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 악몽을 꾸다

대안공간 풀 회화 워크샵 기획展   2002_0207 ▶ 2002_0219 / 12,13일 휴관

수신자_회화에 관한 4개의 부적절한 진술_4장의 사진_2002_부분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대안공간 풀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2_0207_목요일_04:00pm

참여작가 team N(엄혜윤 정혜정 전재운 이진경) 김진영 정우영 수신자 최은경 김화영 임현진 이미예

공개 세미나_2002_0216_토요일_03:00pm 발제_강수미/전시기획자, 전용석/회화 워크샵 운영위원 질의_최진욱/화가, 공성훈/화가 작가와의 대화_ 『회화, 악몽을 꾸다』참여작가

대안공간 풀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21번지 Tel. 02_735_4805

회화의 종말, 한계가 선언 된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러한 자의적, 타의적 판단의 실체는 명확하지도 않을뿐더러, 사실 회화 내부에서도 비판과 부정의 제스처만 무성할 뿐 어떠한 구체적 문제제기나 돌파구, 혹은 '회화 폐기(廢棄)'로서의 실천조차 말의 진정한 의미에서 "전시"된 적은 없다. ● 회화에 대한 진정한 상황 판단이 미술계 관행과 화가의 암묵적 담합으로 지연되고, 방만해질수록 회화는 진부하고, 지리멸렬한 미술적 습관이 된다. 현재 미술에서 회화는 '잘 죽을 수조차(회화의 죽음, 회화의 폐기)'없을 정도로 빈약해 졌지만, 끊임없이 자신의 정당성과 가치에 대해 외부적으로 약속 받고자 한다. "회화의 종말"같은 말은 그런 의미에서 회화가 자신의 존재를 외형적으로 증명 받고자 하는 목표점에서 스스로 꾸는 악몽이다. ● 현재 한국에서 회화를 둘러싸고 행해지고, 말해지는 모든 실천과 담론들은 서양에서 이식된 미술사적 당위론의 피상적인 수준을 넘지 못한다. 그것은 화가 개개인이 자신의 그림에 접근하는 심리적 상태에서부터 작업실에서 그림이 제작되어지고,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대중적으로 소비되며, 그에 따라 필연적으로 작품에 가해지는 가치평가, 즉 비평과 미술이론화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쳐 만성적으로 중첩되는 현상이다. ● 이 '만성적 피상성 증후군'은 어디에서 연유하는가? ● 그것은 첫째, 한국의 모더니즘이 아니라 1930년대 서구적 모더니즘 미술 기획이 그 동기에서부터 실현 불가능한 꿈을 꾸었던 데서 비롯한다. 일상적 생활세계와 미술 내부적 현실조건, 의식과 무의식, 창작과 소비가 공공적 삶에서 분리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 미술은 모든 현실 재현의 양상을 지우고, 은폐하고, 그것과 분리되고자 했던 것이다. 만약 이러한 현실에 대한 미술의 분리가 가능한 것이었다면, 미술은 완전히 자족적인 시스템을 구축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절대적 분리에 대한 열망'은 미술이 스스로 완결성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과학적 진보와 의식의 평준화에 의한 대중 문화산업의 엄청난 폭식성(暴食性)에 미술이 상황적으로 밀리고, 존폐 위기에서 마지 노선으로 채택한 빈곤한 욕망이었다. 그러니까 말을 바꾸자면, 모더니즘 미술은 현실 세계와 분리되고자 하는 만큼 현실 세계의 부르주아적 헤게모니를 차지하고자 하는 지독한 패러독스를 내재하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모더니즘 미술이 끊임없이 시달렸던 악몽이었다는 것이다. 그 열망이 미학적 실천을 고쳐 만들고, 경험을 의식의 수준으로 이주시킨 절박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미학과 그 전개는 과거의 경험들을 미학적으로 융합하고, 조밀화, 경직화시킨 피상적인 것임이 현실의 상황에서는 증명되고 있다. ● 둘째, 서구 모더니즘의 실제적 상황이 현실 제반 조건의 압박에 의한 유토피아적 열망이라는 피상성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었다면, 한국의 모더니즘 미술의 상황은 원인 제공조차가 내부에서 발화한 것이 아닌, '모더니티 콤플렉스'에 의해 강제로 이식된(혹은 흉내내기) 것이었다. 질문이 부재한데, 대답이 가능할 리 없고, 설사 선문답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미술이 도(道)를 연마하는 장이 아닌 다음에야 타자에 의해 제안된 피상적인 미술의 질문은 게으른 미술 실천만을 낳을 뿐이다. 이것이 한국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에 연루된 모든 미술 행위(창작행위, 전시 관행, 소비, 소통의 모든 장)가 겪고 있는 착각이다. 예컨대 우리는 우리의 토대-조건을 고려하고, 조사하는 것에는 무한히 게으른 채 상상적 대상에 대해서만 부단히 싸웠던 것이다. 아니, 싸우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 결국 같은 원인이 연쇄된 것이지만, 현재적 층위에서 회화적 실천과 담론이 피상적인 수준과 강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은 '회화'라는 존재가 자신의 역할 모델(role play)을 발견하는데 계속해서 실패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분명히 '그린다'고 하는 행위가 발산하는 정신적, 감각적 지점이 있을 것이고, '그림'이 투사하거나, 고정시키는 현실에 대해 회화와 공공적 삶은 특별한 매개적 관계를 형성하고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회화에 의해 환기되는 현실의 인식적, 지각적 층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quality)은 언제나 추상적으로 가정될 뿐이며, 표현과 유통의 필드로 들어서면 낡고 진부한 미학적 동어반복(예술은 예술이다)과 평균적인 미감의 수준(잘 그렸다. 그럴 듯 하다)으로 규준(規準) 되고 만다.

임현진_존재, 다시 보기_29×40cm_2001

충동의 목적 ● 회화 워크샵 기획전으로 기획된 『회화, 악몽을 꾸다』展은 습관적인 반성과 자위(自爲)의 지점을 넘어서서 '현재 회화가 무엇이 문제인지에 대한 세부목록', '현재 회화가 소비되는 방식에 대한 구체적 실례', '현재 회화가 어떻게 잘 죽을 수 있는지(회화 폐기)'에 대해 정색하고 질문한다. 또한 그 비판적 장을 구체화함으로써, 오히려 그 악몽의 부정적 토대를 회화-긍정의 '현재적 유토피아'로 전회(轉回)하고자 한다. '현재적 유토피아'라는 단어가 갖는 불합리성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러한 표현이 필요한 이유는 유토피아의 가능성이 언제나 미래로 지연되는 것 자체가 필연적으로 현재를 불모지 화하고, 회화적 실천의 질을 타협 가능한 진부함의 수준으로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 자! 그렇다면 무엇이 현재 회화에 대한 비평의 방법이 될 수 있고, 어떤 액션이 부정의 텅 빈 질(quality)을 긍정의 충만한 고원(plateau)으로 전회 할 수 있는가? ● 먼저, 현재 회화적 상황에 대한 비평의 방법으로 제안할 수 있는 것은 회화라는 대상을 환상(幻想)없이 바라보는 태도로부터 도출될 수 있다. 회화의 물질적, 정신적, 대(對) 사회적 조건을 미학적 당위성이나, 매혹의 언술 장치로 덧씌우지 않고 그 자체로 직시하는 것은 현재적 회화 상황에 대한 반성의 지점을 구체화하는 것이 되며, 거기서부터 그리기의 새로운 가능성 같은 것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작품 제작의 장소로서의 작업실과 작품 소비의 장으로서의 미술관 사이의 유무형의 거리 혹은 괴리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바꿔 말하면 미술 생산과 소비 사이에 구조화되어 있는 제도(institution)에 대한 것이 될 텐데, 개개의 특정한 컨텍스트를 내속하고 있는 작품이 사지 절단된 상태로 위생적이고 기능적이며 예술적 환영을 강요하는 전시장에 편입되면서 탈락되는 그 부수적인 것들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비평의 한 방법이 될 것이다. ● 마이클 아셔(M. Asher)가 쿤스트할레(Kunsthalle Bern) 미술관의 전시장을 텅 비우고, 대신 미술관 낭하를 따라 벽면에 라디에이터 배관을 모더니즘 회화의 자기 지시적 선(line)처럼 작품으로서 드러내는 것은 생산과 소비의 제도적 장치에 대한 냉정한 비판이다.(1) 우리는 마이클 아셔가 미술관 제도에 대한 논평을 미술관만을 소재로 했다고 이해한다면, 이 태도에서 더 나아가 작업실-현실의 문맥, 흔적을 미술관에 기꺼이 가져옴으로써 확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두 번째, 앞의 환상과 반대되는 의미로 회화를 충만하게 하는 생산적 환상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모더니즘 회화의 부정성에 의해 말레비치(K. S. Malevich)류의 가장 극단적 절멸의 회화형식을 유산으로 물려받은 우리가 회화를 멋지게 부고(訃告) 처리할 수 없는 이유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모더니즘 기획이 회화가 대상화 할 수 있는 모든 욕망을 달성하지 못했고, 현실적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까지 이 문제를 지지부진하게 끌어 왔다. 질문을 도출하고, 사유하기에는 언제나 회화의 미래가 불투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 여기서 '생산적 환상'이라는 나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라깡의 충동 개념을 잠시 빌려 보자. 정신분석학자 라깡(J. Lacan)은 충동의 목적(aim)과 목표(goal)를 구분하고 있는데, 목표가 최종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목적지라면, 목적은 주체가 하려고 하는 것, 즉 진행방법 그 자체를 의미한다. 충동의 실제 의도(purpose)는 그 목표(완전한 만족)가 아니라 목적이며, 충동의 궁극적인 목적은 단순히 충동 그 자체를 재생산하는 것, 충동의 순환궤도로 되돌아가는 것, 목표를 향한 그리고 목표로부터 나오는 그 궤도를 지속시키는 것이라는 것이 정신분석학적 충동 개념에 대한 라깡의 논점이다. 2) ● 그렇다면 모더니즘 미술의 충동은 자체적 순환궤도를 따라 자신의 충동이 재생산되도록 하는 것, 즉 목적의 행로를 그만두고, 목표점-현실세계, 미술계에 안착함으로써 충동의 실제 의도를 실패로 끝맺음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회화를 충만하게 소생시키는 생산적 환상-충동의 목적을 재설정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회화를 간단하게 혹은 멋지게 종결 처리해 버리지 않고, 지속할 수 있는 충동이다. ● 그 충동은 현실과 회화적 실재-'그리기 행위', 의식, 주제, 모티브, 물감, 캔버스, 배경, 재현의 방식 등등-를 분리시키는 경계를 편집적으로 사수하려는 데서 오는 정상적 갈등(슬라보예 지젝은 모더니스트 마크 로드코의 후기 회화 전체를 "현실로부터 실재를 분리하는 경계"를 지키려는 투쟁으로 보는데, 바로 이 '경계'는 광기의 징후와는 거리가 먼, 최소한의 정상상태의 조건이라 주장한다.(3))을 해소해 버리는 것, 그리기의 매혹(죽음에 이르는 즐김 jouissance)을 극대화 해버리는 것, 언표 자체를 무효화해 버리는 것 등으로 가능하지 않을까?

김화영_무제_천 위에 펜 드로잉_70×495cm_2001_부분

형식 ● 우리에게 새로운 형식들의 레퍼토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잭슨 폴락(J. Pollock)이 1947년부터 1950년 사이에 발명해낸 것은 형식들의 레퍼토리였다. 그 형식에 의해 이전에는 자기 재현의 주변부적인 측면-무언의, 육체의, 야성의, 자기 파괴적인, 자발적인, 억제되지 않은, 우리의 의식적 정신활동의 전에 있거나 너머에 있는 실존적인 것-이었던 것들이 부분적으로라도 분명해지고, 회화적 형식이 시니피에의 틀에 견고하게 연루된 지적 구축물이 될 수 있었다.4) ● 그러나 이러한 형식의 레퍼토리는 문화를 급조하여 재현하고, 교환가치로 전환하려는 문화 권력자들에 의해 변질된다. 예컨대 베티 파슨스 갤러리에 걸린 폴락의 드립 페인팅 회화, Number 1. 1950과 Autumn Rhythm 앞에서 패션 모델이 포즈를 취한 보그Vogue지 사진이 그 증거가 될 것이다. ● (2000년대 한국의 문화 상황도 이와 별반 다를 바 없다. 나는 이러한 주장을 단적으로 예시하는 사진을 하나 제시하고 싶은데, 그것은 본격 클래식 음악 잡지이자, 고급 문화를 표방하는 월간『auditorium 객석』2001년 12월호 84페이지에 실린 사진이다. 잡지 객석이 세계적 소프라노 이네사 갈란테의 작년 10월 내한공연에 맞춰 진행한 인터뷰는 갤러리 현대에 걸린 회화 작품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그림이 좋아요. 이 앞에서 찍어주세요"(5)라는 말을 하며, 포즈를 취한 화려한 의상의 세계적 소프라노에 의해 절반 이상 가려진, 혹은 모델의 '파스텔 톤 단색' 배경이 되었던 문제의 그림은 노상균의 스팽글을 이용한 회화작품이다. 인터뷰 내용에도 밝혀져 있듯이 그녀는 노상균의 파란색 스팽글 회화가 단순하기 때문에 좋다고 했고, 아마도 이 그림의 색깔과 형식이 갖는 단순함은 그녀를 잡지 사진에서 돋보이게 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던 그림의 효용성이었을 것이다. 물론, 미술관을 클래식 음악잡지 인터뷰 헌팅 장소로 생각하는 것부터가 고급문화와 대중 문화의 차별적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러한 인식 속에서 여지없이 미술관의 그림은 '사진발'을 받쳐주는 단순한 소도구가 된다. ● 괄호 속 여기에서 길게 논의할 바는 아니지만, 적어도 1951년 세실 비통(Cecil Beaton)이 찍은 폴락의 그림을 배경으로 한 보그지 패션 모델 사진이 첫째, 폴락이 미디어를 이용해 자신의 성공을 달성하려 했다는 것과 둘째로 이 보그지 기사를 시발점으로 모던 아트에 대한 흥미와 열광이 미국 전역에서 가능했다(6)는 미덕을 든다면, 도대체 한국의 음악 잡지 인터뷰 사진 배경으로 쓰인 노상균의 그림은 무엇을 얻었으며, 우리는 그 사진에서 멋지게 노래하는 척하는 이네사 갈란테 이미지말고 얻는 게 무엇일까?) ● 문제는 형식의 발명이 의미가 없다거나, 그것이 문화 권력에 의해 전용되는 것 자체에 대해 부정적 자세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부정하는 대립적 관계 자체만으로는 회화적 실천에 있어 전혀 생산성이 없다는 것이다. 모더니즘 미술에서 추상 회화의 다른 편에 위치해 있다고 가정되어 왔던 것, 예컨대 형상, 일상, 자연 등등은 사실 추상화와 그것의 실천에서 완전하게 배제될 수 없었다. 그것이 바로 모더니즘이 겪었던 악몽인 것이고, 그것이 악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현실과 회화적 실재가 모순적으로 엮이는 상황에서 끊임없이 화가들은 긴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 그리기가 지속될 수 있는 동력, 충동의 목적을 위하여 우리가 정작 해야할 것은 형식을 개발하기보다는 현실세계와 회화적 실재가, 그리기의 행위와 그림의 질이, 미학적 정당성과 회화의 사용가치(교환가치가 아닌)가 분리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또 "비타협적 태도, 긴장, 일상적 삶에 치명적인 감정들, 명예에 대한 맹렬한 관심과 신중한 자의식에 대한 욕망, 평범함에 대한 경멸, 질서에 대한 열망, 일관된 세계에 대한 맹목"(7)과 같은 모더니즘이 미술의 유토피아적 질로 꿈꾸었던 것들을 지키려 하면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희망 없음'과 현실적 왜곡과 같은 과정에 저항하고, 견딜 수 있는 무언가를 회화가 지속하는 것이다. ● 마지막으로 이도 저도 아니라면 최소한 모더니즘 미술의 이상적 주장들에 의해 불질러져 버릴 진정으로 집중된 작품을 하나 만들고, 그것을 정말로 불질러 버리는 것이다. ■ 강수미

(1) 박찬경, 「비좁은 작업실, 텅 빈 미술관」, 포럼 A 10호(2001. 12월호) 참조 (2) 슬라보예 지젝, 『삐닥하게 보기』, 김소연 , 유재희 역, 시각과 언어, 1995, p. 22에서 인용 (3) 슬라보예 지젝, 같은책, pp.45-46 (4) T. J. Clark, 『Farewell to an Idea』, "Unhappy Consciousness", Yale University Press, p. 308을 참조. (5) 월간 『auditorium 객석』2001년 12월호, pp.84-85를 참조 (6) T. J. Clark, 같은책, 같은 장, pp. 302-304를 참조할 것 (7) T. J. Clark, 같은책, p. 362 참조.

Vol.20020205a | 회화, 악몽을 꾸다展

2025/01/01-0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