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일시_2002_0104_금요일_05:00pm
갤러리 보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9번지 Tel. 02_725_6751
사회적 표준에 관한 개인의 위치중심으로... ● 본인의 작업 즉, 표준의 개념은 속도와 우등의 사회에서 인간 개인의 상황적 모습의 재현, 차이화 된 소수와 그 제도 안에 머물며 영토화 된 이율 배반적인 구조를 탈 영토화 시키는 이야기를 담는다. ● 이제껏 사회에서 보이는 아니 앞으로도 진행될 일련의 표준을 강요하는 사회에서의 사건들은 미개와 개화 우등과 열등 정상과 비정상의 제도와 그러한 시각적 영토화 된 사회에서 권력의 장으로 소수의 주체 개인 존재를 권력의 장소로써의 탈취된 영토와 탈취된 영토의 앞을 이 작품들은 뛰어들기를 시도한다. ● 본인이 제작한 이러한 시각적인 장치(영상 등)들 속에는 자본주의와 도덕주의와 윤리로 인해 코드를 덧붙이고 통제된 극장이 된 사회들의 시장모습들과 구경들, 그리고 현제 표준을 강요한 기준의 사회로 전락해 버린 제도적 장치들의 영상들이다. 이러한 개인에게 가해지는 제도와 코드 그리고 표준의 제도적 장치들은 개인의 사적 공간까지 확대된다. ● 그러한 표준이라는 미명아래 놓인 사회적 시각, 그것은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간에 초월적 가치와 힘을 지니며 강박증과 코드와 태도를 하나로 묶어 포함되는 자본주의의 욕망과도 관계된다.
우등과 일등 정상과 발전이라는 변명은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보편적 사고와 연결 되 그와 관계하여 광고나 미디어를 중심으로 교육과 나아가서는 제도적 장치와 등급의 코드를 단일화하면서 당위성과 도덕성을 확인하고 결정한다. ● 본인의 일련의 작업들은 전자에서 논한 그러한 비판적 시각의 환원이며 보편화된 사회적으로 코드로 환원된다면 도리어 읽지 못할 수 도 있어진다. 본인의 작품에서 물음을 던져 본다면 과연 "표준은 무엇일까? "라는 논제이며 이점에서 관객이 자본주의의 흐름에서 표준의 제도적 장치와 코드화된 개인 그리고 의심할 수 없는 사회 미적 기준이 조작과 환영에 불과하다고 의심하게 만든다. ● 본인은 작품의 이미지와 실체보다 개념과 이를 실천하는 연장선상에 있다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미래의 보편적 가치기준과 일련의 분할의 선정방식과 진화가 배푸는 제도라는 논쟁을 포함한 사건들, 또한 그 개인에게 가해지는 친절들을 끝없이 의심하라고 해 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 이렇듯 방향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이론과 실천이 그것이며 입장면에서 끝없는 차이화와 사회되기(들뢰즈식으로 말한다면)를 희망한다. ● 본인의 이러한 현실의 읽기는 메시지와 방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개인 자신이 무엇을 하고 무엇을 당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지점에 놓인다. ● 본인은 영상과 작업을 통하여 사회적 맥락 속에서 코드화를 거부하고 탈주자의 주체의 개인으로 남기를 희망 할 뿐이다. ■ 김기라
정상으로 꿈꾸기 ● 매해 겨울이 올 때마다 되풀이되는 것이 있다. 불우이웃을 돕자거나, 자선냄비의 성금이 지난해보다 많아졌다거나, 보호시설을 찾는 손길이 예전보다 잦아들었다거나 하는 말들 말이다. 올 겨울엔 또 어떤 통계치가 나올까. 경기가 나쁠 대로 나쁘다고 하니 기본적으로 그 도움의 금전적 액수가 당연히 줄어들었을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이 나올까. ● 누군가를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은 항상 가치 평가를 수반하게 되어 있다. 일단 왜 도와주어야 하는지 그 명분이 확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거기에는 언제나 기준, 혹은 표준이 되는 지점이 있다. 그 기준은 무엇일까. '정상적인' 생활이란 대체 무엇일까. 어느 정도로 먹고, 입고, 꿈꿀 수 있어야 정상일까. 겨울이 아니더라도, 우린 항상 이런 고민을 하게 된다. 일례를 들어보자. 얼마전 TV 뉴스에서 가계 소득 평균치에 관한 통계를 보여준 적이 있었는데, 하위 5%의 월평균 소득이 75만원이라고 소개된 바 있다. 여러분은 대체 이 통계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처해 계시는지. 여러분은, 얼마만큼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인지. ● 돈 얘기로 말을 시작했지만,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편가르기는 사실 그 녀석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돈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모든 가치가 그것에게로 환원될 수 있다는 사실. 어쨌든 그 편가르기의 실체에 조금 더 접근해보도록 하자. 여기 한 작가가 있고, 또 그가 제공하는 네 편의 작품이 있다. 싱글 채널 설치로 준비되어 있는 이 작품들은 일견 재미있는 듯 하면서도 음산하다. 극단의 감정을 오가게 만드는 작품 속으로 잠시 들어가보는 일이 아마도 '편가르기의 실체'에로 다가가 보는 방법이 될 듯 하다.
「dance dance」는 세 명의 다운증후군 환자가 수영장에서 춤을 추고 있는 장면을 빠르게 재생하여 다소 우스꽝스럽게 그들을 표현한 작품이다. 얼핏 보기에 그들은 중복 장애가 없어보이는 비교적 정상적인 환자들인 것 같다. 기본적인 신체 활동에 지장이 없다는 것은 다운증후군 환자들을 놓고 보자면 아주 다행한 경우다. 그런데, 그들의 운동을 작가는 왜 빠른 화면으로 보여주어서 피식 웃음이 새게 만든 것일까. 일반적으로 '도덕' 수업을 잘 받은 사람이라면 그들의 부자연스러운 동작을 묵묵히 바라보면서, 저들도 사람이다 하는 생각을 묵직하게 강요받고 있겠지. 하지만 생각해보라. 보통 사람의 움직임도 빠른 화면으로 보면 재미있는데, 더군다나 어색한 동작은 오죽할까. ● 하지만 그 옆에 설치되어 있는 「표류하다」를 보면 상황은 돌연 엄숙해진다. 지나친 편집증으로 인해 다른 상황에 적응하는 것이 더디거나 불가능한 자폐증 환자 역시 우리 사회에서는 정상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인데, 이 작품에서는 자폐증상을 가지고 있는 여자 아이가 등장한다. 그 아이가 벽에 붙어 서서 끝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동작은 「dance dance」에서처럼 빠른 화면으로 재생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앞에서 단 한 번도 웃을 수가 없다. 차라리 빨리 그 무거운 상황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든다.
두 개의 작품을 병치하면서 작가는 일반적인 비정상을 대하는 시각이 어떠한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비정상' 앞에서 그들을 멸시하며 비웃거나, 그래서 제가 표준임을, 나아가 강한 존재임을 확인하는 기쁨을 누리거나, 아니면 '비정상'의 섬뜩함 때문에 그를 피하고 싶을 만큼 두려워하는 우리들. 앞서 모든 구분과 표준의 설치, 그리고 그것으로 구획되는 세계가 자본으로 환원되는 섬뜩함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지만, 사실 그것은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문제인지도 모른다. 사회가 고도로 정교하게 발전하면서 만들어내는 표준의 원칙은 그것이 미처 성문화되지 못했던 자연법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을지 모르는 것이다. 그 원칙이란 사실 약육강식에 다름 아니다. 물론 현대 사회를 자연법 시대의 사회와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라는 게 고도로 다듬어진 약육강식의 논리라고 본다면 이해가 가능하지 않을까. ● 신체적으로 소외당해 있는 집단의 일만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상징적인 것일 뿐,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구역 내에서도 얼마나 다채로운 표준의 칼이 날을 벼르고 있는지. 다음으로 보게 되는 작품은 「수퍼 헤비급」인데, 여기에는 신체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아니 표준 이상으로 튼튼한 사람들이 한 쌍을 이루어 권투 경기를 하는 장면이 역시 빠른 화면으로 나온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해왔던 약육강식의 모습이 압축되어 소개되는 것이다. 승자는 살아남고 패자는 다음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 ● 그리고 우리는 생각하게 된다. 이긴다는 것은 무엇인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지 못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손길이란 또 무엇인가. 작가는 친절하게도 그렇게 생각할 시간을 마련해놓았다. 「count」에서는 승패를 가르는 심판의 숫자 세기가 시작된다. 원, 투, 쓰리, 포... 10까지 세는 동안 잘 생각해 보시라. 여러분은 어디쯤 계신지. ● 비정상, 또는 기준을 넘어서버린 것에 대한 멸시 혹은 경외. 굳이 장애인이 아니더라도, 그 '비정상'에 대한 이러한 관점이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은 철저히 그 기준에 합당한 사람이 되던가, 아니면 그 굴레를 벗어나라고 부추기는 울림일 것이다. 이기지 못하면, 표준에 부합하지 못하면 '장애'로 취급당하는 현실 속에서 한번쯤 생각해 보자. 실제로 다운증후군 환자들이 보호시설에 들어가면 법적으로 거세를 당한다고 한다. 불순한 유전자를 다음 세대에 전하지 않으려는 고육책이긴 하겠지만, 대체 어디까지를 정상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지. 자가 거세를 해버리던지, 아니면 거세당하던지, 선택은 우리들 각자의 몫이다. ■ 황록주
Vol.20020103a | 김기라展 / KIMKIRA / 金基羅 / vid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