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사간 서울 종로구 소격동 55번지 Tel. 02_736_1447
視點·주거지에 대한 추억 ● 지난 2001년 12월 23일, 한국방송공사의 일요스페셜이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난곡의 사계, 마지막 달동네 1년의 기록'을 방영한 바 있다. 행정구역상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7동 산 101번지로 분류되는 이 지역은 이 시대의 마지막 남은 달동네로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사는 사람들의 안식처이자 생존의 각축장이기도 하다. 1967년 정부의 판자촌 철거정책에 따라 서울의 각지에 형성되었던 판자촌 거주민들이 이주하면서 거대한 규모의 도시빈민 집단으로 자리잡은 난곡이 그 엄청난 규모 때문에 도시재개발사업에서 늘 제외되었으나 본격적인 재개발사업의 추진으로 무허가 주택들이 하나씩 헐려나가고 있는 현장을 르포형식으로 취재한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우리는 개발과 발전의 논리 뒤에 가려진 소외된 사람들의 삶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난곡의 열악한 주거환경은 가난을 상속받아야 했던 도시빈민들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데 지난 IMF 충격이후 새롭게 등장한 빈민들이 삶의 둥지를 찾아 이곳으로 몰려왔다는 취재기사를 보면서 풍요 뒤에 감추어진 궁핍의 비참함이 얼마나 뼈저린 것인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나마 형편이 좀 나은 사람들은 주변의 임대아파트나 월세를 선택해 떠나고 노동력을 상실한 노인들만 방치되듯 남겨지고 있는 현실은 거대도시 서울의 아물지 않은 상흔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일년에 걸쳐 난곡의 사계를 담아낸 카메라의 앵글을 보면서 그것이 이 처절한 삶의 현실을 은폐하는 이상야릇한 감상주의를 자극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즉 게딱지처럼 나지막하게 옹기종기 앉아있는 가난한 지붕 위로 덮인 눈, 주변의 고층 아파트의 호위를 받듯 관악산 자락을 따라 올라가며 명멸하는 불빛, 골목, 낡고 옹색한 대문 앞에 나와 한가하게 잡담하고 있는 아낙네들의 모습은 난곡에도 사람이 살고 있으며, 그들의 신산한 삶 속에도 행복과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 의도를 반영하고 있으나 시청자들에게 카메라를 통해 여과된 영상은 '슬픈 아름다움'의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비록 어제의 현실을 담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카메라에 기록된 영상은 언제나 과거형으로서 향수를 자극하기 마련이다. 그런 점을 고려하면 난곡의 일년을 담은 이 다큐멘터리는 급속한 경제발전에 환호해온 우리가 잊어버린 과거를 뒤적이게 만드는 동시에 그것을 철저하게 대상화시켜 나와 무관한 타자의 삶, 그러므로 우리를 방관적 관찰자의 위치로 고정시키는 한계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공간·포착·경험 ● 이길렬의 작고 옹색한 판잣집들을 보노라면 영락없는 난곡의 축소판을 연상시킨다. 가난을 미덕으로 여기는 공자의 안빈낙도(安貧樂道) 사상이나 프란체스코의 박애주의를 계승한 것일까. 그가 만든 집들은 한결같이 궁색하기 이를 데 없고, 판자로 얼기설기 엮어놓은 달동네의 전형을 보여준다. 계획적이라기보다 직관적이며 임시방편이고 주먹구구식인 이 가난한 가옥들은 하늘로 이어지는 길인 마냥 벽을 따라 도열해 있는가 하면 전시장 바닥에 야트막하게 내려앉아 있다. 작가는 이 집들로 구성, 연출, 설치된 공간을 압축하는 주제로 '고도 Altitude'를 제시하고 있다. 사실 어쩌다 지방이나 외국으로 갔다가 비행기로 돌아오는 길에 관악산을 경계로 펼쳐진 안양이나 신림동 일대를 내려다볼 경우도 있다. 내가 대지 위에 서 있을 때의 시점과는 다른 공간에 대한 경험, 즉 고도는 대상과의 '거리두기'를 통해 그것을 색다르게 지각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맞은 편 언덕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바라본 난곡의 풍경이 아름답게 보일 수 있는 것처럼 높은 위치에서 내려다 본 풍경 역시 그 아래에서 펼쳐지는 삶의 부산함이 배제된 하나의 정물로 보여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이길렬이 제시한 고도는 곧 시점과도 같은 맥락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카메라가 취할 수 있는 고원적(高遠的)이거나 부감적(俯瞰的) 시점에 따라 달동네의 무질서가 질서정연한 주거지의 도열로, 궁상맞은 삶의 공간이 따뜻하고 푸근한 눈요깃거리로 비쳐지는 것이다. 물론 이길렬이 제작한 판잣집들이 난곡의 그것을 재현해 놓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베니어합판, 비닐장판, 함석, 골판지, 석고, 천, 유리, 아크릴 판 따위의 재료를 사용해 만든 이 집들이 도시의 질병이라 할 수 있을 판잣집을 연상시킨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벽면을 타고 올라가는 판잣집의 행렬은 난곡을 단면으로 잘랐을 때 볼 수 있는 풍경이며, 전시장 바닥에 수평으로 도열시킨 가옥들 역시 하늘에서 내려다 본 가난한 동네의 인상을 압축하고 있다. 일정한 고도에서 내려다 본 풍경은 공간에 대한 지각의 지평을 넓혀준다. 그만큼 우리가 지상에서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시점으로 대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도 생기는 것이다. 이 거리두기를 통해 삶의 아비규환이 아니라 관찰자적 시점에서 그것을 관조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대상을 보다 객관화시킬 수 있는 공간을 소유하게 된다. 지하공간의 지면에 펼쳐진 가옥들을 계단 위에서 내려다본다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보는 시점과는 또 다른 사선적(斜線的) 시점을 제공한다. 즉 계단의 어느 지점에서 아래에 펼쳐진 풍경들을 보노라면 평면전개도에서 경험할 수 없는 입체적 시점을 유지할 수 있다. 이것은 카메라를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시점과 일맥상통한다. 작가는 그런 점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계단에 망원경을 설치하고자 한다. 결국 우리가 망원경을 통해 풍경을 본다는 것은 렌즈가 포착할 수 있는 경계, 앵글에 의해 한정된 공간을 지각한다는 점과 상통한다. 포착은 시간을 한정한다. 그것은 경험의 연속이 아니라 경험의 찰나를 지향한다. 보는 순간, 대상은 전체적으로 하나의 분절된 인상으로 다가온다.
공간의 연출 ● 사물이 놓여진 위치에 따라 그 성격이 달리 지각된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찰스 시몬즈(Charles Simonds)란 미국작가는 도시 모퉁이의 벽돌건물의 한켠에 벽돌의 일부를 떼어내고 그 속에 고고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미니어쳐 성채(城砦)를 집어넣어 사람들로 하여금 걸리버의 시점에서 그것을 경험하도록 의도한 바 있다. 이 경우 그가 만든 작은 공간은 마술경(魔術鏡)과도 같은 성격을 지닌다. 일종의 훔쳐보기 본능에 대한 자극이라고 할까. 구멍을 통해 낯선 세계를 바라본다는 것은 칼 융(Carl G. Jung)이 말한 성적 욕망의 상징인 열쇠구멍 속을 본다는 것과 상통한다. 그렇다면 이길렬의 펼쳐진 풍경은? 그것도 축적이 아닌 병렬의 형식으로 지면에 깔려있는 풍경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독립된 개체로서는 입체물이지만 공간에 펼쳐짐으로써 평면성을 강화하고 있다. 각각의 가옥들은 모두 독립된 높이를 지니고 있으나 공간에 펼쳐진 결과로서는 거의 평면적이다. 더욱이 계단에서 내려다보는 사람들의 시점에서 그것은 더욱 평면적으로 보일 수 있다. 어느 고도에서 내려다 본 세계는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일까.
부분적으로 색채를 지니고 있으나 전반적으로 재료의 고유한 색을 존중하여 짙은 갈색 덩어리로 비쳐지는 주택들의 행렬, 연속된 지붕들이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과 대조를 이루는 넓은 하늘 사이에 가로놓인 선적 요소, 주택의 짙은 고동색과 거의 무채색에 가까운 하늘의 색채대비, 이 모든 요소들이 평면공간을 구성하고 있는 사진작업에서도 그의 평면에의 관심을 노정하고 있다. 연출된 공간은 그러므로 우리의 시점을 정면성으로 한정한다. 물론 지면에 깔려있는 주택들 사이로 난 공간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사물의 개체는 부각될지언정 거리두기란 연출의 의도는 그만큼 멀어진다.
만약 우리가 난곡의 속으로 들어가면 그 일상은 경험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이 만들어내는 풍경의 전체를 경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듯 그의 작품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는 것은 그에 의해 연출된 공간을 연출된 것으로서가 아니라 실제 현실의 연장으로 오해할 위험도 있다. 연출된 공간을 연출 그 자체로 인식하기 위해 우리 또한 일정한 고도를 유지한 채 그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럴 경우 개체가 전체와, 또한 전체가 개체와 연대하여 하나의 환경을 제시하고 있음을 느끼고 경험할 수 있음을 그의 작품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만들어낸 사물과의 동화가 아닌 거리두기를 통해 사물과 세계를 새롭게 지각하도록 만드는 하나의 방법이자 길이다. ■ 최태만
Vol.20020216a | 이길렬展 / LEEGILRYUL / sculptu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