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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2_0426_금요일_05:30pm
송은갤러리 서울 강남구 대치동 947-7번지 삼탄빌딩 1층 Tel. 02_527_6282
蘊蓄된 정서로 일궈낸 생명에의 환기 ● 이운구의 근작들을 보면 우선 화면 가득히 움트고 있는 生氣를 느끼게 된다. 이 生氣는 화면을 온통 뒤덮고 있는 흙냄새와 맨몸의 사람들, 그리고 식물들과 바람소리가(그의 그림에는 분명 바람소리가 있다.) 분간되지 않을 정도로 서로 뒤엉켜 만들어 내는 하나의 울림이다. ● 이운구가 일궈낸 세계는 생명의 자락에 닿아있다. 그 자락에서 작가는 담담하게 "나 이제 여기 왔느니" 하고 웅얼거리는 것 같다. 그렇다. 그의 작품은 그것을 해부해 보려는 분석적 욕구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경계에 놓여있다. 오히려 이운구가 획득한 표현적 성과는 이러한 애정(?)마저 아예 차단함으로써 얻어낸, 그가 던져버린 분별 밖에 놓여있다. 이제 그는 비로소 그가 오랫동안 그토록 염원한 곳에 다다른 느낌이다. ● (새벽 꼭두녘에 부스스 눈을 떳을 때 덮쳐오는 갈증. 그 목마름이 찾는 한 그릇 냉수. 그리고 목줄기를 타고 내리는 해갈의 시원함. 이 단순한 계기를 통해 일어나는 단순한 행위 속에 세계가 열리고 생명이 온존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 이운구는 그 자신이 몸속 깊숙히 확인하고 있는 정서의 원천으로부터 작품의 시원을 끌어올린다. 말하자면 그가 드러내는 세계는 그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그 자신이 어릴 적부터 농촌에서의 삶을 통해 몸으로 확인하고 온축시켰던 정서의 연장선에 놓여있다. 그러나 근 20년에 이르는 저간의 작가적 여정을 보노라면 이운구가 도달한 세계는 그리 만만하게 얻어낸 것이 아니다. 이 작가의 근작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여기까지 이르는 작가적 도정을 살펴보자.
이운구는 1986년 "삶의 미술" 운동에 뛰어든 이래, 꾸준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인간 삶의 문제를 천착해온 작가다. '위기'로 대변되던 그의 작품세계는 당시의 절박한 정치/사회적 상황 속에서 인간적 삶이 겪는 파괴와 상흔, 절망과 고통의 위기의식을 치열하게 드러내려 했다. 그는 '벌'('85년), '끌려가는 사람'('86년), 그리고 '위기'연작('87년∼)등을 통해 결코 녹녹치 않은 현실인식을 보여줌으로써 '80년대 작가의 한 사람으로 자리매김 한다. 그러나 이영욱이 지적한 바 있듯이 이운구는 개인적으로 늘상 그의 몸에 온축된 정서와 현실을 읽어내는 방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고, 이러한 갈등은 그에게 심한 작가적 번민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 1990년에 들자 그는 이전과는 다른 작품세계를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땅의 기억' 연작이다. 이러한 변모는 이 작가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한 계기를 제공하였으며, 작가 스스로에게 있어서도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현실로부터 땅/大地-생명의 원천에로의 관심의 이동으로 읽힌다. 그는 아마도 스스로 몸 깊숙이 확인하고 온축시켜 온 정서의 원천에서 다시 시작하려한 듯 보인다. (여기에 대한 단서는 그가 '85년에 그린 '후미'라는 작품에 이미 마련되어 있다.) 그러나 '땅의 기억' 연작들 역시 그의 의도를 조형화하는 방식에서 몇가지 문제들을 노정하고 있었다. ● "땅". "흙"이 아니고 우리가 "땅"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주지하듯이 "땅"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노동과 삶이 묻어있는 터다. 이른바 삶의 궤적으로서 온갖 역사와 현실이 얽혀있는 하나하나의 구체적 장소를 이름과 동시에 그것들의 총체가 바로 "땅"이다. 이렇게 볼 때, 이운구가 인식하고 있는 "땅"은 과연 어떤 것일까. 그의 작품을 일별해 보면 아마도 그는 땅의 구체성 보다는 총체성에 더욱 다가가 있는 듯 보인다. (얼핏 농토라고 하는 구체적 연상대를 떠올리게 하기는 하지만, 농토 역시 포괄적 의미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위와같은 맥락에서 '땅의 기억'이 과연 그의 몸에 온축된 정서와 합치하는 것일까. 다시말해 이운구는 과연 그의 몸에 온축된 정서의 본모습을 보았을까.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10여년에 이르는 '땅의 기억' 작업은 이를 확인하는 고달픈 과정이었다고 보여진다. ● '땅의 기억' 연작 초기에 그는 "땅"이 기억하고 있는 '수많은 辛苦와 역사로 얼룩진 그러면서도 그 辛苦와 역사를 몸에 새긴' 땅에 대한 집착을 다소 과도하게 드러내면서 화면 가득히 이어지는 엉켜진 굴곡들과 고랑들이 이루는 힘든 노동의 상징으로서의 주름과 수탈로 인한 상흔의 상징처럼 보이는 웅덩이들을 통해 땅의 의미를 형상화하려 한다. 그러나 '92년 이후로는 이전의 땅-농토라는 비교적 단일한 구성에서 벗어난 다양한 시도들이 눈에 띄게 나타난다. 화면에는 나무라든가 인물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방법론적으로는 화면병치와 화면중첩이 눈에 두드러진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그가 처음 상정한 '땅'에 대한 중압감을 다소 완화시켜주기는 했지만, 화면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상호합일성을 갖추지 못하고 개체화되어 약간의 상황연출에 의존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렇지만 향후 그의 작품세계는 그에게 있어 필연적인 변모를 거치면서 2000년에 와서 매우 뚜렷한 새로운 징후들을 보이기 시작한다. 내가 보기에는 이 새로운 징후란 '움틀거리는 生氣'에 다름 아니다. 이 새로운 징후들은 근래에 올수록 더욱더 강화되면서 강한 울림을 형성한다.
그는 더 이상 "땅"으로부터 의미를 캐려하지 않으며 애써 화면에 의미를 부여하려 들지 않는다. 이제 이운구의 화면에는 저 지독했던 현실을 상기시키는 어떤 증언들도, 수많은 삶의 辛苦와 역사적 질곡을 몸에 새긴 '땅의 기억'도 없다. 어찌 볼 것인가? 물론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퇴행했다거나 의미가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과연 이운구가 붙들고 있던 화두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로서는 그의 몸 깊숙이 온축된, 그 자신마저도 끊임없이 붙들고 있지만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을 대신 들여다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스스로가 보여주는 작품 엿보기를 통해 그의 호흡을 좀더 가까이서 느끼는 것일 뿐. ● 그의 화면에선 짙은 흙냄새가 인다. 꽃이 피고 진다. 잎들이 날린다. 바람이 분다. 사람들은 팔짱을 끼고 대기를 吸呼한다. 핀다/진다/날린다/분다/떨어진다/흐른다/껴안는다/본다/한다,한다,한다..... 그의 화면은 온통 動詞들 천지다.(물론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화면을 구성하는 요소들은 제각각의 운동에 충실하다. 끊임없이 움직인다. 쉬임 없이 생성되고 소멸한다. 그리고 이들의 움직임은 하나의 화면 속에 뒤엉켜 있다. 적어도 나는 그런 느낌을 받는다.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요소들의 관계는 '나뭇잎이 사람의 몸 위로 떨어진다'가 아니라 나뭇잎은 나뭇잎대로 지고, 사람은 사람대로 행위 한다. '꽃은 피고, 흙바람은 인다'이다. 그래서 그의 화면은 공간성보다 시간성을 축으로 유영하며 생명의 지평으로 나아간다. 생명은 쉬임 없이 움직이고 변화한다. 쉬임 없이 활동하고 그러한 활동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外化하고 전환하는 것이 생명의 존재규정이기 때문이다. ● 이운구는 흙, 바람, 나무, 꽃, 사람을 생명의 세계로 불러들이고서야 비로소 편안함을 느끼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을 보면 화면 속에서, 화면을 규정하는 動詞의 세계 내에서 우주만물이 제 각각이면서 하나의 운행을 이루며 전체적으로 움터 올리는 寂音의 울림을 듣는 듯하다. ■ 장경호
Vol.20020504a | 이운구展 / LEEUNGU / 李雲求 / paint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