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 위를 밟기

바루흐 고틀리프展 / Baruch Gottlieb / installation   2002_0209 ▶ 2002_0302

바루흐 고틀리프_피부위를 밟기_옵셋 인쇄_280×700×1200cm_2001

대안공간 루프 서울 마포구 서교동 333-3번지 B1 Tel. 02_3141_1377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그것이 어떻게 진행되든 이항대립의 형식을 갖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성 대 여성, 이성 대 동성, 육체 대 정신, 결혼 대 독신 등이 기본적인 대립항들로 자주 언급되고, 여기에 특정한 판단들이 윤리에 기초하거나 인식에 기초해서, 마지막으로 감정과 관련하여 무수히 많은 대립항들을 만들어낸다. 선과 악, 성의 억압과 해방, 쾌락과 절제 등등. ● 성은 분명히 생물학적이다. 자연계에서 쉽게 확인되는 것처럼 성적 욕망은 가장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이고, 종의 발생과 유지와 가장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 그래서 때때로 다른 의도가 개입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성행위처럼 순수한 행위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고, 더 이상 생각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여기서 하나의 모토가 성립한다. "본능에 충실하자." 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이 있다. 성은 또한 분명히 역사적이면서 결국에 이성적일 수밖에 없는 철학적 사고의 대상이다. 로마제국이 멸망한 원인 중의 하나가 성의 문란 때문이었다고 판단하는 역사학자나, 종의 절멸을 기도하는 인종주의자들에게 성은 분명히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대상이며 권력의 유지와 분배에 관련되어 있는 대상이다. 대학의 선후배 관계에서 여성이 남성선배를 부르는 호칭이 오빠에서 형으로 변하고, Miss.와 Mrs.가 Mis로 통합되는 현상 또한 성의 사회적, 더 나아가 계급적 성격을 드러내고 권력관계의 미묘한 변화를 보여준다. platonic love라는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고대에서부터 철학자들은 성을 인간화된 성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승화시켜 고양된 무엇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래서 사랑은 육체가 아닌 정신이 하는 것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그 결과 사랑은 육체와 분리되고, 육체적인 성과 정신적인 성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그리고 육체적인 성과 정신적인 성은 인간의 역사에서 무수히 경쟁해 왔다. 따라서 사랑이라는 개념만큼 이데올로기에 가득 찬 개념도 없다. 하나의 성은 다른 성을 이데올로기라고 공격하거나 배격하길 원하기 때문이다. 누구든 성을 경험하게 되기 때문에 성에 관해서는 누구든 말할 수 있고, 아는 체를 할 수 있지만, 또한 성에 관해 말하는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이미 거의 모든 것이 말해졌기 때문에 새로운 내용을 말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단지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성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거나 귀기울이지 않는 경우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그는 단지 자신의 사적 경험을 절대화시키거나 일반화시켜 타인들에게 설명하고, 주장하고, 강요할 뿐이다. 그것은 지루한 반복일 뿐이다.

바루흐 고틀리프_피부 위를 밟기_옵셋 인쇄_280×700×1200cm_2001

Gottlieb는 바로 이러한 육체와 성을 가지고 작업한다. 그는 인체사진을 찍어 그 몸을 파편화시켜 하나의 반복적인 패턴으로 만들어 종이에 인쇄한다. 반복적인 패턴 속에는 성기도 있고, 엉덩이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주목해서 보지 않으면 그것은 반복적인 패턴을 가진 벽지나 포장지처럼 보인다. 때로 그것은 카페트의 무늬같기도 하다. 그는 그러한 인체를 반복적인 패턴으로 변형시킨 종이를 전시장 벽에 도배한다. 그리고 바닥에도 깐다. 관객들은 그 위를 걸어도 된다. ● Gottlieb의 육체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의 작업에서 육체는 관객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대상의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는다. 말하자면 그의 작업에서 패턴화된 육체는 감정이 없어 보인다. 그는 그 육체의 소유자의 정서, 태도를 드러내는 데 관심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육체를 통하여 바라보는 자로 하여금 어떤 에로틱하거나 헐벗은 육체의 가난함 따위의 익숙한 감정을 일으키려 하지 않는다. 이 작업을 보는 사람에게 그것은 무늬를 가진 벽지, 포장지, 카페트의 반복적인 무늬가 전달하는 느낌과 비슷한 느낌을 전달한다. 그렇다면 Gottlieb의 작업은 그저 인체를 이용한 패턴디자인인가?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그가 보여주는 분리된 인체의 덩어리들은 매우 사실적인 사진들의 조합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인격으로 보이지 않는 살덩어리, 즉 탈인격화된 사물들이다. 벽지에서 느끼는 감정은 그저 최초의 반응이고, 이내 거기서 어떤 인체들을 발견할 때는 묘한 감정이 발생한다. Gottlieb는 전지구적 사회가 육체와 정신을 분리시키는 소외의 문화로 변형되었고, 자신의 작업은 그러한 사회의 디지털적인 대칭물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의 작업은 소외의 문화에 대한 비판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전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전략을 o[n]amental strategies라고 부른다. 말하자면 그의 전략은 장식적이면서 동시에 자위-정신(onanism+mental)인 육체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는 육체는 단지 장식으로 이용되고 있기 때문에 어떤 강한 성적 감정을 유발하지 않는다. 반복적인 패턴은 상품형식을 차용한 것이지만, 그것은 상품광고가 육체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어떤 성적매력도 차용하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육체는 쾌락도 수치심도 유발하지 않는 육체이다. 육체는 본래 성적이지만 그가 보여주는 육체는 성적인 요소를 배제한다. 그럼으로써 그가 보여주는 육체는 욕망을 자극하기 위하여 인간화된 성과 본능적인 성을 교묘히 배합하는 광고사진과 다르게 된다. ● 또 하나의 특이한 점은 그가 자신의 작업을 바닥에 설치함으로써, 관객들이 그 위를 걷는 경험을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은 사진 속의 육체를 단순히 시각적 경험의 대상으로 머무르도록 하지 않는다. 그 위를 걸으면서 생기는 느낌은 관객마다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것은 육체 위를 걷는다는 일종의 폭력적 쾌감 또는 거부감이 될 수도 있고, 시각적 경험을 벗어나서 육체를 촉각적으로 경험한다는 착각일 수도 있다. 그러나 Gottlieb는 그것이 육체의 기관들이 느끼는 감각, 즉 몸이 반응하는 경험이 되길 원한다. 그것은 몸의 관능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몸에 대해서 몸이 느끼는 친밀함 같은 것이 될 것이다.

바루흐 고틀리프_피부 위를 밟기_옵셋 인쇄_280×700×1200cm_2001

그가 보여주는 성은 최초의 기원을 가정하는 자유롭고, 본능적인 성도 아니고, 역사화된, 즉 철저하게 인간화된 성도 아니다. 이도 저도 아닌 묘한 중립지대에 그의 육체가 있다. 그의 작업에서 육체는 다른 사물들처럼 그저 그 자체로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것은 억압된 성의 표현도 아니고, 에로틱한 성의 표현도 아니다. 본능적인 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든, 역사적이고 인간화된 성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든 소위 어떤 성에 대한 태도를 위선이라고 지적하고, 위선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순간, 그 성은 다시 위선으로 추락하기 마련이다. 성은 언제나 그 어느 편에도 속해 있기 때문이다. Gottlieb는 그러한 위험을 교묘하게 피해 가면서, 육체를 사물처럼 다루고, 반복적인 패턴 속에서 보여줌으로써, 성적 담론 자체를 육체에서 지워버린다. 그는 성에 관해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육체를 드러냄으로써, 짐짓 육체는 거기에 있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안성열

■ Baruch Gottlieb는 캐나다의 몬트리올에서 출생했으며, 1993년 몬트리올의 콘코디아 대학에서 영화제작을 전공하고, 1999년 이후로 베를린에서 작업하고 있다.

Vol.20020226a | 바루흐 고틀리프展 / Baruch Gottlieb / installation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