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_0403 ▶ 2002_0409
갤러리 룩스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5번지 인덕빌딩 3층 Tel. 02_720_8488
2002_0423 ▶ 2002_0428
영광갤러리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1동 397-55번지 영광도서 4층 Tel. 051_816_9500
이번 작업은 삶과 그것의 둘러싸고 있는 공간을 다루는 3부작 중의 두번째 시리즈이다. 이 사진 시리즈들은 우리가 존재하는 현세의 단면들을 보여주고 있는데, 대부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한 우리의 일상사에 관한 것이다. 나는 우리들이 종종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어디에 우리가 살고 있는지-어쨌든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 현재 이 시리즈 중에서는 두가지 점에 초점을 두려고 했다. 하나는 자본주의 사회로서의 풍경으로 고층 아파트의 구역이고, 다른 하나는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의 살아가는 형상이다. ● 산업혁명이 일어난 동안 사회는 급속도로 발전했다. 빠른 도시화의 시대 개발 모두 가능하였고, 사람들을 살기 위해 도시로 이주하기를 요구했다. 이런 사회적 변화로 변형된 도시풍경은 사람들에겐 현재 익숙한 현상이다. 도시주거의 대표적인 형태는 더 이상 개인의 주택이 아닌 고층 아파트들이다. ● 공산사회에서 처음으로 아파트를 이상적인 주거공간으로써 보아왔다. 문명사회의 물질적 이기를 동등하게 누리기 위하여 똑같은 조건아래에서 모두가 함께 사는 장소로서의 여겨졌으나, 아파트는 그 유용성과 편리함으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사회를 위한 주거지의 필연적인 시스템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아파트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유지하는 대부분의 시민들을 위해 대량 생산되어졌다. 그런 이유로 자본주의 사회의 풍경도 아울러 변하였다. ● 아파트 구조물의 형태가 어둠 속에서 어렴품이 보이는 것에 반해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환하게 각진 창들로 묘사되는 삶들을 강조하기 위해서 밤에 사진을 찍는다. 각각의 하얀 창은 하나의 상징이자, 추상 개념인 삶의 표상이고 그것의 끊임없는 순환이다. 예를들면 선(禪)사상에서는 흰색을 삶의 시작과 끝과 마찬가지로 생성과 소멸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강봉조
아파트의 알레고리 ● 그대는 방이 더 밝아졌다고 말하는가? 그것이 램프의 심지를 더 올렸기 때문이라고 말하는가? 그대의 방이 더 밝아진 건 그러나 램프 때문이 아니다. 그건 밖의 어둠이 더 깊어졌기 때문이다. (파울 첼란) ● 회화는 잠든 자의 두 눈에 떠오르는 또렷한 이미지다. 사진은 깨어있는 자의 두 눈에 떠오르는 알 수 없는 이미지다. (미셀 푸코)
1. 낮의 아파트 ● 낮에 보는 아파트는 흉물스럽다. 이 흉물의 느낌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아파트의 반미학적 조형성에서 비롯하는 즉각적인 반응만은 아니다. 느낌은 언제나 야누스적이다. 느낌은, 상상력이 그렇듯, 진실에 대한 예감이면서 동시에 진실에 대한 방어의식이다. 느낌 속에는 진실을 보고자 하는 욕망과 진실을 외면하고자 하는 욕망이 중첩되어 있다. 그래서 느낌은 언제나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 낮의 아파트, 그 흉뮬성의 진실은 무엇일까? 백주의 태양을 찌르며 팔루스처럼 직립한 고층 아파트, 매연과 염무의 아우라에 둘러싸여 근대의 성전처럼 옹립한 아파트 군집들은 무엇에 대한 시니피앙인가? 영국의 소설가 이완 맥그리거의 소설 제목은 '시멘트 정원'이다. 옛집의 앞마당 정원에 시멘트를 붓고 새로 지은 집 안에서 차츰차츰 썩어가는 어느 가정의 아이들이 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이 소설에서 새로 지은 집이 사실은 폐허이듯 이 시대의 아파트는 근대화의 번영과 풍요가 아니라 상실과 폐허의 시니피앙은 아닐까? 그러면 아파트는 왜 상실이고 폐허일까? 그것은 무엇을 허물고 파묻은 자리 위에 들어선 허위의 축조물일까? ● 첫째, 아파트는 자연의 상실이다. 산을 없애고 숲을 없애고 들어서는 아파트는 이미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찬탈이며 공간의 폐허화일 뿐이다. 자연 가운데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없애고 세워지는 모든 문화는 자연의 지배이며 따라서 반문화에 지나지 않는다. 둘째, 아파트는 집의 상실이다. 아파트는 이미 주거공간이 아니다. 아파트는 투자 공간일 뿐, 아파트의 진정한 주인도 이미 사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프리미엄이고 전매이윤이며 교환가치이다. 셋째, 아파트는 '내면의 상실'이다. 안(내면)은 밖과 소통하고 밖의 경험을 통해서 형성되는 공간이다. 그러나 자연과 집이 오로지 경제적 욕망의 대상으로 황폐화 되었을 때 집안 또한 황무지가 되고 사막으로 변한다. ● 자연이 상실되고 집이 상실되고 내면이 상실 되었을 때 남는 것은 다름아닌 획일화된 사회와 단자화된 개인이다. 모든 것이 규범화하고 코드화된 거대한 기능체의 사회, 그 기능 시스템 안에서 주어진 욕망을 모방하고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면서 주어진 회로를 따라서 살아가는 단자화된 몰개인성의 개인들 - 획일적 공간 구획뿐인 거대한 시멘트 구축물, 아파트는 이 시대 삶의 두 조건에 대한 상징공간이다. 이 상징공간의 이름은 폐허다. 그 안에서는, 아도르노의 말을 따르면, 사람은 살아 있어도 '삶은 살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2. 알레고리 ● 사진은 순간의 예술이다. 그런데 이 시간 아닌 시간의 이름인 '순간' 동안에 사진 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물론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포착된다. 디테일과 뉘앙스가 내포된다. 사건이 기록되고 기억이 저장된다. 하지만 사진의 순간 동안에 일어나는 진정한 변화는 형식의 혁명이다. 사진의 순간은 상징이 알레고리로 변전되는 순간이다. ● 상징과 알레고리를 변별 짓는 건 전체와 개체의 관계다. 상징은 개체를 전체 안에 통합하는 형식이다. 개체의 의미가 전체 속에서 규정되고 분배되고 종합된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개체를 통해서 전체가 조망되는 형식이다. 알레고리에서 중요한 건 전체의 이념이 아니라 개체의 실존이다. 개체의 실존을 주목하지 않는 전체를 알레고리는 이데올로기로 고발한다. ● 사진은 운명적으로 알레고리적이다. 사진의 대상은 보통명사가 아니라 언제나 고유명사다. 개념이 아니라 실존적 개체다. '여기 지금 이 사람(것)'이 사진의 대상이다. 롤랑 바르트를 환희케 했던 겨울온실 사진 속의 어머니, 그 어머니 또한 개념과 보통명사로써의 '어머니'가 아니라 유일무이한 '나의 어머니'였다. ● 그러나 사진의 알레고적 성격이 개체의 재현성 때문만이 아니다. 사진의 알레고리적 성격은 사진의 탈취성에서도 연유한다. 사진을 찍는다는 건 사물이 소속된 관계망으로부터 컨텍스트(context)로부터 또 연속성으로부터 그 사물 하나를 훔쳐오는 일이다. 사물 하나가 얼굴 하나가 훔쳐지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 사진을 찍을수록 자신의 정체성이 해체된다는 강박관념에 발작이 시달렸듯 장면 하나가 훔쳐질 때마다 코드의 시스템, 기능의 시스템에는 구멍이 생기고 틈새가 벌어지는 것은 아닐까? 바르트가 사진을 의미의 부여가 의미를 무의미로 환원시키는 매체로 이해할 때, 그는 사진의 알레고리적 성격을 다르게 말하고 있다. 사진을 알레고리로 본다는 것, 그것은 사진의 순간을 코드의 체계, 기능의 시스템, 몰개체적 전체가 붕괴되는 순간으로 경험하는 일이다. 하지만 사진의 순간이 오로지 의미해체의 순간일 뿐일까? 그것은 알레고리의 또 하나의 특성인 의미생성의 순간이기도 한 것은 아닐까?
3. 밤의 아파트 ● 강봉조는 낮의 아파트를 찍지 않는다. 그녀의 사진적 대상은 밤의 아파트다. 그 밤의 아파트를 그녀는 '자라는 것이 사는 공간'이라고 부른다. 일종의 소격효과를 일으키는 이 타이틀과 더불어 낮의 아파트는 밤의 아파트로 알레고리화된다. 그리고 그 알레고리 속에서 아파트는 삶이 살지 않은 공간이 아니라 자라는 것이 사는 공간으로 의미전환을 겪는다. 이 역설적인 의미반전은 밤의 아파트 시리즈 사진 속에 들어있는 일련의 이미지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서울과 지방도시 뿐만 아니라 멀리 중동과 일본까지 이어지는 강봉조의 밤의 아파트들에는 시간과 장소를 달리하면서도 일관되게 내장된 이미지 메타포들이 있다. 그것은 밤과 빛과 속도다. ● 밤과 빛과 속도의 이미지들은 우선 시각적 연상작용을 가능하게 만든다. 시멘트 축조물의 단단한 윤곽을 지워가는 어둠, 그 어둠이 깊어 갈수록 창을 밝히는 백색의 빛들, 그 어둠과 빛, 흑과 백의 대조를 더욱 가열하게 부각시키는 대도시의 속도감은 낮의 아파트가 빠르게 해체되면서 살아있는 공간인 밤의 아파트로 전환되는 오버랩의 연상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의미의 역설을 이루며 아파트를 알레고리화 하는 밤과 빛과 속도의 이미지들의 미적경험이 단순히 그러한 시각적 연상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다 깊은 사진의 알레고리적 경험, 즉 생성의 경험과 연관되어 있는 것 같다. ● 알레고리를 의미의 해체만이 아니라 의미의 생성으로 이해했던 사람은 벤야민이었다. 텍스트를 알레고리로 경험하는 일은 그 텍스트의 의미조직을 파열시키며 '울트라바이올렛(Ultra-violet : 자외선)의 광선처럼 태어나는 또 하나의 문장(Schrift)'을 읽는 일이라고 벤야민은 말했다. 그러나 이 또 하나의 문장과 해후하는 경험은 문학 텍스트만이 아니라 사진의 경험이기도 하다. 사진의 알레고리적 경험을 벤야민은 사진을 '효소(Ferment)'로 은유하면서 설명했다. 효소는 자신을 둘러싼 외부조직의 입자들을 해체시키는 힘으로 부풀어 오르면서 그 팽창력은 조직의 입자들이 빠르게 해체될수록 더 더욱 가속화 된다. 이처럼 해체하는 힘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시키는 효소의 역설이 사진의 역설이라면 이 역설의 경험이 다름아닌 강봉조의 사진들에서 받게 되는 미적경험인지 모른다. 그리고 밤과 빛의 강렬한 대조, 소멸과 생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속도 이미지. 의미와 반의미를 함께 지시하는 타이틀의 아니러니가 부여하는 미적경험 속에서 우리는 울트라바이올렛 광선의 문장 하나를 읽는지 모른다. ● 어둠 속으로 묻히며 빛의 총화로 빠르게 만개하는 밤의 아파트. 밤과 빛과 속도의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울트라바이올렛의 문장 하나. 이 문장을 강 봉조는 '자라는 것이 사는 공간'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벤야민 자신이 그렇게 말하듯 이 문장은 '획 지나가는' 문장이다. 너무 빠르게 피었다 스러져서 미처 그 의미를 읽어낼 수 없는 문장이다. 때문에 밤의 아파트 시리즈를 작가와 동일한 의미로 번역해야 하는 의무는 우리에게 없다. 미적 경험의 공간은 언제나 수수께끼의 공간이지만 프루스트는 그 공간을 들어가는 문이 수없이 많은 밀폐공간이라고 불렀다. ●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미적경험의 스핑크스적 성격이다. 진정한 미적경험은 그 충격력으로 보는 이에게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은 때로 가열해서 스스로 그 질문의 답을 얻어내지 못하는 한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강봉조의 사진들도 예외는 아니다. 그녀의 사진들 속에서 알 수 없는 문장 하나를 읽은 사람은 쉽게 전시장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테베로 입성하기 위해 스핑크스의 질문을 풀어야 했던 사람들처럼 우리들 역시 스스로 문장을 해독하기 전까지 강봉조의 밤의 아파트를 통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 김진영
Vol.20020501a | 강봉조展 / phot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