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2_0305_화요일_06:00pm
박여숙화랑 서울 강남구 청담동 117-41번지 Tel. 02_549_7574
서정국의 작업은 흔히 대나무 이미지를 변주한 선조(線彫)로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는 소재(자연)나 그 방법(線)이 전통적인 정서에 근거하면서도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런 단편적인 평가 이면에는 실로 다양한 작업들이 존재한다. 드로잉과 평면 회화, 사진 콜라주와 비디오 영상 작업, 그리고 도판(陶板)을 이용한 저부조 작업과 공간조형작업에 이르는 다양한 작업들을 대하다 보면, 작가가 체질적으로 어떤 하나의 장르에 얽매여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외관상 서로 무관해 보이는 이들 작업은 실상 서로가 서로를 견인하면서 자연이란 뿌리에 이어져 있다. ● 종이 위에 먹으로 그린, 붓이 지나간 가장자리를 따라 희끗희끗 흰 바탕의 여백이 드러나 보이는 드로잉은 빛을 반사하는 수면과 함께 그 깊이를 헤아릴 길 없는 심해와 심연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해, 그 표면으로부터 관통할 수 없는 깊이를 드러낸다. ● 또한 공간조형작업에서는 투명하고 맑은 검푸른 대기 속에 발광성의 노란색과 청색의 별들이 총총한 밤하늘의 별자리를 형상화하고 있다. 여기서 노란색은 가까운 곳의, 그리고 청색은 좀 더 먼 곳의 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별들은 실상 영상이 아닌 물질적인 실체를 갖고 있다. 즉, 특수 재질의 목판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파편들인 것이다. 그렇게 별의 파편이 떨어져 나간 목판은 균일한 하얀 평면과 최소한의 점(얼룩)들로 이루어진 화면으로써 모더니즘 특유의 형식주의 회화를 실현하는가 하면, 저부조의 입체 표현으로써 이를 넘어서기도 한다. 여기에 별자리가 갖는 주술적인 의미와 별자리에 결부된 인간의 기원과 시상(詩想)이 작업의 지평을 증대시킨다. ● 별들은 목판과 함께 도판(陶板)에 의해 그 형상을 얻기도 한다. 이를테면 유약을 발라 소성한 도판에 별자리를 새겨 그 표면을 깨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목판이건 도판이건 그 표면의 자국은 별자리이기 이전에 소재의 일부인 파편이며, 작가의 관념이 머물다간 흔적이다. 그러니까 별자리의 정형과 파편의 비정형, 별자리의 필연과 파편의 우연, 별자리의 관념과 파편의 물질이 교차한 흔적이다. 보기에 따라서, 검거나 푸른 색 바탕에 하얗게 드러난 그 흔적은 별자리뿐만 아니라 만개한 매화나 이끼 등의 지의류 식물이 표면에 각인된 화석이나 수석을 상기시킨다. 이로써 별자리를 소재로 한 작가의 일련의 작업은 한낱 질료를 별자리의 주술적 맥락으로 변용한 것으로서, 연금술적 점성술적 상상력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식물적 상상력을 관통하고 있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삶과 죽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살아있는 것이며, 의미가 없는 것은 죽은 것이다. 이는 살아있는 사람조차 나와의 교감이 없다면 죽은 무생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대신 발에 채는 돌멩이 하나, 바람 한 점도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말을 걸어올 때 유생물이 된다. 이런 사물이 갖는 생명의 가능성을 인식하는 통로가 바로 물질적 상상력이다. 한낱 죽은 사물과 현상이 의미화라는 과정을 거쳐 유생물로 환생하는 것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위안이나 정감을 동하게 하는 사물이 의외로 많음을 생각하면 이런 사실은 쉽게 설득력을 갖는다. ● 서정국은 건축 공사장에나 있음직한 사물들에게 생명을 수혈한다. 콘크리트 구조물 밖으로 불거져 나온 철근이나 철사가 입방체의 시멘트 구조물로 된 화분에 심겨져 난초로 다시 태어나는가 하면, 지지대를 고정시키는 데에 쓰였음직한 구부러진 철사가 이름 없는 풀꽃의 삶을 부여받는다. 여기서는 더 이상 그 사물 자체를 상기시키는 어떤 인공적인 자취도 느낄 수 없다. 특히 녹쓴 철사에서는 시간의 궤적마저 느껴진다. 이는 아마도 이름 없는 것들, 의미를 얻지 못하고 버려지고 잊혀진 것들에 투사한 작가의 애정과 의미부여 탓일 것이다. 이 작업은 선조(線彫)와 사물의 의태(擬態)와 식물적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는 이후의, 흔히 대나무 이미지로부터 일정한 변주를 꾀한 것으로 알려진 일련의 작업들을 예시해 준다. ● 그러나 철이나 스텐 봉을 용접하는 식으로 이루어진 작가의 일련의 조형물이 갖는 대나무 이미지와의 관련은 그 자체 결정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사물이 생명을 흉내내는 의태에 연유한 것이다. 즉 그것은 도판과 매화와의, 철사와 난초와의 관계의 연장선에 있으며, 그 저변에는 죽은 사물의 세계를 유기체화하려는 식물적 상상력이 깔려 있다. 수직으로 서 있는 조형물이 해바라기하는 식물의 생리를 말해주는가 하면, 무수한 매듭들은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이 거쳐야 할 통과의례의 무수한 단계들을 상기시킨다.
흥미로운 것은 군집을 이룬 수직 조형물 가운데 하나를 가볍게 건드리면 미세한 음의 파동이 서서히 전체에 퍼져나가는데, 이런 사실이 명상으로 유도하는 악기를 떠올리게 한다. 심지어 이런 소리가 조형물의 물적 형상보다 더 실제적인 것으로 체험될 정도이다. 비유컨대 현악기의 줄이 마찰될 때 나는 소리가 대기 중의 공기를 공명시키며 아주 멀리까지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과 흡사하다. 여기서 소리는 방금 전까지 견고하고 확고하게 형상이 있던 공간에 그 형상이 빠져나가고 기억의 자취나 흔적, 잔영으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기억과 잔영, 흔적과 부재의 아우라 같은. 이렇듯 빈약하리만큼 절제된 그의 조형물은 실상 형상과 함께 내면에 공명하는 소리마저 포괄하는 커다란 울림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 작가는 이런 수직 조형물과 함께 자유자재의 곡선 형상을 조형한다. 마치 불규칙하게 엉킨 식물의 덩굴이나 뿌리를 연상시키는 곡선 형상은 수직의 조형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유기(체)적이다. 조형물은 좌대 위에 얹혀지기도 하고, 좌대 없이 바닥에 놓이거나 드물게는 벽에 걸리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서 좌대는 작가 특유의 식물적 이미지로 인해 마치 식물의 생장에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하는 숙주 같다. 그만큼 유기적 일체감이 느껴진다. ● 흥미로운 것은 시작도 끝도 없이 매듭으로 이어진 구조물이 뫼비우스의 띠를, 그리고 자신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 우로보로스의 신화를 상기시킨다는 점이다. 연이은 매듭들은 순환하는 자연의 원리나 인연의 끈 또는 인과와 윤회의 고리를 떠올리게 한다. 구조물은 존재의 이중성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자기완결적이고 폐쇄적인 구조로써 인과의 고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의 성질을 드러내는 한편, 완결되지 않은 열려진 구조로써 무한 연쇄로 이어진 존재의 성질을 동시적으로 실현한다. 거기에는 무한대를 향한 마나(우주적인 에너지)의 순환운동의 연쇄만 있을 뿐, 시작도 끝도 없고 무생물과 유생물을 나누는 구분도 없다. 그리고 필연과 우연, 주체와 객체, 인간과 사물을 나누는 경계도 없다. 이런 유기적이고 식물적인 상상력으로 작가는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대타적 존재로 이어져 있음을 드러낸다. ■ 고충환
Vol.20020305a | 서정국展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