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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 일반의 변두리 - 복사 ● 복사기의 기원은 1837년 프랑스의 다게르가 은판(銀版) 위에 물체의 모습을 고정시키는 사진술을 발명한 때부터 시작한다. (중략) 대중화를 이루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59년 9월에 등장한 자동고속복사기 '제록스 914'가 개발되면서부터이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나는 이 글을 아직 답을 모르는 하나의 질문에서부터 시작하려 한다. 그것은 수많은 재현의 기제와 그것을 둘러싼 재현 담론-비평에서 왜 유독 복사기(Xerox)만이 예술적 재현 일반-재현의 장치, 그 재현의 방법론, 그 재현방법에 대한 인식론, 그 인식론에 대한 비판담론-에서 비껴서 있냐는 것이다. ● 문자 그대로 제록스, 즉 복사기는 "겹쳐서 베끼는 기계"이다. 서두에 인용한 복사기의 기원과 정의를 따르자면, 복사술은 사진술과 같은 시기에, 같은 방법론으로, 같은 필요에 따라 발명된 장치로 보인다. 그것들은 빛을 이용하여 얻은(읽은) 잔상을 화학적으로 고정시켜 원대상과 동일하지만, 또 실존적 차원에서 전혀 다른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미디어이다. 그런데 사진이 발명 초기부터 회화의 위협적 메커니즘이 되고, 현대 미술의 가장 영향력 있는 매체 중 하나가 되었다면, 왜 복사는 일부 미술가들이 방법적으로 사용하고는 있지만, 사진만큼의 비평적 논의가 이루어지지는 않는 것일까? ● 그것이 일반적으로 사진이나 그림, 문서를 이차적으로 재현하는 장치이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카메라나, 회화처럼 인간육체의 감각 중 시각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는다는 가정 때문일까? 아니면 사진과는 달리 복사는 그 표현의 영역이 극히 제한적이고, 소위 우리가 말하는 '예술적 아우라'를 발생시키기에는 초기부터 현재까지 지나치게 사무적, 일상적, 단순한 도구로 간주되기 때문일까? ● 정확한 답을 알 수도 없고, 이 문제만으로도 시대사적, 과학 기술적, (미술)인식론적 맥락 등이 교차되어야 하는 방대한 연구가 되겠지만, 단편적으로 보자면, 앞선 나의 질문에 답이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복사는 사진, 회화와는 달리 거리(距離)의 부재1)로 인해 작가-인간의 주관적 시선과 (무)의식(예술이 가장 자랑하는 것들)이 개입하기 어렵다는 점, 재현의 주체나 대상이 직접적으로 투사된다기보다는 그 직접성을 이차적으로 '복사-반복'해 낸다는 점, 아우라를 갖기도 전에 먼저 일상의 삶으로 들어가서 유용하고, 쉽고, 값싼 것이 되었다는 점등을 복사기가 예술적 재현장치로 별반 흥미를 끌지 않는 이유로 들 수 있을 것이다. ● 그러나 말을 뒤집으면, 이러한 복사의 태생적 조건, 한계가 모든 매체가 예술의 방법론이 되고, 미술이 일상의 삶을 동경하고 그 경계를 지우려 하는 것을 넘어 일상이 미술화 되는 현재적 상황에서 복사의 재 맥락화를 가능하게 하는 적극적 조건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사진과 복사', 재현의 방법 면에서의 형식과 '육체와 사물성' 이라는 내용. 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 하는 것으로 보이는(어떤 작가가 안 그렇겠는가마는) 김영미, 박진호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각자)자신들의 작업에 사진술과 복사술을 '겹쳐서' 쓰고 있다.
작품들을 복사하기2) ● 김영미, 박진호 두 작가는 작품이 보여주는 표면의 실제 이미지는 다를지라도 작업의 동기가 되는 정서와 그것을 구체화하는 방법론은 역전되면서도 같은 맥락에 있어 보인다. ● 먼저, 작업의 동기가 되는 정서란 그들이 세계에 대하여 작업을 하는 이유 내지는 태도가 될 텐데, 그것은 바로 '차이(difference)'에 대한 것이다.(이 부분은 마지막 장 "차이의 폐기/차이의 긍정"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 다음 그들의 태도를 드러내는 방법론이 있다. ● 그 방법론을 엿보기 위해, 두 작가의 작품을 언어적으로 복사해 보자. ● 김영미의 "3' 07"(3분 07초)"는 세차되고 있는 차안에서 경험하는 실제적이지만, 심리적인 풍경을 10개의 시간 단위로 분절시킨 것이다. 사진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가정하는 선적 시간을 물리적으로 분절시킨 것이라면, 김영미는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고 있다. 36컷, 72컷.. 등등으로 분절된 시간 풍경 사진은 다시 '결정적 순간'을 드러내기 위해, 취사선택되고 의미-대상풍경의 관계를 모호하게 하기 위해 200%, 400%... 식으로 한지에 확대(blow-up)복사 된다. 결국 작가 혹은 우리에게 돌아오는 이미지는 심도가 낮은 복사기에 의한 흑백의 평면적 분리, 기계 매커니즘과 한지가 만드는 가변적이고 정의하기 어려운 상황풍경, 모호한 잠상3)의 실마리 같은 것이다. ● 박진호의 작업은 오히려 김영미의 공정이 역전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메마르고 범상한 자신의 육체를 그 또한 건조하고 냉랭한 복사기계의 평면판에 들이밀고, 값싼 A4용지에 재현해 낸다. 다음 원본(작가의 얼굴)의 2차 이미지를, 다시 복사하고, 그 걸 또 복사하고 하는 식이다. 작가의 얼굴이 실제 그 자체라면, 재, 재, 재 복사되는 순차적 이미지들은 어느 고비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은 폐허처럼 스러져 간다. 박진호는 이 도미노 복사 이미지 각각을 또 다른 재현 기계인 카메라의 힘을 빌어 정착시킨 후 인화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육체의 이미지는 실제 육체의 흔적을 갖고 있지 않고, 오히려 A4용지의 육체성(물질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마치 사진이 사진 찍힌 대상의 실제 쪼가리 하나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실재를 담보해 내는 것처럼.
차이의 폐기/차이의 긍정 ● 우리가 이제는 흔하게 알고 있는 완벽한 재현에 대한 열망과 상대적으로 그 반대편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재현체계에 대한 비판 양자는 시각의 권력, 주/객, 현실/비현실, 진리/허구의 이분 논리에 기초한 것이고, 재현 비판은 그러한 권력과 이분법의 허위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재현 열망과 재현 비판의 이면에는 아직도 '차이'에 대한 모더니즘의 분리적 태도가 깃들어 있다. 즉 이분법의 폐기, 타자의 수용이라는 것이 문제가 될수록 분리는 강화되고, 고착된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하버마스는 모더니스트라기보다는 자신도 몰랐던 포스트모더니스트이다.4)) 역사적 아방가디스트들의 재현을 뛰어 넘어 미술이 일상적 삶에 다가간다거나, 그 경계를 지운다는 목표가 '차이의 폐기'라고 한다면, 미술과 생활세계의 차이들을 적극적으로 정색하여 바라보는 것은 오히려 그 차이들에 집중하고 끌어안는 '차이의 긍정'이다. 그렇다면 '차이의 폐기'가 아니라 '차이의 긍정'이야말로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재현을 넘어섬'이 아닐까? ● 나는 김영미, 박진호의 작업을 미술/삶, 이미지/실재, 진실/허구, 중심/주변의 도식에서 긋기(/)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을 사이로 위치해 있는 양자와 그 차이에 주목하는 것으로 본다. ● 예컨대 사실 박진호에게 있어 '복사'는 사진 작업에 있어 하나의 방법론이면서 동시에 사진을 정의하는 존재론이어 왔다. 그러니까 그가 사진과 복사의 혼재를 통해서 하고자 하는 바는 표현 수단의 일시적 활용이 아니라 예술사진의 존재론적 위상을 넘어서면서 끌어안기라는 것이다. 그가 재현해 내는 이미지는 우리가 예술사진에 기대하는 만큼 아우라 진 것이 아니다. 일상적 삶에서 쏟아져 나오는 숱한 복사물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것이 박진호가 예술사진의 존재론적 위상을 넘어서려는 일상성-비장함이다. ● 또한 김영미의 사진-복사 작업은 기술적 메커니즘의 객관성을 위해 누락되는 인간의 주관성을 바로 그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적극적으로 긍정하는 행위라 생각한다. 세차 기술이 만드는 별스럽지 않은 풍경을 카메라라는 객관적 시선을 통해 추상적(주관적)으로 보여주기. 실재하지만, 비현실적으로 시각화된 잔상을 확대 복사함으로써 그 비율만큼씩의 오차 끌어안기. 한 장의 세차 장면 사진은 네 쪽의 한지에 확대 복사되면서 각각의 복사지 상태(한계)를 드러내고, 기술적 오차는 비현실적 풍경으로 확대된다. ● 물론 이들의 차이를 긍정하는 태도가 얼마만큼 실천적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작가에게 있어 실천이란 결국 작품이 될 것인데,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김영미, 박진호의 작품에서 시각적 매혹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표면의 효과-복사가 반복될수록 흐려지고 거칠어지는 이미지(박진호), 중간톤이 뭉개진 흑백 이미지와 프레임 밖의 복사잉크(김영미)-는 분명 우리가 쉽게 동의해 줄 수 있는 하나의 실천적 예일 것이다. ● 마지막으로 글의 말미에서야 비로소 작가들에게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글쓴이의 비겁함을 용서한다면, 또 기왕에 질문으로 시작한 글을 질문으로 끝내는 멋을 좀 부려보자면, 나는 다음과 같은 비판적 질문을 두 작가에게 던지고 싶다. ● "우리가 쉽게 인지할 수 없는 차이들의 세계는 그렇게 메마르고 온기 없는가?" ■ 강수미
1) 무엇인가를 재현한다는 것에는 재현주체-재현장치-대상물이라는 삼각형 구도가 형성된다. 그리고 이 관계에는 필연적으로 거리(-)가 발생한다. 사진, 회화는 그런 면에서 물리적, 정서적 거리가 충분히 존재한다고 상정되고 있고, 그 거리에 재현주체가 어떻게 개입하느냐에 따라 작품(혹은 오브제)의 질이 결정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복사에는 작가-재현주체가 개입 할 여지가 별로 없다고 판단된다. 복사의 질에 대한 판단 기준은 대부분 기계적 성능의 질이다.
2) 여기서 '작품들'이란 내가 글쓰기를 하면서 대상화시키고 있는 김영미, 박진호의 작업들이며, '복사하기'란 이 작가들의 작품을 언어로 재현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그러나 언어가 대상, 사건을 완벽하게 복사-재현하는 기제가 아님을 우리가 인정한다면, 나의 '작품들을 복사하기'라는 표현은 꽤 부적절한 소제목일 것이다.
3) 잠상 潛像 (latent image): 브롬화은 등의 감광재(感光材)에 빛이 닿을 경우 빛이 닿은 부분이 눈에 보이지 않게 변화된 부분. 결국 실재로는 있으나 기계적/화학적 공정을 통해 우리 눈에 비가시적이 된 이미지일 것이다.
4) J rgen Habermas, "Modernity: Incomplete Project"(Ploto Press)와 슬라보예 지젝(Slavoj i ek)의 "포스트모더니티의 외설적 대상"(시각과 언어)을 참조, 비교
Vol.20020211a | 교·환-김영미_박진호 2인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