水 좋은 곳

손성진展 / mixed media   2002_0515 ▶ 2002_0528

손성진_水 좋은 곳_아크릴, 스티커, 선팅_95×120cm_2002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대안공간 풀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2_0515_수요일_06:00pm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Tel. 02_733_9636

공공 퍼블릭 ● 목욕탕은 이제 휴식 공간이 되었다. 그런 요구에 맞춰 온탕, 냉탕, 쑥탕, 옥탕, 습식, 건식, 맥반석, 수정 싸우나, 황토방, 원적외선 등등, 일일이 열거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양하고 세밀한 기능탕들이 개발되었다. 요즘은 녹차탕과 커피탕도 있단다. 목욕탕의 성공은 이런 기능의 단순한 도열만으로는 어렵다. 일주일간의 피로를 1시간만에 혹은 어제의 숙취를 30분만에 풀고자하는 손님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최상의 휴식을 뽑아낼 수 있도록 공간을 효율적으로 배치해야 한다. 하지만 휴식을 위한 이러한 효율의 극단성은 자칫 휴식의 안락함을 방해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정교하게 마감된 타일의 비정함을 성공적으로 감추기 위한 두꺼비상이나 여신상과 같은 정서적 커튼은 필수적이다. 이런 정서적 어프로치는 배치의 합리성과 함께 사업성공을 위한 이중적 열쇠이다. 이 모든 것이 갖춰졌다고 해서 과연 목욕탕은 성공할 수 있을까?

손성진_水 좋은 곳_컬러인화_2002

목욕탕이 제공하는 최상의 서비스를 수동적으로 즐기는 손님들의 멍한 표정에서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 목욕탕 주인은 감이 좀 딸리는 사람일 것이다. 1시간 동안의 성공적인 휴식이 다음 한 주간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현실에서, 낙오되지 않는 목욕탕이 되려면 싸우나에서 땀을 짜내듯이 능동적으로 휴식을 짜낼 수 있도록 손님들을 자극해야 하고, 온탕과 냉탕을 수시로 들락거리는 저 손님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꿰뚫어 볼 줄 알아야만 한다. 혹, 당신이 목욕사업을 생각하고 있다면 머리를 말리는 사람의 거울 속 앞모습에서 여유를 발견하더라도 거울 밖의 뒷모습에 흐르는 긴장감을 놓쳐서는 안 된다. ● 이런 목욕탕의 성공조건은 여가에서조차 경쟁의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에 대한 반증일 텐데, 이런 경쟁강박증의 원인을 IMF 직전에 방송된 모 재벌 광고 카피라잇이 간결하면서도 명확하게 말해 준다. ● "1년을 10년 같이, 10년을 100년 같이 사용했습니다." ● 이 얼마나 간결한 문장인가? 선진국 200년의 성과를 20년 만에 따라잡기 위해 우리는 열심히 일했다! 하지만 '열심히'에 방점을 찍는 이 목소리의 명확함 뒤에는 10년의 성과를 1년 만에 100년의 성과를10년 만에 따라잡기 위해 필요했던 자본의 속도를 망각케 함으로써, 빨리 달리기 위해 가차없이 버렸던 수많은 가치들이 은폐돼 있다.

손성진_유혹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가이 있음_거울, 빗_95×37cm_2002

한국정치경제가 선택한 초고속 압축성장 모드는 고강도의 노동을 강제했고, 노동 재생산을 위한 여가를 자극적이고 획일적인 방식으로 결정지었다. 이런 문화적 획일화는 다양성에 대한 민주적 논의 자체를 혼란으로, 비효율로 일축함으로써 초고속 압축성장의 걸림돌을 다듬는 문화적 공구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결국 차이를 희생시켜 얻은 자본의 속도는 문화적 획일성이라는 가속도에 의해 탄력을 받게 되었고, 그 가속도는 '남들이 좋다면 무조건 따라한다!'라는 단순한 코드의 힘으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취향의 획일화라는 문화적 척박함이 성찰의 부족 탓으로 매도되어서는 안 된다. 취향의 획일화라는 집단적 선택은 결국 실패의 확률을 낮추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리라는 경제적 기대심리로부터 비롯된 것일 테고, 상황이 이렇다면 성찰 부족은 오히려 취향의 획일화로부터 초래되지 않았나 하는 반문을 해봐야 한다. 취향이란 것도 시간이 있어야 개발할 것 아닌가? 우리에게 언제 성찰할 시간이 허락되기나 했었나? ● 분단체제 하에서 가장 중요한 생존전략이 '같은 편임을 강력하게 입증하는 것'이라는 강준만의 주장은 취향의 획일화가 경제적인 요인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회적 산물임을 시사한다. ● 동일성에 의한 배제와 포섭의 원리는 지배체제 유지를 위해 어느 사회에서나 작동하지만, 분단상황의 정치적 억압은 개인들로 하여금 배제와 포섭이라는 동일성의 원리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하도록 몰아붙였다. 이것은 집단의 일원이 되기 위해 스스로 개인적 차이를 포기하는 것이고, 타집단의 이질성을 적극적으로 억압함으로써 자신이 집단의 일원임을 확인시키는 형태로 나타난다. ● 공중 목욕탕에서 알몸이 주는 시각성은 개인들로 하여금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은유를 환기시키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물질적이고 구체적인 차이를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동등성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논리적 비약이 필요한데, 이런 비약을 가능하게 한 건 아마도, 자신이 처한 불평등을 외면하는 한이 있더라도 집단의 일원으로 남아야 살 수 있다는 생존전략 때문이었을 것이다.

손성진_水 좋은 곳_컬러인화_2002

차이를 욕망하면서도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억압해야하는 이 신경증은 차이에 대한 내장적 거부반응으로 나타났고, 이것이 취향의 획일성과 결합하여 일으킨 화학반응적 성공은 결국 국민가수, 스포츠영웅 찬호, 세리라는 대중적 기호를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 취향의 획일성은 정치적 억압과는 달리, 차이를 인정하는 다양한 개인들의 자율적 결사를 정서적으로 봉쇄함으로써 타자들에게 행사되는 국가폭력에 도덕적 미학적 면죄부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취향의 획일성이 초래한 공공적 실험의 부족은 냉전이데올로기에 피폐해진 정서적 공황으로부터 봉건적 퇴행을 부채질하였고, 자본의 급진성에 의해 무주공산이 된 공공적 권리를 국가권력에게 내어줌으로써 차이를 억압하고 차별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의 고리가 되었다.

손성진_조폭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53×45cm_2002

이제 세월은 변해 차이를 즐기는 세상이 됐지만, 과거의 신경증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으로 인해 차이는 고립되고 연대라는 말에 설레발 치는 현실에서, 알몸으로 아무 말 없이 자기 할 일만 하고 목욕탕 문을 나서는 사람의 뒷모습이 중첩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 하지만 이런 현실이 우리가 목욕탕에서 원했던 정서적 연대를 향한 갈망 자체를 무효화시킬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갈망했던 것이 비록 허구였을지라도, 갈망하는 힘이야말로 차이를 인정함으로써 자율적 연대를 실험할 수 있게 하는 추진력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실험의 성공과 실패담을 통해서만 '알몸으로 만난다는 것'이 불러일으키는 은유의 힘을 현실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연대를 향한 갈망이 포기되는 순간, '함께 목욕을 하다' 라는 말이 갖는 긍정성은 그 부정적 힘과 함께 사라질 것이고, 결국 한갓 단어들의 무의미한 나열로 전락할 것이다. ■ 고승욱

Vol.20020527a | 손성진展 / mixed media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