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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0426_금요일_06:00pm
스페이스 빔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1367-14번지 3층 Tel. 032_422_8630
고진한의 그림그림 ● 기나 긴 고행의 끝에 입적(入寂)한 성철 스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山是山, 水是水)"라는 얼핏 보면 평범한 문구가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현재 드러나고 있는 인간 삶의 위기적 상황이 인간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인식적 틀에 스스로 갇히면서 초래되었다는 각성 때문일 것이다. 즉 스스로를 자연에서 분리시키고 그 자신 주체가 되어 자의적인 기준으로 외부세계를 재단해 온 결과 인간 삶의 근원적 지반이 축소되는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게 된 것이다. 그 동안 우리들 삶의 조건을 개선하고 진전시키기 위한 눈물겨운 노력이 스스로를 결박하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결과로 귀착된 사실을 목도하면서 이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는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관심을 잠시 접고 우리들 자신을 되돌아보며 애초에 자리했던 그 지점에서 어긋나거나 지나쳐버린 것은 없는 지 곰곰이 따져 보는 것이다. ● '그린다', 혹은 '그림'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에서부터 '그림을 그리는 자신' 내지는 흔히 말하는 '화가'란 무엇인가라는 자기 정체에 대한 물음에 이르기까지 무던하면서도 지리할 정도의 탐색을 진행시켜 온 고진한은 바로 이러한 고민의 연장선상에 놓여져 있다고 보여진다. 그가 현재 씨름하고 있는 대상은 그 자신의 '시선'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Seeing is Believing)"'라는 문구가 더 이상 진리를 발생시키는 근거로 작동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과연 나의 망막에 투사되는 외계의 정보를 그대로 수용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인 것이다. 혼란스럽고 불확실한 현재의 자신을 해명하기 위하여 자신을 규정짓고 있는 근원을 찾는 과정에서 그 지점은 이미 예견되어 있을 지도 모르겠지만 이 곳에 다다르기까지 드러난 지난(至難)한 과정은 그 작업이 만만치 않음을 말해 준다. 그리고 그 '시선'이 세계와 접속하는 최초의 지점이자 최종적 국면이며 한편으로 사회와 역사에 의해 구축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그의 작업은 일반적인 예술 활동의 심급을 한 단계 더 추가하면서도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시대적 담론체계에 대한 또 다른 차원에서의 말 걸기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고진한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고민과 입장은 무엇보다도 이번 전시에 내건 '그림을 닮은 풍경'이라는 타이틀에서 총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여기에서 주어격인 '풍경'-그것이 '그림'을 지칭하건, 그림의 '대상'을 지칭하건 상관없다-이 인간 주체의 산물인 '그림'을 닮았다는 것은 그것의 본질적 실체와는 이미 거리를 드러내고 있다는 입장이다. 결국은 대상이라는 것은 그것이 어떠한 성격을 띠던지 간에 그것을 바라보는 주체의 시선을 넘어서지 못하고 돌고 도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그림은 어디까지나 그림일 뿐"이라는 생각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그 어느 지점에서 스스로를 넘어서는 탈출구를 확보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림 그 자체'로부터이다. 즉 그의 작업을 벤야민이 이야기하는 '가상(Schein)'과 '유희(Spiel)'라는 두 가지 측면과 연관지을 수 있다면 후자인 유희적 성격이야말로 이를 가능케 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 고진한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미지가 '생소함'과 '익숙함' 양쪽 모두에 걸쳐지면서도 어느 쪽도 아닌 관계로 발생하는 모호함은 그의 작업이 지니고 있는 성격과 탐색의 지점을 보다 명확히 설명해주고 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고진한의 작업이 하나의 '혐의'이자 '가설'의 단계에 놓여져 있음을 말해준다. 즉 그의 작업은 하나의 작품을 두고 "진실이다", 혹은 "객관적이다"라고 규정짓는 배후적 근거로서 푸코의 '진리의 체계(regime of truth)'를 떠올리며 탈코드화의 상황을 짐작하게 하지만 이에 마져도 의혹의 눈초리를 풀지 않음은 물론 섣부른 '의미부여'를 삼가는 데리다적 시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은 스스로 설정해놓은 그러한 가설을 가상적으로 실현해 보이는 도구적 성격에 불과하며 상징적 질서체계인 현실적인 가치와 시각에 비켜나 있거나 그것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 관계로 그러한 의미체계로 접근할 경우 제대로 접속이 되지 않을 뿐더러 그러한 노력을 미안하게도 무안하게 만들고 있다.
그렇다면 고진한은 어떠한 방법을 통해 그러한 '가설'을 마련하고 제시하는가? 이는 그의 작업을 구성하는 주된 축인 실재의 풍경과 그것을 대하는 자신의 시선, 그리고 이를 대신하는 사진 및 이에 근거한 드로잉과 페인팅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사진은 자신의 시선에 대한 의문의 연장선상에서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음을 또 다른 차원에서 확인해보려는 의지의 일환이다. 즉 사진이 지닌 대표적인 특성 중의 하나인 인간의 일상적 시각으로는 포착하기 힘든 부분을 담아 내며 또 다른 생성의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하여 카메라의 피사체에 대한 관습적 접근 방식에서 이탈시키는 일련의 실험, 이를테면 달리는 차 안에서 순간적으로 지나가는 물체들에 렌즈를 노출시키거나, 동일한 대상을 시간적 간격을 두고 담아 내거나, 흔들리는 물체 내지는 형상 자체가 불분명한 광경의 포착 등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은 고진한에게 있어서 단지 '활용'에 머물며 드로잉 내지는 페인팅 작품을 주된 수단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것은 그의 궁극적인 관심사가 또 다른 원본의 생성, 즉 들뢰즈의 '시뮬라크르' 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그 자신의 시각과 행위, 거기에서 드러나는 신체적 자기 실존의 확인에 여전한 무게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 고진한은 이번에 자신의 작업에 동원되었던 각기 다른 맥락의 이미지들을 연결시켜 3분 남짓한 분량의 디지털 동영상을 만들었다. 이 작품은 그의 주 작업인 드로잉 및 페인팅에다가 원재료(?)인 사진이미지가 끼여들면서 하나의 대상이 이미지화하며 드러나는 기호적 성격과 그 변환을 생생하게 연출하고 있는데, 지표(index)적 성격으로서의 사물 및 풍경이 실제, 즉 원본을 연상시키는 '도상(icon)'적 성격의 사진이미지로 바뀌고, 이는 다시 드로잉 및 페인팅 작업으로 옮겨지면서 그 자체 독립적인 '지표(index)'적 성격을 띠는가 싶더니 원본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은 이를 징후적 차원 정도로 머무르게 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 하나의 장면이 고정된 의미가 아닌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이른바 데리다의 기표의 미끄러짐, 즉 '차연(differance)'을 내포하면서 관람자로 하여금 자발적 참여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고진한의 이러한 작업은 흔히 말하는 '영상시대'의 이미지들이 지닌 개별적 속성을 분명히 해줌은 물론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이를 통해 특정의 단계에 머무르거나 한 가지 성격에 몰입하려는 태도가 지닌 한계를 '상징(symbol)'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보는 고진한의 작업은 어쩌면 이미 공소시효를 다해 더 이상 머뭇거릴 명분을 찾지 못하고 모두가 이미 떠나간 자리에 홀로 남아 이리 저리 뒤적거리는 부질없는 모습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진한의 작업이 '시각 중심주의'에 따른 서구 문명의 폐해에 대한 반성적 시도라는 일련의 움직임과 연결되고 있음을 감안한다면 그 대안적 실천이 개인 욕망의 무절제한 발산과 투사라는 또 다른 자기 확대의 어긋난 양상으로 드러나는 작금의 현실을 감안해 볼 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결국 문제의 해결은 그 자리를 떠나서, 혹은 또 다른 대리적 수단이 아닌, 나아가 양자택일의 문제는 더더욱 아닌, 나의 존재는 '보고'(see)과 '보여지는(be seen)' 동시적 작용 속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지 않는, 자신을 3인칭화시키며 모두에게 다가서는 태도야말로 느리지만 어쩌면 더 빠른 길일 수도 있음을 고진한의 작업은 말해주고 있다. ■ 민운기
Vol.20020505a | 고진한展 / KOJINHAN / 高鎭漢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