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의 대화 / 2002_0202_토요일_03:00pm
책임기획_김장섭
참여작가 강상훈_고명근_구성수_권정준_김남수_김영길_김장섭_김재경_김훈_박경택 박홍천_배병우_엄은섭_오종은_유현민_이강우_이종화 이주한_이주형_정동석_정주하_최강일_홍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미술회관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0번지 Tel. 02_760_4602
…풍경…사진…사진…풍경…III
풍경, 두 가지 ● 「풍경으로부터의 사진, 사진으로부터의 풍경」이라···. 두 가지 층위. 하나는, 풍경landscape을 재현하는 인문적 행태gesture로서의 사진. 다른 하나는, 사진이라는 인문적 재현 행태들 자체의 풍경scene. 앞엣 것은 인문적 행태의 한 지표요 성과일 사진-이미지가 머금고 있는 文化culturalization적 차원이나 문맥이 문제이겠고, 뒤엣 것이라면 사진적 행태gesture 자체의 생성론적 문맥이 문제가 되겠다. ● 그런데 가만 곰곰히 생각하면, 우리가 늘 쓰는 '風景'(landscape도)이라는 말과 '寫眞'(photograph 말고)이라는 말이 우리 살림살이에서 은근히 품고 있었을 뜻을 헤아려보는 게 또한 이롭지 아니할까 하는데···. 風景은 風光景物(風에 관하여 {說文解字注}에서는 "〔···〕무릇 꼴이 없으면서도 와닿는 것을 일러 바람이라 한다凡無形而致者皆曰風"고 알려준다)을 줄여 이르는 것인데, {설문해자주}에 등재된 용례만 살펴보아도 이 말은 이미 고대 이래 중국 문헌 속에 흔히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landscape'이 '땅 위에 펼쳐져 있는 경치'로서 매우 즉물적 실체적이고 감각적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내 육신으로부터 동떨어져 저만치 '남'으로서 오롯하고 떳떳하게, 즉자적이고 자족적인 존재론적 자아의 뉘앙스를 풍기는 데 견주어, '바람과 볕'이라는 말뜻에서부터 이미 '風景'은, 극동아시아 한자문화권이 지녀온 그 오랜 자연의 형이상학을 그려 보이면서 땅 위 뿐만 아니라 땅 속, 하늘과 땅, 하늘과 땅 사이, 양달과 응달, 죽음과 삶, 공기와 흙, 지렁이와 별 등등을 온통 머금어서, 어느새 내 육신을 휘감아도는 듯한 서늘한 기운마저 느끼게 하지 않는가. 멋대로 압축하건대, 카스파 다비트 프리드리히처럼 낭만적으로 몰입하는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유럽 미국회화사에서 랜스케입은 존재론적 주/객 형이상학 속에서 재현과 呼名의 대상(타자)이었고, 시선 정치는 언제나 주체에서 객체로 일방향적으로 행사되었던 듯. 반면 風景이라면, 실존 차원에서는, 유한과 모순으로 얼룩진 속세로부터 거리두고distancing 소격alienation하는 한 방편이자 통로로서 흔히 '脫俗遠塵'한다는 그것이었고, 신화적 차원에서는, 궁극에 귀의할만한 이상향[적 경지]이자 초월경이었으니, 그런 거기서 시선은 오히려 저쪽에서 나에게로 와주면 그저 고마울 따름이니, 저 아득하고 그윽한 것이 내 이 보잘 것 없는 한 靈肉을 지그시 품는 한 어미(母)라 할 만한, 그런 것이었다('山水'라는 회화 양식은 이 '풍경'을 대하는 내면을 짐짓 비추는 것).
'寫眞'은? ···. ● 그런데, '풍경으로부터의 사진'에도 여러 광경acts이 있을 터이고, '사진으로부터의 풍경'에도 뻔히 이런저런 경우happennings가 있지만, 내가 오늘 그런 문제를 안고 다스릴 재조나 기운도 없거니와, 그건 나 같은 가욋 것이 함부로 건드릴 문제가 아니니, 나는 그저 감상자 처지에서, 풍경[작업]의 비평적 차원보다는 심미적 형이상학적 차원에 관해서 까불어볼 참이다. 풍경작업이, 특히나 사진으로 하는 작업이, 문화나 문명을 비평하는 한 형식으로서 대단히 유효하지만, 오늘 내가 하는 이야기는 그러한 비평을 가하게 하는 일종의 심미적 혹은 '윤리적' 차원의 거름이라고 봐두면 좋겠다. ● 오늘의 화두. 랜스케입이든 산수든 枯山水(일본)든 盤景이든 造園이든 랜스케입 아키텍처든, 풍경 작업은 실존적 허무를 달래기 위한 미학적 형이상학적 유희의 한 형식이라는 것(여기서 기교가 사진 정치의 한 꼭지로 등장할 것).
부름呼名 calling ● 알다시피 사진은 피사체와 나 사이에 카메라라는 존재론적 커튼이 있는 탓에, 피사체와 내가 '넋 놓고 交接하기'(산수화에서처럼)가 애당초 퍽 곤란한 메카니즘인 것처럼 보인다. 재현의 주체로서 내가 가진 시선의 권력과, 대상에 대하여 부여받은 헤게모니 때문에, '의미'라는 것은 언제나 내가 생산하여 대상에게 되돌려준다는 게 상식이다―말하자면, 이야기꾼(話者)로서의 절대적인 지위; 神格에 버금가는, 신화 서술자로서의 자격. 그리하여 풍경(質)은 의미의 커튼 뒤에 '숨겨진 채로' 쪼그리고 있는 꼴을 한 채, 의미라는 광막한 벌판의 '空氣' 속으로 녹아 없어진다. 이미지(文)로 환원되는 풍경. 의미로 환원되는 세상. 人文적 作態라는 것이 숙명적으로 관념-[재]구성-놀이라는 다이아그램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은 '재현의 정치'라는 개념을 통해 이미 상식이 되어있는 와중에, 그래도, 이렇게 환원된 의미[의 풍경] 속에서 짐짓 주인으로서 숨쉬는 일이 왜 이다지도 갑갑하고 불안하고 왜 이따금 허망하고 때때로 서글퍼지는지, 모를 일이다.
사진은 이를테면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 [꽃])는 식의 '부름'(신비주의적 몽환이나 종교적 체험이나 낭만적 동경에 내장된 '投射'나 '거리'가 아니라)처럼, 살림살이의 고독과 소외감을 보상하기 위한 몸짓이 아닌가. 無常하지 않은 '어떠함'에 가닿고자 하는 애틋한 꿈. 허무를 다스리고자 하는 극. 우리의 제스처는 극의 플롯을 통해 의미의 사슬을 구성하기도 전에, 극을 수행하고자 하는 뜻과 그 몸짓만으로도 이미 인문의 한 형식을 이루지 않는가. 사진은 의미에까지 나아가지는 못한다. 사진은 세상을 의미의 차원에서 직접적으로 해명하는 작태라기보다, 세상 주변에서 아지랭이나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어떠함'('무엇'이라기보다)이 아니겠는가. 또한 質((인문주의적 재현 이전, 혼돈의 生態)) 자체로서의 풍경은 부재하고, 그것에 대한 언어(文)만이 아지랑이같이 가물거린다고 본다면, 어쨌든 우리의 제스처를 통하여 수행되는 극의 언어적 차원은 무엇일까. 안개인가? 아니, 안개나 아지랭이가 아니라,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육신이 곤혹스럽게 겪는, 넋의 어지럼증이 아닐까. 그러니 우리의 제스처에 묻어있는 '어떠함'을 굳이 언어'적' 차원에서 말해본다면 그것은, 오히려 부재'를 향한 그리움'이 아니겠는가. [언어의] 부재에 대한 열망(나는 사진이 '부재의' 언어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언어를 통과하지 않고 세상에, 풍경에, 살림살이에 가닿을 수 있는 길이나 방편은 없는가. 언어에 절망한 자가 기대어 쉴 수 있는 그늘은 어디인가. 언어의 틈?
사진의 '부름 呼名'은 어떤 꼴인가. 이름(名)을 부른다(呼). '이름'과 '부름'. 사진은 이름인가, 부름인가, 이름을 부름인가. 김춘수의 부름은 '꽃'(언어, 이름)이 있어서 가능했지만, 오늘, 사진은 언어가, 또 이름이, 없는, 그저 '부름'일 따름이다. 언어로서의 꽃이 없으므로 우리의 부름 또한 언어를 通하지 못한다. 언어를 갖지 못했으므로, 부를 수 없다. 육신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虛氣가 그저 '우어···' '이으···' '하아···', 벙어리 냉가슴으로부터, 새어나올 뿐이다. 막막한 입시늉과, 형태 못 가진 소리만 앙포르멜하게, 거친 표현주의적 붓질처럼 허공에 춤출 뿐이다. ···이름을 부를 수 없는 부름. ● 이렇게, 사진은 '무엇'에 관여하지 못하므로 언어가 되기 퍽 힘들고, 한술 더 떠, 부재'를' 노래하는 언어적 해명의 제스처라고 하기는 더더욱 어렵겠다. 그러므로 사진은 '재현' 메카니즘이라기보다, 재현'에 좌절한 기교'라 할 수 있지 않는가(그러므로 사진은, 아니 우리의 이 '기교'는 세상에 대한 어떠한 잉여이거나 덤이 아니라 운명적인 하나의 애절한 제스처일 수밖에).
기교, 놀이 ● 技巧? 그렇지, 기교. 언어를 육신으로 갖지 못한 사진은 그 '허기'를 다스리기 위하여 기어코 기교를 탐하게 된 것(물론 기교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절명하는 자가 한둘이 아니지만···). 그러나 기교는 허기를 육신으로 가져야 可한 것. 의미를 육체로 삼을 수 없는 사진은, 그랬을 때에만 기교가 의미를 대체할 수 있을 것. 적어도 사진에서 의미는 기교를 감싸는 허수아비 같은 것, 또 의미는 기교 주변에서 난무하는 아지랭이와 같은 것(누가 그 정체를 규명할 수 있으랴. 저마다 지닌 허기만이 아지랭이 속을 기웃거릴 수 있을 것). 재현에 좌절한 기교인 사진은 기교를 통하여 죽음을 넘어서는 것 아닌가.
그리하여 이쯤에서 사진적 작태를 언어로부터 脫肉한 '놀이(遊戱)'라 부를 수 있겠고, 거기서부터 사진은 언어의 무덤이 될 것. 사진을 감싸고 도는 저 아득한 허기라든가 짙은 傷痕 들이야말로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나의 육신을 방랑하게 하는 한 까닭이 된다. 사진은, 그래서, 무덤이고, 다른 세상으로 건너간 자가 이승에 남겨놓은 집(흔적)이다. 피사체와 의미, 그러니까 풍경, 으로부터 사진이 자유를 얻어내는 방식이 이와 같다. 언어 의미를 포기하고 놀이를 자처할 때에 사진은 기교를 통하여 자신의 육신을 드러낸다. ● 의미를 無化하는 기교, 이름을 지우고, 대상-나 사이의 필연적 인문적 거래에서 오는 窮氣를 넘어서는 기교, 그리하여 우리 살림살이의 虛氣를 다스리는 놀이로서의 기교. 풍경 자체(質)의 직접성을 내 내면의 허기를 통하여 '우연히' 만나는 일. 잠정, 우연, 無常. 그러므로 寫眞이 아니라 寫'假'. ■ 김학량
Vol.20020126a | 풍경으로부터의 사진, 사진으로부터의 풍경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