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적 기억과 상상

구본아展 / KOOBONA / 具本妸 / painting   2002_0501 ▶ 2002_0507

구본아_숲길Ⅰ_한지에 수묵_2002

초대일시_2002_0501_수요일_06:00pm

덕원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번지 Tel. 02_723_7771

파묵의 조형성과 매체로서의 수묵, 정신으로서의 수묵전통성 강한 수묵이 현대 미술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효한 매제인가 하는 물음은 비단 어제오늘에 새삼 제기된 것이 아니다. 이러한 물음의 이면에는 일종의 회의적 자조를 내재하고 있는 동시에 간절한 자구의 의미를 함께 담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다. 주지하듯이 수묵은 유구한 역사 발전 과정을 통하여 독특한 심미관과 감상체계를 확립한 것이다. 형이상학적 내용을 지닌 재료관과 문인적 교양을 바탕으로 한 독특한 조형 형식은 서구 미술과는 뚜렷이 구별되는 조형적 특징을 형성하였다. 근대화 이후 급격한 사회 환경의 변화에 따른 심미관, 가치관의 변화는 조형 수단으로서의 수묵에 대해서도 새로운 가치를 요구하게 되었으며, 수묵이 현대적 매제로서 여전히 유효한가 하는 물음은 바로 이러한 새로운 가치 변화에 따른 적응 여부를 신중하게 가늠해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오늘날 비록 수묵의 위상이 예전의 그것처럼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수묵은 여전히 한국화의 가장 보편적인 재료로써 그 위치를 확보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는 수묵 자체가 지니고 있는 전통성에서 비롯된 일종의 관성이라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수묵을 대체할 만한 효과적인 새로운 매제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수묵화 작업이란 바로 이와 같은 두 가지 상충되는 가치에 대한 확인이자 새로운 접근 방식의 모색이라 할 수 있다.

구본아_숲길Ⅰ_한지에 수묵_2002_부분

작가 구본아의 작업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묵운(墨韻)이 짙게 풍기는 작가의 작품 세계는 수묵의 발전 과정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으로 흥미로운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양 회화의 특징을 선에 의한 조형이라 한다면 이는 원(元)의 조맹부(趙孟兆頁) 이래로 내려온 전통을 말하는 것이다. 서예와 회화의 근본을 같은 것으로 여기는 이들의 경우 선의 기능을 강조하고 담묵으로써 운(韻)을 설정하는 화풍을 형성하였다. 명(明)에 이르러 서위(徐渭), '공현' 등이 상대적으로 수묵의 효과를 중시하는 이른바 중묵경필(重墨輕筆)의 경향을 이루어 내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먹의 해방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수묵은 파묵, 발묵과 같은 파격적 조형의 운용이 가능케 되었다. 먹색의 변화에 주의하고 그것이 이루어내는 유현한 효과를 포착하고자 하는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경향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임리'라는 말은 수묵의 효과를 형용하는 것으로 기운이나 필세가 왕성하여 마치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양을 나타낸다. 작가가 소재로 선택한 해바라기는 과감한 먹색의 운용과 구사로 본래의 생태적 특징이나 조형적 객관성에 앞서 강하고 깊이 있는 먹색의 변화가 두드러지는 것이다. 주로 파묵(破墨)을 이용한 먹색의 변화는 임리의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일정한 기운과 기세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파묵은 수묵의 변화를 추구하기 위한 기법이다. 담묵과 농묵, 혹은 선과 면, 먹과 물과 같이 서로 상대적인 내용으로 본래 지니고 있던 정적이고 평면적인 질서를 파기하여 이루어내는 오묘하고 현란한 변화가 바로 그것이다. 작가의 작업은 바로 이러한 다양한 파묵의 묘를 적절히 구사하여 대상의 객관적 형상이 지니는 제약을 넘어 천변만화하는 수묵 특유의 심미를 추구하는 것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여전히 소재의 형상에 대한 부담감이 작용한 듯 파묵이 지닌 분방하고 자연스러운 운치가 일정 부분 제약되고 있는 점이 아쉽지만 작가가 구사하고 있는 수묵의 깊이와 맛은 긍정적인 것이라 여겨진다. 특히 수묵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 부족으로 야기되는 무책임한 발묵의 가벼움이나 둔탁한 적묵의 탁함이 예사로 보여지는 오늘의 현실을 염두에 둔다면 작가의 수묵에 대한 접근 방식은 건강한 것이라할 수 있을 것이다.

구본아_숲길Ⅱ_한지에 수묵_92×108cm_2002

화면 질의 구축에 있어서 한지를 덧붙여 변화를 주는 것은 감각적인 조형 의식이 반영된 것이라 여겨지는 것으로 근자에 성행하고 있는 매제, 혹은 재료에 대한 관심 고조와도 일정한 연계성이 있다할 것이다. 재료 자체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연구와 실험은 서구적 재료학의 영향에서 기인하는 바가 큰 것이지만 현대 한국화의 새로운 추구 방향 중 하나로 그 결과가 주목되는 것이다. 작가는 한지를 덧붙여 나아감으로써 파묵 자체의 변화는 물론, 모필에 의한 우아하고 부드러운 필선들을 둔탁하고 질박한 것으로 변이 시키고 있다. 공간 자체에 색과 요철의 변화를 설정함으로써 여백의 기능은 보다 적극적인 것으로 전환하며, 파묵에 의한 먹색의 변화로 이루어진 이른바 실(實)의 공간과 대비를 이루어 화면의 짜임새와 긴장감을 더하는 것이다. ● 비록 작가의 작업이 수묵의 역사 발전 단계에 부합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구도의 운용이나 소재의 선택과 표현 등 그 발상의 시발은 여전히 서구 조형으로부터의 일정한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는 비단 작가의 경우에 국한된 특별한 것이 아니라 현대 한국화, 혹은 수묵화가 지니고 있는 두드러진 특징이자 근본적인 문제점이라 할 수 있다. 서구적 조형관과 동양 회화의 전개 방식은 서로 상이한 것으로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상호 충돌하는 모순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전적으로 작가 개인의 매제에 대한 사유방식과 이해의 수평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오늘날 수묵화가 지니고 있는 시대성이나 새로운 가치는 이미 전통적인 수묵의 정신성이나 조형 형식에 있지 않은 것이다. ■ 김상철

구본아_여름에서 가을로Ⅰ_한지에 수묵담채_182×403cm_2002_부분

나는 작업의 개념에 따라 아이디어를 일상 속에서 찾게 되는데 이번 작품에서는 거대한 의미의 자연이 아닌 가까운 곳의 자연을 표현하고자 했다. 기억과 상상의 접점에서 이루어지는 나의 작업에서 '식물적' 기억과 상상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매개체로서 익숙한 자연소재들을 이용하였다. 어느 숲에서나 볼 수 있는 조그만한 풀과 잡초, 나무 등이 관심대상이며 또한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별거 아닌 자연'에 많은 애정이 간다. 식물이 갖고 있는 형태들의 상호보완과 긴장, 단순과 복잡, 혼돈과 질서같은 모순적인 이미지의 교차를 통해 자율적 에너지를 분출하고 싶었다. ● 미세한 것들에 대한 정성어린 배려를 통해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잃어가고 있는 순수한 감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작품에서 일상의 자연을 여러 겹의 시점으로 포개어 놓은 것은 자연의 재현이 얼마나 삶과 밀착될 수 있는지 실험하는 스타일로서, 앞으로는 여러 기억과 필터에 의해 좀 더 과감하게 짜임새 있는 하나의 통일적 선율을 이끌어 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작품은 결과가 아니라 진행의 과정이며 접근하려는 의지의 표출이며 살아있다는 솔직한 표현이라는 믿음에서 용기를 얻는다 … ■ 구본아

Vol.20020511a | 구본아展 / KOOBONA / 具本妸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