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공간

이강욱展 / LEEKANGWOOK / 李康旭 / painting   2002_0430 ▶ 2002_0507

이강욱_Invisible Space-02021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262cm_2002_부분

초대일시_2002_0430_화요일_06:00pm

한전프라자갤러리 서울 중구 남대문로 2가 5번지 Tel. 02_758_3494

한 작가의 첫 전시의 서문을 쓰는 것은 특별한 일임에 틀림없다. 새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 같은 신선함이 거기에 있고, 동시에 시각적 영역에만 있어 왔던 이미지를 말로 처음 풀어내는 작업으로, 세상에 보여지지 않은 수줍은 그림을 처음 소개한다는 뜻에서 이미지와 말의 중계자쯤 되는 느낌이 있다. 참고 도록이 없다는 건 글쓰는 이에게 자유로움을 주지만, 책임감 또한 무겁다. ● 조직세포와 신경계를 마치 실험실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것 같은 이강욱의 처음 작업은 그가 세포라는 주제를 작품 모티프로 잡은 99년경부터이다. 관심은 주로 개념적 매료에서 시작되었다. 생명체의 단위 입자로서의 세포는 전체를 이루지만 그 부분들을 합산한다고 해서 전체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즉 전체는 개체들의 합산 이상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세포며 신경계에 관심을 갖게 되었단다. 그리고 이강욱에게 이러한 개체와 전체 사이의 유기적 관계는 자기 자신에의 탐구를 위한 미시적 언어로 활용된다. 전체는 '나'이고 부분은 나를 구성하는 가장 미세한 부분인데, 보는 주체와 그려지는 객체 사이의 시각 좁히기는 결국 내가 나에게 얼마나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이쯤 되면 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던 과학 실험실의 해부도가 문득 내가 볼 수 없는 지극히 사적인 내 몸의 지형도가 된다. 자신이 볼 수 없는 내부 공간의 소우주로 유도된다. ● 1970년대 이후 몸에 대한 관심이 지극히 고조되었던 현대 미술의 다양한 바디 아트의 언어에 이미 익숙한 우리의 눈이지만, 실은 이런 식으로 우리의 몸과 연결하는 것은 좀 의외이다. 세포로 좁혀 들어가면 사실 사람들 사이의 차이란 부질없다. 개인의 정체성이 결국 시각이 감별하는 차이에 절대적으로 의존함을 생각할 때, 인종의, 성의, 개인의 구분 짓기란, 현미경 아래 보이는 범위에서는 허탈하게 균일화된다. 산 세포와 죽은 세포가 있을 뿐이다.

이강욱_Invisible Space-01042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131cm_2001_부분

이강욱의 회화는 뜨겁고 흐물거리는 무정형 대상을 박제하듯, 유리판이나 화학 약품으로 고착시키듯, 과슈로 그려진 유기적 드로잉 작업 위에 젤 미디움과 바인더의 얇은 막을 여러 층 입혀 본래의 이미지를 그림 면에 고정시킨다. 여러 막을 통해 이 이미지는 안전하게 고착되고, 동시에 숨쉴 수 없이 팽팽한 표면의 장력에 의해 순간적으로 포박되고 영원히 멈춰진다. 그림 표면은 병원의 차가움이 느껴질 정도로 지나치게 미끈하고 균일하다. 이러한 생명의 순간적 고착은 동작과 멈춤, 생명과 죽음의 얇은 경계를 연상시키면서, 살아있는 생명체를 순간적으로 고정시켜 그 생생함을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싶은 욕구를 반영하는 듯 하다. 폼페이 벽화나 공룡의 화석에서 느껴지는 경이감이 시간의 순간적 동결을 통해 생명체의 당시 모습을 목격한다는 것에 연유하지 않던가. ● 초-사실적인 초기 작품들보다 추상화 과정의 요즘 작품들에서 이러한 시각의 근접성과 겹겹이 쌓인 표면 처리의 매끈함이 더 심해진다. 이젠 사물의 형태를 알아볼 있는 최소의 거리를 지나쳐 버렸다. 우리의 시각에는 세포막을 뚫고 들어가 마주치는 알 수 없는 혈소판이나 DNA와 같은 최소의 입자들만이 부유할 뿐이다. 강한 내적 생명력에 못이긴 미세한 입자들이 제한된 막을 터쳐 나와 꽃씨처럼 시각의 표면에서 떠다니는 것은 이 조심스런 그림이 지닌 역설적 과격함인가 싶다. 눈이 식별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세포단위에 있을 수 있는 최소한의 폭력성일까. 도대체 시각적으로 '최소'라는 것은 '최대'의 범위를 설정하는 것과 같이 불가능하다. 무한성의 의미에서 양자의 끝자락은 결국 만나는 것이겠지만, 이강욱의 작업은 분명 전자에서 시작한다.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근래에 그가 하는 추상스런 작업을 바라본다. 이강욱의 추상은 본래의 추상작업이 아닌, 이러한 일련의 시각 좁히기, 근접화 과정의 흐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처음에 그가 참고했던 생물학의 생체 단면도부터 해석의 실마리를 끄집어내어야 한다. 이 끈이 어디까지 갈지는 두고 볼 일이나, 극소의 생명의 호흡이 가시화될 수 있을까에 호기심을 갖게 된다. ● 이강욱의 회화는 무한한 내부 세계의 극히 일부분을 조명한다는 것을 처음부터 상정한다. 신경계 유기체적 연계망은 일정한 틀에, 시각의 사각형으로 규제할 수 없고, 캔버스의 틀을 너머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러기에 이 복잡한 넷워크를 담은 그림은 내용상 부분적이고, 스스로가 전체가 될 수 없음을 명기한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은 그림면이 담지 못하는 복잡하게 연계되어 펼쳐진 무한의 비가시계를 암시한다. '나'를 아는 것은, 그림틀에 드러나는 시각의 범위는 지극히 부분일 뿐인데, 이강욱의 그림은 알 수 없고 보이지 않는 전체에 대한 호기심과 경의를 표한다. 가까이 가면 갈수록 눈에 잡히는 범위는 좁아지고 지나치게 면밀히 드러나는 나는 내게 낯설어진다.

이강욱_Invisible Space-02031_캔버스에 혼합재료_33×24cm×30_2002

스스로에 대한 탐구는 작가라면 누구나 갖는 기본 전제이고 특히 오늘날에는 다양한 쟝르의 미술에서 과감한 언어로 자기를 노출하고 때로 공격하기도 한다. 자신의 신체 내부를 내시경하여 그 실감나게 징그러운 '내 안의 나'를 대중에게 생생하게 공개한 모나 하툼(Mona Hatoum)식의 이상스런 낯설음(uncanny)을 그 중 하나의 예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업젝트 아트'로 표현되는 이런 식의 서구 언어는 어쩌면 우리 문화에서는 지나치게 공격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런 류의 자아 탐색을 보이는 작가들에서는 왠지 외국어가 익숙치 않은 사람이 애써 티를 내려는 듯 어색한 느낌이 있다. 이강욱의 회화는 보는 이에게 이런 식의 부담감이나 반발감을 주지 않는다 싶다. ● 오랜 시간과 시각적 집중이 요구되는 이 마이크로코즘(microcosm)의 세계로 초대되어 조심스럽게 나 자신으로의 여행을 한다. 분명 충격(shock)이 어느새 미(beauty)의 가치를 압도하게 된 요즘의 전시장과는 다른 경험이다. 여기 저기 얻어터지고 생선 발리듯 자신을 죄다 뒤집어 열어 버리는 것 같은 '과격파' 작품에 비해서, 이강욱의 회화체는 온화하다. 부드럽고 친절하면 손해보고 들어가는 요즘의 세태라지만 실컷 소리지르다 목이 쉬어 공허하게 돌아온 내 자신에게 그의 캔버스는 위안과 자성의 공간을 준다. 작가 자신이 '볼 수 없는 공간(invisible space)'으로 생각하고 있는 몸의 내면은 그와 같이 스스로를 조용하게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에. ● 다수의 개인전을 치룬 작가들이 보여주는 전형적 양식의 '능숙한' 표현 배후에 깃들인 세상에 대한 공허한 태도와 대비되는 느낌이 이강욱 전에 깃들어 있다. 이것을 신진 작가의 첫 전시에서 얻을 수 있는 일상적 순수함이라 하기엔 그 시각이 심상하지 않다. 주마 간산 처럼 한 곳에 시선을 주지 않는 시각이 이미 모더니즘의 평면성을 구성하는 근본체계였음을 기억할 때, 이강욱의 전시에서는 너무 지나치게 자세히 보아 그 시점의 거의 끝에 도달한 우리의 시각이 이루는 최종의 평면성인지 모른다. 신진은 신진다워야 한다. 주위 세계의 외상보다는 지극히 은밀한 스스로의 내부가 지닌 미세한 부분을 통해 무한한 세상을 인식하려는 이강욱의 보는 방식이 갖는 집요한 겸허함과 호기심 어린 순수성이 요즘의 우리 눈이 결여된 것들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 누가 순수함이 진부하다 했는가. 이강욱 전에서 나를 통한 세상에의 순수한 탐구가 소란스럽지 않게 이루어진다. 잠깐이나마 소음을 끄고 시선을 모두어 전시장으로 들어오자. ■ 전영백

Vol.20020509a | 이강욱展 / LEEKANGWOOK / 李康旭 / painting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