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의 이름으로

책임기획_이영준   2002_0412 ▶ 2002_0503

김차섭_정상방향_캔버스에 유채_50×110.7cm_1999_부분

참여작가 김차섭_김명희_최진욱_서용선_민정기_김구림

갤러리 칸지 부산시 해운대구 중동 1491-7번지 Tel. 051_743_1265

그림은 장식이 아닙니다. 또 세상의 모든 그림들이 다 아름다운 것도 아니고, 아름다운 그림이 모두'좋은 그림'으로 평가되는 것도 아닙니다. 돌아보면, 주변에 편안하고 아름다운 그림들이 많지만,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그림을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 그림은 한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자, 보는 이의 영혼을 투명하게 비춰주는 거울입니다. 그래서 좋은 그림은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움직이게 합니다. 그림에는 역사와 정신이 있고, 메시지와 상상력이 있고, 우리 삶의 신비와 불가사의함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 오랜 준비 기간과 여러가지 고민 끝에 갤러리 '칸지'를 개관합니다. 여기 개관기념전에 모시게 된 여섯 작가들은, 어지러운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도 치열하게 회화의 의미를 탐색했고, 각각 독자적인 어법으로 회화의 지평을 넓혀오신 분들입니다. 여섯 작가들에게 유일한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그림 속에 '이미지'가 있다는 점일 것입니다. 그림에 있어서 이미지는 세계와 관객을 이어주는 열린 통로입니다. '사물화(事物化)'되어버린 추상회화의 가장 큰 문제점이 "느낌의 상실"이라는 지적에 저희들은 공감합니다. 이 전시의 작품 하나하나에서는 이미지가 지닌 진정한 '힘'이 무엇이고, 그림이 주는 '감동'이 무엇인지를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 갤러리 '칸지(CANZI)'의 이름은 '숨겨진 보석'을 뜻합니다. '숨겨진 보석'이란 '값비싼 재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의 맑은 영혼을 일깨우는 작품을 뜻합니다. 젊은 갤러리 '칸지'는 항상 깨어있는 눈으로 작품을 보고, 변함없는 자세로 작가와 만날 것을 약속드립니다. 무엇보다, "감동을 주는 좋은 작품"으로 그림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의 뜻과 마음을 소중히 모실 것을 다짐합니다. ■ 갤러리 칸지

김차섭_무한 사이의 감각_종이에 에칭_40.5×40.5cm_1975~6

소양강 상류의 북산면 내평리, 그 길이 끝나는 강원도 오지에 부부작가인 김차섭과 김명희의 작업실이 있다. "무너진 농경문화의 최선전인 내평리 현장의 목격자이자 체험자"를 자임하며 칩거하고 있지만, 두 사람은 누구보다 자유롭게 세계를 떠돌았던 작가들이기도 하다. 문명의 흔적과 여러 민족의 삶의 양식을 찾아 떠나는 탐구적 여행은 이들에게 작업의 일부이자 연장이었다. ● 김차섭은 역사와 철학, 지리학과 기후 생태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문화와 문화 사이의 관계, 문명의 지정학적 의미 그리고 인간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조건에 대해 치열하게 질문해 왔다. ● 내평리의 지리정치학적 의미는 김차섭에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작가가 지도를 이용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뉴욕을 떠나 내평리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그곳은 분단의 비극이 직접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지만, 기후적으로 북방문화와 남방 문화가 행복하게 만나는 선택받은 '이상향'이기도 하다. 가령 작품 「3면화」에서 보듯, 그곳은 북방의 자작나무와 남방의 대나무가 함께 뿌리를 내리고 그 사이에 '우아한 백송'이 의연하게 자라나는 땅이다. 그것은 곧 문명사의 출발이 동북아시아이며, 희망을 찾아 이동한 기마 민족이 마지막으로 정착한 한국의 지정학적 의미가 세계 역사의 중심이라는 자각으로 이어진다. ● 그래서 작가의 자화상에서는 고통과 비애, 그리고 희망과 의지가 함께 읽혀진다. 서구의 합리주의와 도구적 이성이 거세해 버린 우리의 본연에 모습에 대한 분노이자, 왜곡되고 마모된 자기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냉철한 의지가 동시에 드러나는 것이다. 이러한 자각은 한반도를 역방향으로 그린 「지도화」에서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서구인이, 서구 문명의 시각에서 제작한 지도는 방향과 각도가 전도될 수밖에 없는 것이고, 작가의 그림은 그 인식을 교정하여야 한다는 실천 의지를 적극적으로 표명한 것이다.

김명희_뱀_캔버스에 혼합재료_70×99.5cm_1989
김명희_추수_칠판에 유채_90×120cm_1995

문학적 향취와 시적인 울림을 지닌 김명희의 그림들은 자아에 대한 깊은 성찰과 문명에 대한 폭넓은 통찰의 결과물이다. 일찍이 평론가 박신의가 "인식론적 충격"이라고 말한 바 있는 그 매혹적인 그림들은 자아와 세계, 일상과 역사가 만날 때, 섬광처럼 번쩍이는 감수성으로 태어난다. 작가의 작품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상상, 아시아와 서구의 신화적 공간을 가로지른다. 이질적인 두 세계 사이의 아득한 거리, 그 거리가 환기하는 신화적인 분위기가 긴 여운을 준다. 셈세하고 미묘한 작가의 작품은, 때때로 페미니즘적 시각이 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은 '여성주의'의 한정된 문맥으로 해석하기에는 작품이 지닌 외연(外緣)이 너무 넓다. ● 작가는 고전 회화의 한 장면과 주변의 일상을 병치시키거나, 신화적 공간과 현실적 상황을 결합시킴으로써 우리 삶의 신비함을 감동적으로 이끌어낸다. 그것은 작은 이야기를 통해 담아내는 커다란 울림이고, 상실된 시간과 일상을 통해 드러내는 희망과 회복의 메타포이다. ● 칠판에 그려진 「소도선(小挑仙)」은, 꽃과 열매 그리고 메마른 가지가 함께 붙은 복숭아 나무 가지를 한 아이가 천진난만하게 들고 있는 작품이다. 그 불가사의의 나무가지는 서로 만날 수 없는 신화적 공간을 암시할 수도 있고, 시간을 거역할 수 없는 우리들의 인생을 은유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작품 「추수(Harvest)」는 자신의 거주지이자 작업실이 위치한 강원도 내평리, 그 상실된 농경문화의 극점에서 보내는 땅에 대한 믿음의 메시지이다. ● 「사빈느의 약탈」은 유명한 푸생(Poussion)의 그림에서 나오는 한 장면을 뉴욕의 현대적 여인과 대비시킨 작업이고 「곰례와 뮤릴로」는 17세기 스페인 화가를 우리나라의 토속적 여인을 상징하는 전형적 인물과 극적으로 대비시킨 작품이다. 또 작품 「뱀」과 「개」는 12간지(干支)에서 나오는 동물들을 작가 자신이나 주변의 상황에 결합하여 은유적 분위기와 시적인 여운을 극대화한 작품이다.

최진욱_그림의 시작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95×260cm_1991
최진욱_자전거_캔버스에 유채_124×102cm_1983

최진욱의 작품들은, 구상회화와 추상회화 사이의 깊은 간극을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라는 고민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작가는 '그림의 시작'이 어디이고, 그린다는 행위가 과연 무엇인지를 집요하게 반문해왔다. ● 작가는 90년대 초반, 자신의 화실을 배경으로 '숨이 막힐 듯한 밀도와 긴장감'이 내재된 화면을 완성한다. 작가의 작품은 '생각과 그림'이 만나 마찰하는 순간의 팽팽한 긴장을 통해 태어난다. 그 과정은, 작가가 스스로 언급했듯이, 형식이 내용을 만나 불꽃을 일으키는 순간의 충만한 느낌의 포획이며, 시간의 흐름을 견디어 내는 '신비하면서도 과학적인 리얼리즘'을 향한 도전이었다. ● 평론가 심광현이 정교하게 분석한 것처럼, 작가의 그림은 '리얼리티'에 육박해 가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주관과 객관, 사회와 개인의 변증법적 연관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확장되어 나타난 고통스럽고도 즐거운 자기 성찰의 결과물이다. ● 작가의 초기 대표작 중의 하나인 「자전거」 시리즈는 속도감 있는 필선이 만드는 '순간적인 밀도'가 새로운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열기 시작한 수작들이다. 작품 「형광등」은 구체적인 디테일을 생략되는 소재와 구도를 선택함으로써 구상회화의 추상회화의 관계와 그 접점을 경쾌하게 탐구한 작품이다. ● 광장에서 건축물과 조각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그린 연작 「이태리 여행」은 시점(視點)과 원근법적 거리를 문제시한 작품들이다. 이런 구도는 작가의 작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도이지만, 초점 거리를 연속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재현의 문제와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의 의미를 반문하고 있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서용선_쉬는 사람들_합판에 유채_100×60cm_1999
서용선_노산군-동대문_캔버스에 유채_85×70cm_1994

서용선은 80년대 초반 사실 풍에 가까운 단색조의 소나무 그림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졌던 작가다. 이후 작가는 역사적 사건 혹은 도시공간 속의 삶을 강렬한 색채와 힘 있는 필선으로 표현함으로써 '한국적 표현주의'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 작가의 작품들은 역사와 현실의 부조리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담으면서도 인간의 내면에 잠복해 있는 불안과 슬픔의 근원을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골격만 그리듯 거친 붓질로 마무리한 인물과 풍경들은 억압이 강요하는 상황 속에서도 거세되지 않는 인간의 욕망을 표현하고 있어 더 비극적으로 다가온다. ● 비운의 역사로 기억되는 '계유정란'과 '단종복위사건'을 형상화한 연작 '단종일기'는 역사를 단지 기록한 것이 아니라 현실의 밑바닥에 있는 우리 개개인의 슬픔으로 이입시킨다. 가령 작품 「노산군」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단종의 모습은 사육신의 충절을 기억하는 모든 이에게 현실보다 선연하게 비극의 공감대를 확산시킨다. 나아가 그것은 역사적 비극이 아니라 부조리한 상황이 강요하고 있는 현실적 슬픔으로 이어진다. ● 단종의 유배지를 그린 작품 「청령포」에서, 빨강, 파랑, 노랑, 녹색의 강렬한 색면으로 구성된 풍경은 회화적으로 너무나 아름답지만 역사를 회고하면 그 색채의 선연함만큼 비극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분방한 필치로 그려진 작품 「숲」은, 작가가 초기 작품에서부터 근작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그려왔던 소나무 양식이 하나의 작품 속에서 종합된 독특한 작품이다.

민정기_운길산Ⅴ_캔버스에 유채_68×180cm_1999_부분
민정기_아미산_캔버스에 유채_61×106.5cm_1999_부분

민정기는 '현실과 발언'이라는 미술그룹에 가담하면서 80년대 민중미술을 선두에서 이끌었던 기관차 중의 한 사람이다. 90년대 들어 작가는 양수리에 칩거하면서 특유의 담담하고 힘있는 필치로 풍경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 ● 평론가 최민(崔旻)의 지적처럼, 민정기의 그림은 캔버스와 유화물감을 사용하고 있지만 유럽에서 유래된 풍경화가 아니라 한국과 중국의 전통적인 산수화와 궤를 같이 한다. 또 꽃이나 들풀, 벌레들을 그린 소품들도 정물이라기보다 우리 나라의 민화나 화훼(花卉) 그림들의 전통에 맥이 닿아있다. ● 민정기의 그림은 주변 풍경의 외형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산과 물이 지니고 있는 기(氣)와 맥(脈)이 작품에 충만해 있다. 가령 작품 「아미산」은 작가의 작품 중에서 비교적 3차원 원근법에 충실한 그림이지만, 실재하는 산과 바위의 기운이 단번에 느껴진다. 작품 「명달리 소나무」 역시 실재하는 나무의 외양을 감각적으로 포착한 것이 아니라 그 나무가 위치한 장소의 의미, 그리고 나무와 사람들의 관계가 만든 주술적 분위기까지 담아내고 있다. ● 서구의 경우 정물화는 '죽은 자연(nature morte 불어)'과 '조용하게 정지된 삶(still life 영어)'이라고 일컫는다. 여기서 평론가 최민은, 유럽의 정물화에 소멸과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여져 있다면 동아시아의 화훼 그림은 대우주와 함께 호흡하는 소우주의 생동하는 자태를 그린 것이라고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다. 다시 말해, 전자가 시간성 속에서 '삶의 덧없음(vanitas)'을 상징한다면, 후자는 공간적 확장 속에서 '기(氣)'의 충만함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민정기의 작은 그림들은 누구도 눈을 주지 않는 사소한 들풀과 꽃들에서부터 자연과 우주가 시작됨을 일깨워 준다. 화려한 꽃을 기교적으로 그린 것이 아니라, 미약하고 소소한 꽃과 들풀들을 소박하고 그린 소품들이 자연이 주는 진정한 즐거움과 참된 의미와 깨닫게 하는 것이다.

김구림_음양1-S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45.5×65cm_2001
김구림_음양99-S_사진 이미지에 아크릴 채색_43×30cm_1999

언젠가 한 큐레이터는, 자신이 기획한 전시의 서문 첫머리에 김구림을 가리켜 "한국 전위예술의 전위적 존재다"라고 적었다. 실제로 50년대 이후 한국 실험미술의 중심에는 항상 김구림이 있었을 만큼 작가는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부단히 실험을 지속해 왔다. 작가의 작업은 회화와 판화, 조각과 설치, 대지예술과 개념미술, 도예와 비디오 아트에 이르기까지 미술 영역의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었고, 연극과 무용, 음악과 영화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구분을 전방위로 넘나드는 것이었다. ● 동년배 작가들이 자신의 양식에 안주할 무렵인 80년대 중반, 그는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다. 그 당시 자연에 대한 사유에서 시작된 일련의 회화 작업들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음양 Ying-Yang」 시리즈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동아시아 사유체계의 기본 기저가 되는 음양의 원리는 두 개의 대립하는 모순이 상호 충격을 통해 해소되어 궁극적으로 조화와 통합으로 이르는 원리이다. 여기서 대립은 균형의 원리에 의해 활기가 주어지고, 그 상호작용성은 서로 구분되지만 분리될 수 없는 '지고(至高)의 하나'를 구성한다. ● 김구림의 「음양」 시리즈에서도 두 가지의 대비되는 요소가 하나의 작품에 나란히 배치되어 모순이 상호작용하는 중간 영역이 설정됨을 볼 수 있다. 가령 서로 구분된 화면 속에서 생경하게 등장하는 원색의 동그라미나 사각형은 대립적 요소의 상호작용과 상호의존의 시각적 표식으로 보인다. 그래서 김구림의 작품에서는 사실과 추상, 자연과 문명, 있음과 없음, 실제와 허상, 실제와 이미지 등 대립되는 요소들이 강하게 마찰하면서도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여 새롭게 통일된 제3의 이미지를 탄생시킨다. 결국 노자가 도덕경에서 "실재와 부재는 서로를 통해 자라나는 것"이라고 갈파한 것처럼, 음양사상에서 대립과 모순은 갈등이 아니고 생명이 창조되고 보호되는 생산적인 긴장을 만드는 것이다. ■ 이동석

Vol.20020508a | 회화의 이름으로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