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사 박물관

윤정미 사진展   2001_1219 ▶ 2001_1231

윤정미_자연사 박물관_컬러인화_70×70cm_2001

초대일시_2001_1219_수요일_05:00pm

갤러리 보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9번지 Tel. 02_725_6751

'오리지널' 자연사 박물관 ● 생물학자들의 보고에 따르면 앞으로 30년 안에 지구에 살고 있는 생물종의 1/4이 사라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그리고 세계 최대라고 하는 미국의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에는 1억2천4백만이 넘는 생물종이 수집되어있다고 한다. 세계 각 국의 자연사 박물관, 생물학 연구소들은 하루하루 멸종하는 동식물의 표본을 구하고자 분주히 움직이고, 표본이 늘어가는 동안 멸종도 늘어가고, 멸종이 늘어갈수록 표본의 가치는 증가한다. 연구자들은 지구상의 마지막 검독수리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것이 죽은 직후 표본을 만들 것이다. ● '그' 검독수리에는 가능한 최대한의 데이터가 따라붙을 것이고, 그 중에는 학명, 죽은 날짜, 태어난 날짜, 수집된 장소, 수집자의 이름, 성(性), 기타 등등이 기입될 것이다. 레이블은 연필이나 혹은 불가용성 잉크로 쓰여져야만 하며, 혹시 조류 바이러스가 사인(死因)이 되었는지 여부도 반드시 기입되어야한다. 복개할 경우 흉골을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되며 단 한번으로 복부 가운데를 갈라야한다. 뇌 조직을 제거할 때에도 유사한 정도의 조심성이 필요하다. 박제가 되어 유리장에 안치된 검독수리는 이제 '그' 검독수리에서 보통 명사화된 검독수리, 검독수리의 대표이자 동시에 척추동물 중 조류 중 맹금류 중 수리류의 부분으로서 '제 위치'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사 박물관에는 자연이 죽은 채로 있게 되는데, 그 실체로서의 자연의 죽음은 엄청나게 많은 이름들과 관련된 복잡한 추상적 범주체계가 살아나는 순간과 일치한다. 그 추상적 언어체계란 두말할 것도 없이 역사의 고안이지 자연사의 고안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검독수리는 꿩을 잡는 방법을 우리보다 훨씬 잘 알고는 있었겠지만, 자신이 그렇게 복잡한 인간 언어 체계의 대표, 증거, 부분으로 남게될지는 전혀 알 수도, 원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 상황이 이렇다고 해서, 현대 자연사 박물관의 기능을 자연을 길들이고 자원을 얻고, 결국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만으로 단선적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자연사 박물관은 생태의 다양성과 생태시스템의 상호의존성을 일반에 계몽함으로서, 오히려 자연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1880년대 미국의 국립 자연사 박물관이 분류목록과 표본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동식물의 서식처를 중심으로 그들을 하나의 통합된 공간에 모델링하여 전시하는 방식을 택했던 것은, 그 궁극적인 계기가 무엇이건 바로 이러한 생태학적 다양성과 상호의존성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다. ● 대규모의 서랍장과 표본실을 한편으로, 서식지 중심의 디오라마들은 분류된 다양한 자연물들이 분리될 수 없는 순간, 즉 서로 의지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시공간의 전시공학을 연구와 더불어 대중에게 교육하려는 목적에서 발전시켰다. 그러므로 이것은 독수리가 꿩을 두발로 잡고 부리를 쑤셔대는 순간과 같은 자연 속의 사건을 일화로 묘사하는, 연극적 장치나 예술적 수단을 요구하게 된다. 말하자면 과학자, 예술가, 박제사는 긴밀한 협동으로 자연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어떤 순간을 유리장 안에 리얼하게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과 과학, 연구조사와 전시, 과학과 예술, 실제현장과 전시현장, 과학과 과학대중화, 분류와 통합, 범주와 연사체(syntax)의 결합이라는 자연사 박물관의 이상(理想)은 과학 자체의 성격이 변화됨에 따라, 점점 더 곤란에 처하게 된다. 현대 자연과학은 점점 더 실험과학과 전문화된 메커니즘을 좇게되고, 오브제보다는 아이디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되며, 특정한 학문적 관심과 요구, 학문 내적인 경쟁 등은 전시를 더욱 극적인 픽션으로 이끌어가게 된다. 이를테면 1960년대 영국의 자연사 박물관의 열대 우림의 서식지 전시장은 식물학적 관심에 따라 동물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 자연에 대한 과학의 길들이기가, 과학의 자율적인 변화, 과학계 내부의 지적인 경쟁, 심지어 연구비 펀드를 따내기 위한 경제적, 행정적 필요 등에 영향받을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백인사회의 식민지 지배와 깊게 관련된다는 것은 이미 여러 사람이 지적하였다. 이국적 자연물에 과학의 레이블이 붙는 순간 자연은 인간화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인간들에 의해 인간화된다. 이것은 민속박물관이 자연사 박물관으로 전이되는 국면이다. ● 쉽게 말해서, 자연이 과학의 이름 아래 내러티브화하는 것은 물론, 과학 자체도 과학제도나 과학이데올로기와 연루된 또 하나의 내러티브라는 견해이다. 그런데 이 때 픽션으로서의 자연의 내러티브는 과학의 내러티브에 의지하며, 과학의 내러티브는 자연의 내러티브를 필요로 한다. 과학의 내러티브, 전문적 텍스트는 과학적 실험과 논리를 전면에 부각시켜야 하지만, 자연의 내러티브, 대중적 텍스트는 과학자의 존재를 생략해야만 '자연스러울' 수 있게된다. 자연사 박물관의 서식지 그룹들은 정확하게 이 두 가지 내러티브 사이의 긴장을 통해 보여진다. "서식지 그룹 제작자들이 그들의 작업에 몰두하는 동안(자연의 내러티브), 그것이 리얼리티의 환영(illusion)이라는 깨닫게되는 관객은 그 제작의 예술적 절묘함에 주의를 집중하게된다.(과학의 내러티브). 이 두 가지의 결합을 통해서, 서식지 그룹은 리얼한 것보다 더 리얼한 것, 움베르토 에코가 '하이퍼-리얼'한 것이라고 했던 현상이 된다." 자연사 박물관의 하이퍼-리얼리티는 이러한 상호의존성의 최종적인 결과로 인식된다. 마치 사진이 그런 것처럼, 자연사 박물관은 자연의 표상이자 동시에 과학의 표상이 되어야 하는 하나의 모순 속에 놓여져 있다.

윤정미_자연사 박물관_컬러인화_50×110cm_2001_부분

경희대학교 자연사 박물관 ● 윤정미 사진에 나타난 자연사 박물관도 위와 같은 '오리지널' 박물관 담론이 일정한 한계 안에서 적용된다. 특히 경희대 박물관은 조류에 상당부분 집중되어 연구자료로서의 가치도 있고, 컬렉션도 상대적으로 광범위한 편이라고 한다. 그런데 윤정미가 찍은 경희대학교 자연사 박물관은 스미소니언 자연사 박물관과 비슷하면서도 크게 다르다. 박물관이 근대성의 산물이자 총화라면, 이것은 서구의 근대성과 한국의 근대성을 비교하면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맛보게되는 우리의 양가감정과도 비견된다. ● 우선 경희대 자연사 박물관은 그 소장품이 억 단위가 아니라 만 단위로 추정된다. 도서관의 책 수가 도서관의 질을 결정하는 것과 똑같이, 이 수량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건물, 예산, 스태프의 규모도 이에 상응하여 큰 차이가 있다. 윤정미의 사진은 프레임과 수에 한계가 있는 사진(카탈로그와 전시)이기 때문에 이러한 수량과 규모, 수준의 차이를 드러낼 수 없는데,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이러한 부기(附記)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경희대 박물관의 허술함을 지적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세계최대의 전쟁기념관은 있지만 국립 자연사 박물관이 단 하나도 없는 한국의 부조리한 상황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단지 묘사하는 것이다. 즉 사진이 보여줄 수는 없지만, 이러한 상황은 윤정미의 이미지들을 보는데 하나의 필수적인 문맥이다. 다시 말해서, 위에 너무 압축해서 기술한 서구의 자연사 박물관과 그 담론은 적어도 그 실제 영향력에 있어서나, 그것을 사회형성, 구조의 단면으로 상상하는데 있어서 국내의 자연사 박물관과 비교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점이, 윤정미의 사진을 오히려 흥미롭게 읽어나갈 수 있는 전제이자 단서가 된다. ● 언뜻 보면 윤정미의 사진은, 세계 어디에나 존재하는 자연사 박물관의 공간, 기호의 질서를 다시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당연히 그런 면도 있으며 그것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윤정미의 단 한 장의 사진을 통해서도, 이 박물관이 조사와 연구기능 보다는 소박한 교육적 목적에 훨씬 치중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희대학교 풍경그림을 배경으로 서있는 사자 박제는 1978년 경희대 자연사 박물관이 설립되었을 당시 만들어진 것이다. 윤정미가 자연사 박물관 건물을 옥외에서 촬영한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사자는 경희대학교의 학풍을 상징하기 위해 선택된 아이콘이다. 자연사 박물관 안에 있는 박제 사자는 생물학의 연구대상 표본, 대중에게 생태학적 다양성을 알리는 무엇이라는 것을 단지 명목상으로 취하면서도, 대학의 광고와 학문 자체가 완전히 동일해짐으로서 학문적 열정이 그 육신을 얻은 무엇이 되려고 하고있다. 과학은 '과학적 표상'으로 바뀌고, 과학적 표상은 이내 제도의 욕망으로 화한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과도한 솔직성에 의해 실패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이 사자의 슬픈 면모이다. 이 포효하고는 있지만 죽은 사자는 다른 동물 표본들 사이에 여전히 끼여 있다.

윤정미_자연사 박물관_컬러인화_70×70cm_2001

앞에서 언급한, 과학과 학문의 내용이 경제적, 행정적 필요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 복잡한 이데올로기 투쟁 속에서 서구의 진보적 학자들이 '어렵게 발견한 것 같은' - '오리지널' 이론이, 경희대에서는 아무 것도 숨길 것이 없으며 그럴 필요도 없는 방식으로, '해석하기도 전에' 이미 드러나 있다. 돌로 된 사자와, 박제된 사자 사진을 통해서, 윤정미는 그러한 한국적 근대성의 말단에 함축적인 메시지를 부여한다. 그것은 서구문화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에게는 한국적 근대성을 매우 창조적인, 뜻밖의 결과처럼 나타내며, 그 뜻밖의 결과는 그것이 더구나 외국산 맹수라는 사실에서 최고의 위트, 그렇게 우습지만은 않은 위트를 발휘하게 된다. 같은 사진 안에, 사자의 왼쪽에는 조그만 설치류들이 붙어 있는데, 사자의 그늘에 숨어있는 이 한국산 다람쥐만이 진실을 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이러한 관심을 갖고 윤정미의 다른 사진들을 훑어보면, 이 정방형의 단정하고 깔끔한 사진들이 사실은 자연사 박물관의 원본들과 조금씩 미끄러지는 국면들을 포착하고 있다는 것에 주의를 돌리게 된다. 서식지도 다르고 종류도 다른 동물들이 한 유리장안에 배치되어 있다던가, 바닥에 배를 내밀고 죽어있는 새들과 플라스틱 봉 위에 예쁘게 앉아있는 새들이 무관심하게(uninterested) 병치되어 있다던가, 또 딱따구리 종류의 새들이 원기둥에 '자연스럽게' 둘러붙어 있다던가 하는 모습은 한국형 자연사 박물관의 어정쩡하고, 심지어 해학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어떤 의미심장한 빈틈을 노출한다. ● 아마도 이것이 윤정미 사진의 '푼크툼'일텐데, 이를테면 호랑이가 있는 유사-디오라마의 내러티브는 그 대표격이다. 호랑이 두 마리가 이들 보다 왠지 덜떨어져 보이는 미국늑대 회색형과 미국늑대 백색형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는 물론 살아 생전에는 전혀 같이 있어보지 못한 동물들이 죽어서 만난 모습이다. 아마도 '푼크툼'은, 이 이국적인 '환영'을 별안간 깨듯이 광경을 좌우로 나누고 있는 유리장의 틀이 아닐까 싶다. 프레임 -기술이 없거나 비용이 모자라서 초래된 이 중대한 결함-은, 더구나 무늬만 나무인 화학재료로 만들어져있다. ● 과학 내러티브와 자연 내러티브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의 보이지 않는 봉합으로서의 하이퍼-리얼리티는 조촐한 국내 자연사 박물관에서는 찾기 보기 어렵다. 여기에는 아직 영생을 얻지 못한 죽음, 과도한 인위성의 리얼리티가 있고, 하이퍼 리얼리티를 얻기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내러티브 사이에는 눈에 띄는 괴리가 있다. 윤정미는, 이화여대에서 최근에 큰 돈을 들여 만든 디오라마를 찍었는데, 아마도 여기서는 그러한 하이퍼-리얼리티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정도 수준의 자연사 디오라마는 국내에 단 하나 뿐이라고 한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국립묘지 전쟁기념관은 용산 전쟁기념관 때문에 보기 민망할 정도로 초라해졌다. 만약 국립 자연사 박물관이 만들어진다면 스미소니언만큼은 못할지 모르지만, 두개의 내러티브를 그에 못지 않게 통합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명확한 죽음을 보는 편이 환상적으로 살아있는 하이퍼-리얼한 죽음을 보는 것보다 나은 것은 아닐까. 이에 대한 대답을 '근대성 문제'를 해결한 새로운 자생적 박물관학에 맡겨둔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윤정미가 발견한 자연사 박물관의 허술하고 조촐한 공간은, 거대 박물관의 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잔인성, 그 '공포 없는 세계'에 비하면 정겹게 느껴지기조차 한다.

윤정미_자연사 박물관_컬러인화_70×70cm_2001

동물과 감각의 왕국 ● 박제가 사물화한 사진이라면, 사진은 평평해진 박제이다. 자연의 하이퍼-리얼한 가공은 '내셔널 지오그래픽'과 같은 대중적 과학잡지의 사진들 속에서도 수 없이 반복된다. 예를 들어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사라질 위기에 처한 바다의 포식자 백상아리" 표지사진은 자연사 박물관 박제사들이 참고할만한 훌륭한 자료가 될 것이다. 이렇게 박제는 250분의 1초로 찍힌 사진을 필요로 하지만, 박제를 온전히 찍으려면 꽤 장시간의 노출이 필요하며, 박제는 '사진이 흔들리지' 않게 이미 영원히 정지해 있다. 생명을 중단시킴으로서 영생을 부여하는, 사진과 박제의 존재론적 유사성은 둘 모두에게 치명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박제는 극적으로 살아있어 보이는 순간을 묘사하길 좋아하고 사진 역시 활공동물이 날아가는 순간과 같은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길 좋아한다. ●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들은 한편으로는 '과학의 대중화' 전략들 속에서 등장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과 상업적 책략 속에서도 자주 나타난다. 김중만의 '아프리카 여정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반복되고,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자연 이미지는 다소 수준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충무로 이미지 뱅크의 격자망(grid) 속에서도 클릭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자연 이미지들의 교환가능성은, 과학, 예술, 비지니스가 자연의 위장(camouflage)이라는 사실뿐만 아니라, 과학, 비지니스, 예술이 서로를 위장하면서 순환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시스템을 구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사진을 다르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 전시장에 있느냐 과학잡지에 실리느냐 아니면, 이미지 뱅크에 넘버링 되어있느냐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 아마도 이러한 살아있는 밝은 세계, 무수한 디테일로 이루어진 매우 시각적인 세계의 반대편에는 둘 중에 하나가 있을 것이다. 하나는 과학에 길들여지지 않은, 사진이나 비디오로 포착되기 이전의 실제 자연의 세계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동물원이다. 동물원은 자연사 박물관과 공원을 합친 장소이며, 교육과 오락 기능을 겸비한 곳이다. 물론 동물원의 기원과 기능을 따져보면 자연사 박물관의 근대주의적 기획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원의 기호학은 자연사 박물관의 그것을 뒤집어놓은 모양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동물원에서 우리는 동물의 냄새를 맡고, 비스킷을 주며, 공간의 거리감을 의식하고, 멀리서 쳐다보며 움직임을 기다린다. 동물들이 철창을 사이로 우리와 함께 '실제로 거기에 있다는 느낌'은, 시각적인 집중과 긴장보다는 다소 느슨한 존재론적 관조나, 낯선 신체적 체험을 환기하게 된다. 동물원의 동물은 아직 죽지 않았고, 그러므로 아직 덜 된 박제이며, 그만큼 덜 대상화되어있다. 우리는 약간의 감상주의를 발동시켜 그들이 불쌍하다고 느끼기조차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동물원은 일종의 자연과 인공 사이의 '소격효과'라고 할만한 세 번째 내러티브를 갖고 있다. ● 윤정미의 자연사 박물관 사진은 1998-1999년에 작업한 '동물원' 시리즈의 후편 격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는 동물원의 썰렁한 공간, 사람과 동물 사이의 거리감과 소위 '타자성'을 드러내는 작업으로 볼 수 있다. 이 사진 중에는 대단히 감정이입적이라는 면에서 예외적인 장면이 하나 있다. 유인원이 창에 기대 서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 사진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감정이입의 장애도 똑같이 겪게 된다. 이 고릴라는 우선 너무 사람과 닮은 표정을 짓고 있으며, 게다가 확실치는 않지만 대단히 복합적인 감정상태-체념과 우울과 분노가 합쳐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전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진정으로 공포감을 주는 것은, 이빨을 드러내는 박제 사자나 사진 속의 상어가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현장이다.

윤정미_자연사 박물관_컬러인화_70×57cm_2001

진화론을 믿건 안 믿건, 유인원은 사람과 근친적인 동물이며, 그런 면에서 '우리'(사람과 유인원)는 생물학적 근거를 나눠 갖고 있다. 사람이 그와 "같은" 하나의 동물이며, 단지 "다른" 동물이라는 것을 일깨울 수 있는 명확한 특징들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사람)는 그 차이 때문에 안도하지만, 감정이입은 그 동일성 때문에 중단된다. 그 동일성이야말로 과학이 알고자 하는 신비의 원천이며 과학의 한계이다. 이것은, 동물 뼈와 사람의 해골이 함께 굴러다니는 어두운 동굴세트에서 보여주는 우습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한 에피소드와도 같다. 이러한 유사성과 차이의 변증법은 사진의 변증법과 겹쳐진다. 윤정미의, 인공으로서의 사진은 유인원을 가두고 있는 프레임을 사진의 프레임으로 반복함으로서, 프레임을 서로 지시해준다. 그러나 윤정미의, 자연으로서의 사진은 그 디테일-생물학적 유사성과 차이를 자세하게 기록하는 것이다. ● 이 모든 동물(과 그 재현)의 문제는 결국 하나의 문제, 자연의 세계가 인간사회의 메커니즘을 재생산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니면 겹겹의 다양한 인위성, '언어-프레임'들 밖에 여전히 남아 있을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을 요구한다. 윤정미의 자연사 박물관 사진이 이러한 거대한 문제에 대해 즉각 답하려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언어-프레임의 허술한 국면을 드러내거나, 프레임에 프레임을 다시 입히고, 담담하게 어떤 과장된 표정들을 생략해나감으로서, '동물의 왕국'이 감각의 거울 속에 갇혀있다는 점만은 분명히 지시하고 있다. 인체의 감각기관을 하이퍼-리얼하게 모방하여 포르말린에 담은 다음 이를 촬영한 윤정미의 사진이, 과학이든 예술이든 비지니스든 그것(자연 혹은 인간)을 거의 임상적 대상이 되어버린 나르시시즘으로 표상하고 있듯이 말이다. ■ 박찬경

Vol.20011225a | 윤정미 사진展

2025/01/01-03/30