 것이다.

김현숙_상처 III_종이박스에 혼합재료_2001

베트남전쟁이라는 프리즘 ● 베트남전쟁(1961-1975)으로 불리는 베트남 민족해방전쟁에 한국군은 자유민주주의 수호라는 기치아래 미국의 용병으로 참전하였다. 인류역사상 어떠한 명분으로도 합리화 할 수 없는 '더러운 전쟁'이었던 베트남전쟁은 인류의 도덕의지를 시험한 '양심의 무대'였다. ● 나는 이 전쟁에 직접 참전하는 댓가로 인해 경제적 성장의 발판을 마련한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성장했다. 전쟁이라는 폭력이 빚어낸 피의 결과물로 경제성장의 혜택을 받으며 자란 세대인 셈이다. 타인의 목숨으로, 내 배를 불려도 된다는 폭력적 논리는 아직도, 우리들에게 또다른 베트남전쟁을 양산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던져주고 있다. 그것은 92년의 걸프전과 가장 최근의 미국의 아프간의 폭격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 1999년5월6일자 한국의 시사주간지 한겨레 21에는 베트남 구수정 통신원의 「몸서리쳐지는 한국군 \ 256호」라는 제호의 기사가 실렸다. 베트남전쟁이 그저 지난 세대의 일로만, 역사적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갈 즈음 그 기사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베트남전쟁의 진실을 구체적인 자료로 증거했다. 한국군은 베트남의 도처에서 민간인에 대한 무분별한 학살을 자행했다. 미국이 베트남에서 「밀라이 학살」을 한 것처럼. 이 기사는 베트남에서의 무고한 양민학살은 없었다고 믿고 있던 모든 한국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1950-1953년까지 한국전쟁을 치른 한국에서도, 미군에 의한 무고한 양민학살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진상규명과 미국측에 대한 진실과 책임규명 등의 사회운동이 있던 터에, 우리가 받은 피해가 아닌, 우리가 타인에게 가한 피해에 대한 증거는 진실로 '전쟁'이라고 하는 폭력이 가지는 야만성을 다시한번 확인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과 폭력은 시간과 장소와 인종과 종교, 사람을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다는 것과 무고한 양민학살이라는 인류의 비극을 동반한다는 사실도 확인하게 된 셈이다. ● 나는 이 시기에 베트남을 방문하였다. 이 기사를 쓴 한국인 통신원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나는 기사에는 마저 싣지 못한 나머지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신문의 기사로만 보던 것을 베트남 정글의 한복판에서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듣고 확인한 모든 것은 예술가인 나의 가슴에 크게 박혀들었다. 나는 이러한 폭력의 세기와 그 폭력이 남긴 흔적과 상처 앞에 '예술은 너무도 허약하지 않은 가' '너무 호사스럽지 않은 가' 하는 회의마저 들었다. 나의 모든 것을 뒤흔들어 버린 이 '베트남'과의 충격적인 만남은 예술가인 나에게 『한국-베트남 평화전시회』(가나아트스페이스, 2000년 6월)를 준비하게 하였다. ● 베트남작가 20여명과 한국작가 50여명이 참여했던 이 전시는 부끄러운 한국의 역사-베트남에서의 한국군의 양민학살-를 사죄하고, 한국과 베트남이 인류평화의 세기를 열어가는 주춧돌이 되기를 열망하는 예술가들의 메시지를 담았다. ● 내가 베트남전쟁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인간내면의 야만적 폭력성에 문제제기 하고, 생명존중과 공동체, 평등, 존중과 조화로운 삶을 인류보편가치의 중요성으로 재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 여기서 내가 이 전쟁을 그리는 이유는 내가 이 전쟁의 가해국의 후손이라는 것과 무관치 않다. 이 전쟁의 가해국가인 한국의 사죄와 반성적 성찰이 보다 분명하고 확실하게 진행된다면, 미국도, 또한 미국보다 먼저 베트남과 전쟁을 치렀던 프랑스(1858-1954)도 폭력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김현숙_전쟁Ⅰ_컴퓨터 프린팅_가변크기 벽면부착_2002

인류보편의 가치로서의 평화만들기 ● 만약 우리가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한다면, 우리의 목표는 세계의 오염과 불평등과 빈곤을 줄여나가고, 자신 내면에 숨은 야만의 본성을 제어하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 만약 인류가 전쟁에 투자한 모든 것들을 평화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데에 쓴다면, 우리가 추구하는 힘이 정복이 아니라 양육과 친교를 위한 능력이 된다면, 또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이 생명에 대한 존경에 토대를 두고 모든 존재가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 될 때, 우리는 숭고한 인간 정신을 떠받들게 될 것이다. ● 그러나 나는 모든 종류의 평화-미국이 주장하는 팍스 아메리카나 등-를 옹호하고, 모든 전쟁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평화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전쟁으로 인해 무수한 양민들과 어린이가 죽어가고, 또한 문화유산의 파괴가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전쟁은 또다시 불평등과 억압의 구조를 양산한다. 더 많이 가진 자가 조금 가진 자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탐욕이 전쟁을 부추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자본주의의 냉정한 현실이다. 모든 곡물의 80퍼센트가 가축사료로 쓰이고 있는 미국이 있는가 하면, 하루에도 35 000명의 어린이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 곳이 이 지구이다. ● 이러한 현실에서, 어린이의 아사를 막기 위한 전쟁, 연약한 잎사귀를 지키기 위한 작은 것들의 전쟁, 제3세계에서 더 이상 수탈 당하지 않기 위한 주권을 위한 전쟁, 어리고 약한 것들이 더 이상의 폭력을 참기 어려워 스스로 연대하는 전쟁에는 나도 참여할 것이다. 이것은 전쟁이라는 이름이 붙은 '평화'로의 전진임을 알기 때문이다. ● 내가 내 작품에서 흰 비둘기가 한가로이 날아다니고, 화면 내에서 안온한 풍경이 펼쳐지는 그런 평화의 이미지를 그릴 수 없는 이유는 아직, 우리현실이 그런 풍경을 그리게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음을 알기 때문이다. 가상현실 속의 평화 그리기만으로, 우리가 맞이할 수 있는 평화란 없다. 실제로 선진국의 물질적 풍요가 더 많은 가난한 나라의 고통 위에서 가능한 것임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시야를 넓힐 때 진정한 평화가 가능할 것이다.

김현숙_전쟁III- M16_붉은 종이에 컴퓨터 프린팅_벽면부착_2002

폭력에서 화해로 ● 나는 나의 작품으로 더 이상 전쟁이 현재에는 없다고 믿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안일한 일상에 경종을 울리고 싶다. 전쟁은 그저 폭탄이 터지는 그 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내면의 야만적 폭력의 본성이 이성으로 다스려지지 않을 때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 스스로 평화를 준비해 가지 않으면 그 누구도 우리와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다는 메시지를 인류에게 주려한다. 나의 예술은 하나의 장르에만 국한되지 않고, 페인팅으로, 설치작품으로 때때로 나의 글과 사회참여 활동으로 가시화 될 것이다. ■ 김현숙

Vol.20020601b | 김현숙展 / painting.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